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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2015)

Nake 2015. 5. 30. 17:53




[스포일러가 상당합니다]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가 나왔습니다. 이 영화의 개봉을 수식하는데에 여러가지 종류의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기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는 기적적으로 개봉했습니다. 30년의 기다림 끝에, 3편의 혹평 끝에, 일흔이 넘어가는 밀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기상천외한 악재에 처하고도,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는 기적적으로 개봉한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결과물은 환상적입니다. 이 리뷰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수십가지 이유중에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팬으로써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을 분석할 생각입니다. 왜 장르로써 이 영화를 분석하냐구요? 간단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르의 팬이 아니었던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개봉이란 저에게, 그리고 이 장르의 팬들에게 신이 직접 내려와 새로운 경전을 써내려가 우리에게 전파한 것과 같은 의미이기 떄문입니다.

이 영화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모호합니다.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죠.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과감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매드 맥스 시리즈가 과감했고, 이 영화의 감독인 조지 밀러가 과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핵전쟁이 일어났었고, 물이 부족해졌다는 짧은 설명 이후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설명을 굳이 하지 않고 과감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다시말해, 이 영화에서 시대가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기에 생략됩니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맥스(톰 하디 분)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과거를 가진 사람인지 일일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째서 사막에 홀로 남겨져 있었는지 설명하길 거부합니다. 구구절한 대사나 설명, 플래시백 따위는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밀러는 행동으로 말합니다. 맥스란, 머리 둘 달린 도마뱀을 발 뒤꿈치로 밟아 산채로 씹어먹는 남자이자, 구하지 못한 다른 이들의 환영에 시달리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영화는 이런 맥스에게 필요 이상으로 포커스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이 영화의 서사에서 맥스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던 1편을 제외하고는, 그가 서사의 주인공이 됬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맥스가 아니라, 맥스가 살아가는 멸망한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핵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세상.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과 방사능으로 짧은 수명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세상. 깨끗한 지하수를 이용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임모탄 조(휴 키스-번 분)의 세상. 그런 임모탄 조에게서 도망치려는 다섯 아내들과, 그녀들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이자 희망인 녹색의 땅으로 시타델 최강의 차량 워리그를 끌고 도망치는 지휘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의 세상. 이 세상들이야 말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맥스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으로 끌려들어갑니다. 그런 그의 모든 행동에는 어떠한 숭고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가지 법칙과 규칙에 의해 정해지죠. 그것은 바로 생존입니다. 맥스라는 인물은 오랬동안 이 멸망한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윤리는 헛소리고 희망은 사치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치 서부극의 외로운 총잡이처럼, 언제나 희망을 가진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그들과 합류하지 않고 폭력의 신세계로 돌아갑니다. 

이런 맥스의 사고방식을 저는 개인적으로 종말 이후의 세계, 신세계의 문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문법이란 언어의 문법이 아닌 행동의 문법이죠. 그 세상에 걸맞는 행동양식이 바로 그 세계에 걸맞는 문법인 겁니다. 맥스는 이 생존의 문법, 신세계의 문법을 정말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그것은 맥스를 강하게 만듦과 동시에, 그와 폭주족들 - 임모탄 조, 식인종, 총알 농부 - 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신세계의 문법을 구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죠. 임모탄 조 휘하의 지휘관이었던, 퓨리오사 또한 그 신세계의 문법을 잘 구사하는 인물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게는 다른 신세계의 사람들과 다르게 꿈이 있습니다. 신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인 지휘관에 올랐음에도, 이를 미련없이 버리고 도망친다는 점은 이를 증명하죠. 

퓨리오사의 꿈인 그 녹색의 땅은, 갈증과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공간입니다. 그것은 희망이며, 녹색의 땅이라는, 종말 이전의 세계, 구세계의 잔재와도 같은 꿈같은 세상으로 이야기되죠. 문제는 구세계란 그 자체에 종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세계란 구세계 스스로가 종말을 초래했기 때문에 도래한 세계죠. 퓨리오사가 그 구세계의 존재였던 녹색의 땅에서 신세계로 내던져진 것은 단순히 신세계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 이는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녹색의 땅은 늪지로 변해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되었고, 녹색의 땅에 살던 부발리니 부족은 미끼를 이용해 타인을 약탈해 살아가는, 전형적인 신세계의 문법을 통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희망은 파괴되고, 퓨리오사는 절망합니다.

맥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그는 멸망한 세상을 홀로 떠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는 곧 경험을 의미하며, 그 경험 속에서 구세계의 잔재를 바라던 이들은 언제나 종말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에게 그 사실을 강요하거나 알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돕기까지 하죠. 그것은 그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맥스의 속에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그가 구하지 못한 이들의 환영, 즉 죄책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그는 한없이 신세계를 긍정하지만 동시에 구세계가 가지고 있었던 희망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맥스를 임모탄 조와 다른 워보이와 구분짓게 만드는 유일한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죠. 때문에 맥스는 퓨리오사와 함께하면서도 그 목적의식에 대해 어떤 불평불만도 하지 않아요. 그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죠. 

이 모든 일을 조지 밀러는 행동으로만 표현합니다. 아니, 설명한다고 해야 정확할겁니다. 그것은 말이 아님에도 백마디 말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또 동시에 일부를 관객의 상상력의 몫으로 돌림으로써 영화라는 매체만이 뽐낼 수 있는 매력을 보여줍니다. 이를 더 설득력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소품이나 행동, 배경등에 존재하는 세세한 디테일 덕분입니다. 신세계는 문명의 잔재를 바탕으로 존재해요. 그 잔재는 그 극한까지 재활용되죠. 그렇기 때문에 종말 이전의 물건은 마치 시체가 박테리아에 의해 소회도고 또 분해되듯 하나하나 재구축됩니다. 조지 밀러는 이를 충실히 이해하고 활용해서 스크린에 등장시킵니다. 부서진 차는 분해되어 새로운 차로 태어나고 차체를 뜯어내 마치 포탑처럼 활용하기도 합니다. 또 종말 이전의 발할라 신앙 또한 임모탄의 숭배 아래 V8 엔진을 받드는 카고 컬쳐로 탈바꿈되구요. 이런 세세한 디테일이 매드 맥스와 조지 밀러의 고향, 호주의 아웃백 사막의 광활하고 끝없는 지평선을 품은 사막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거칠고 매마른 모래폭풍의 세상으로써 스크린에 드러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판타지일 수 밖에 없는 매드 맥스의 세상이 납득할만한 이유와 그 뿌리를 지닐 수 있게 만듭니다.

이렇게 설득력 넘치는 잔인한 세상에서, 임모탄과 워보이로 대표되는 신세계의 사람들, 퓨리오사같은 구세계의 희망을 품은 사람들, 그리고 결코 정착하지 못하고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맥스, 이 세 인물군의 정중앙에는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가 존재합니다. 그녀들은 사실 영화의 주된 이야기 방식인 액션과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 비중이 적을 수 밖에 없고,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에 그녀들의 존재감은 그리 크고 짙지 않으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그녀들은 이 영화에서, 또 이 영화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신세계의 문법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들은 임모탄으로부터 외부의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보호됬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녀들은 그녀들 스스로가 임모탄에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이 퓨리오사의 탈주에 동조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방패로 내세워, 임모탄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스스로의 위치와 중요성을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동이죠.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섯 아내들은 퓨리오사의 희망에 목메달지 않습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녹색의 땅은 이상의 공간이나 희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모탄은, 그리고 그가 다섯 아내에게 제공한 환경은 다른 이들이 그토록 바라는 풍요롭고 깨끗한 물과 안전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럼 왜 그녀들은 시타델을 나온걸까요? 임모탄으로부터 벗어난 걸까요? 그건 바로 희망이나 생존이 아닌, 자유입니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가 택할 자유 말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그녀들은 외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핵심입니다. 

'선택 할 자유'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구세계의 문법으로는 실현 불가능하고, 생존에는 불필요하기 대문에 신세계의 문법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고, 때문에 문법 그 너머에서 다섯 아내들은 선택의 자유를 들고 옵니다. 그리고 지극히 신세계의 인물군에 포함되어있는 눅스(니콜라스 홀트 분)가 그런 다섯 아내들의 이상에 감화된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더 나은 삶, 더 숭고하고, 더 인간적인, 단순한 생존을 위한 투쟁 그 너머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자유라는 메세지를 눅스를 통해 밀러가 던진겁니다. 

그래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엔딩은 매드 맥스 2편이나 3편과 다르게 나레이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맥스는 모든 일이 끝나고 공동체를 등지고 떠나지만,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에서 그는 신화가 되지 않아요. 그는 잊혀집니다. 2편과 3편의 공동체에는, 문법을 너머 초월적이었던 맥스의 구원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에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들에게는 이미 다섯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시타델을 떠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그 행동을 통해 그녀들 스스로가 민중들의 희망이 되고, 영웅이 되었으며, 인간이 무엇으로 인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신세계의 '희망을 잃은 자'들에게 역설합니다. 그녀들은, 미래의 표지가 된 것입니다.

물론 그녀들이 외치는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모든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정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지 밀러의 해답일 뿐이며, 또한 시타델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드 맥스 시리즈의 정답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밀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생존과 번영 그 너머의 목적을 제시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이 영화를 통해 던졌습니다. 그리고 조지 밀러는 이 장르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가 던진 메세지는 이 장르에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는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제 그 씨앗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이 장르가 그랬듯 다른 수많은 사람의 손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날테지요. 이 장르의 팬으로써, 전 그 미래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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