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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의 무개념 분지
'스타필드'와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의 중요하지 않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 그러니까 2023년은 제게 좋은 게임들을 한가득 가져다 주었습니다. 인디부터 AAA까지, 다양한 규모와 배경, 출신에서 높은 품질의 작품들이 쏟아졌죠. '젤다의 전설:티어즈 오브 더 킹덤'부터 시작해서, '데드 스페이스'와 '바이오하자드 RE:4'의 안정적인 재창조, 코어하면서 독창적인 덱 빌딩 게임 '던전 드래프터즈'도 좋았고 '테라 닐'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히데키 'FUNKY UNCLE' 나가누마를 비롯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봄 러시 사이버펑크'는 귀와 눈을 끊임없이 즐겁게 만들어줬죠.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웠던 '램넌트 프롬 디 애쉬즈'의 후속작 '램넌트 2'는 그 다양성에 의외의 복병으로 작용했어..
18세기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의 장편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당시 팽배했던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하는건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무인도이자 처녀지인 '마스 아 티에라' 섬을 이른바 '문명인'의 시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개간해나가는 모습은 당시 세계로 뻗어나가며 발이 닿는 곳곳에 깃발을 꽃아넣던 영국 제국의 거울상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모르고 식인을 일상으로 삼은 미개한 원주민 프라이데이를 주와 문명의 이름으로 개종시킨 로빈슨 크루소의 휘광이란! 당연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로빈슨 크루소'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당대의 수많은 소설처럼 낡아가고, 이내 수많은 작가들의 손에서 해체되어 재탄생됩니다. 특히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1967년 발표한 '방드르디, 태평..
“이걸로 저도 명실상부한 생명공학의 권위자로군요?” “그렇지. 축하하네.” 박사 학위장을 받으며 제리가 던진 가벼운 농담에, 투슈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애하는거냐고? 그럴수밖에 없었다. 근 5년간, 자신의 강의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것처럼 경청하는 제리를 아끼지 않을 수는 없을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건 투슈만이 아니었다. 제리가 수강한 다른 과목의 교수들이나 같은 연구실에서 연구를 진행한 다른 대학원생들도 제리에게서 힘을 얻고는 했다. 외모 때문이다고 우슷개소리로 떠들고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뜨거운 제리의 지적 학구열이야말로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해지는 활력의 원인임을 투슈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투슈 교수는 제리에게 아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정말로, 진행할..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차갑고 검은 물이 얕게 깔린 바닥과 별 하나 빛나지 않는 하늘을 나누어 볼 수 없는 평야에 아이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봐요. 아이가 왜 여기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 곳은 정류장일 뿐이니까요. 아이는 성장하며 수많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고,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마침내 아이가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와는 큰 상관이 없기 때문이죠. 아이는 생각합니다. 너무 어두워. 아주 잠깐이지만, 바로 그 순간 빛이 지나갑니다. 빛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지는 빛 말이죠. 주위를 둘러보기엔 부족해요. 하지만,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이 천둥소리가 지나가고도 시야에 남아있는 것처럼, 순간 눈에 아로새겨진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리..
"아이야,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느냐? 너는 내가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인 젊음을 가졌을진데, 어찌하여 그리 두려워 떨고 있느냐?" 익숙한 목소리가 을씨년한 옛 수퍼마켓을 울렸다. 자주 돌아다니던 곳이라고, 이미 안전을 확보했었다 믿고서, 지나치게 안이한 판단으로 무기를 놓고 온 내 잘못이 가장 크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발, 신이시여. 나는 숨죽여 흐느끼며 빌었다. 어째서 왜 아버지이십니까. "그만하고 나오거라. 출구는 한 곳이고, 그 곳은 내가 잡았을 터, 네가 나올 구멍은 틈새조차 없단다." 저 온화하고 지혜로운 말투는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씨였다. 그랬기에 공포는 더해졌다. 살갗이 콘크리트를 붙잡는 소리가 메아리칠만큼 연속해서 들려오는 와중에, 그 목소리가 섞여들려오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