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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의 무개념 분지
혼돈의 사제 본문
1.
나는 누구인가.
그는 항상 이 질문을 자문하고 또 자문했다.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그는 항상 합리화했다. 이미 광기에 들어선 그 질문은, 다시금 그에게 찾아왔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그의 방은, 환풍기가 켜져 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밖은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건만, 방은 기분 나쁠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공간의 불쾌함에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 놀라운 속도로 무언가를 치고 기록하고 눈으로 훑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이, 기록한 것이 기분에 들어서인지 히죽거렸고 불쾌했던지 인상을 썼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모니터의 빛을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계속 키보드를 쳐내려 갔다. 얼마 동안이나 그가 그런 환경에서 그런 상태에 있었는지 한눈에 알아 맞출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한 시간이라고도, 하루라고도, 한달 이라고도, 마음 내키는 대로 부른다 할지라도 납득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이, 어느 날의 평화로운,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밤에 올라온, 뜬금없는 모니터에 올라온 픽셀의 정렬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시체가 살아 움직인다고!]
“아아-!”
그는 기쁨의 탄식을 내뱉었다. 어째서 그 탄식이 기쁨이었는지 설명하자면 너무나 많은 비유와 의성어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몇 초도 안 되는,그리 크지도 않았던 그 탄식은 그 누가 듣더라도 행복이라는 감정이 그 안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 그 탄식은 직접 들어야만 기쁨을 알 수 있는 부류의 탄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천장을 보더니, 환하게 웃음지었다.
“신이 나를 돕는구나! 나의 몇 년간의 연구결과가 드디어…!”
그는 눈을 감고 잠시 그 기쁨을 음미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나를 돕는다고도 할 수 없지만 말이지.”
자리를 박차 일어난다. 그리고 성큼성큼 벽에 달린 스위치에 다가가 불을 켠다. 흰색 형광등에 전기가 들어오고, 새하얀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빛은, 마치 결벽증에 걸린 것처럼 흰색으로 도배된 방안을 주저 없이 밝혀냈다. 양복이라고 하기에는 거침없이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장발의 한 남자와 동시에 말이다.
“이런 이런, 명식군에게 전화를 해야겠군!”
그는 말했다.
2.
어두운 밤이었다.
당연한 것이, 한국 시간 기준 새벽 1시를 갓 넘긴 때였으니 말이다. 두 개의 시간대를 가질 리 없는 좁은 땅덩어리의 한국에서 살고 있던 그에게 새벽 1시란 한밤중인 것이 당연했다. 일반적으로 이 한밤중에는 김명식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잠을 자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핸드폰은 밖으로 나오라는 취기 들린 선배의 목소리나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가득한 광고 전화 이외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날 밤은 당연하지 않은 밤이었다. 평범하지 않는 밤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세계의 운명에 있어서도 무척 중요한 밤이었지만, 그 사실 여하와 별개로 그에게 있어서 전혀 평범하지 않던 밤이었다. 요 며칠간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며칠 전.
“헤어져”
지금
“제길. 내가 뭐가 잘못했다고. 내가 문제인 거야? 군대 갔다고 그러는 거냐고? 그년은 군대 안 갔다 온 남자만 좋아하는 거라도 되는 거냐? 제기랄!”
그의 자취방 바닥에는 수많은 맥주 캔이 굴러다녔다. 얼마나 마셨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맥주 캔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물어 볼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으헣허—“
매우 괴상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울던 그에게 있어서 오늘 밤은, 며칠 전의 실연을 잊으려는 또 하나의 밤이었기 때문에, 전혀 당연한 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미연이야? 미연이인 거야?”
그는 여자친구였던 여성의 이름을 부르며 방바닥에 널려있던 휴대폰을 급히 찾았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휴대폰은 ‘최 교수님’이라는 문자를 띄우며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다름에도 그는 표정을 바꾸고는 마치 엄숙한 무언가의 전화가 온 것 같은 몸짓을 취했다.
“교- 교수님?”
아직 취기가 가실 리가 없었기에 혀를 꼰 발음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명식군 맞나? 자고 있었나?”
“아- 아닙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재빨리 화장실에 달려가 세면기에 물을 틀었다. 두 손을 모아 차가운 물을 모으고 얼굴에 흩뿌렸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고는 자신의 뺨을 세게 두어 차례 갈겼다. 취기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을 터이지만, 전화를 받은 직후보다는 현저하게 나아졌다.
“이 밤중에 무슨 용무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교수님?”
“핫. 교수라는 말은 됐네! 망할 놈들이 날 내쫓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교수야!”
“하지만 저에게 있어선 아직도 교수님이신 걸요. 전 1학년때 교수님의 강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심이 갔을 때 진실을 찾지 않는다면 불만을 가질 자격이 없다’ 라고 하셨죠!”
“그런걸 기억하고 있었나? 하핫. 이거 부끄럽구먼. 나도 몇 년 전의 강의를 기억해주는 자네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 친구는 요즘에 드물지말야. 그래서 말인데…”
말을 잠시 줄인 교수는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음성으로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자네, 나를 도울 생각은 없는가?”
“저야 영광입니다!”
그는 교수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대답을 내어놓았다. 알코올이 그의 머리를 휘감었기에 할 수 있었던 업적이리라. 김정익이라는 슬픔에 빠진 청년에게는, 교수직에서 쫒겨난 한 남자의 제안이 슬픔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려 하는. 자신에게 위대한 교훈을 주었던 한 교수의 친절한 호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그는 알코올이 몸에서 모두 배출된 후에서야 깨달았다.
“호오, 무슨 일인지도 말 하지 않았건만?”
“교수님께서 제안하신 것 이잖습니까? 저를 도와주신다면 도와주셨지, 해치실 분은 절대 아니시라는 사실,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교수님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셨는데,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죠!”
“흠…”
교수는 말을 흐렸다.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더 있을 것인가? 이것은 필시 이 학생 한명 뿐이리라. 가족이고 친구고, 모두 그를 버리고 떠났고 그를 감당할만한 재목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친구라면, 이 김명식이라는 훌륭한 제자라면 자신의 뜻을 펼쳐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감동했다네. 요즘에는 자네 같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나는 무척이나 행운아로군! 그럼 무슨 일인지 이야기하도록 할까?”
“말씀 하십쇼!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모든 사실을 기억하리라고는 기대치 않았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목소리에 담아 힘차게 말했다.
“좋네! 자네. 내가 강의에서 여담으로 이야기했던 내 이론에 대해 기억하나?”
“음.. 정부가 수도 시설에 세균, 혹은 나노머신 등을 퍼트려 시민을 세뇌시키고 정부의 정책수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만드려는 계획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자네 기억력이 무척 좋구만! 지금 전세계가 내 이론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네! 한국도 예외는 아니지.”
교수는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려, 말을 끊었다 다시 이었다.
“별 문제도 없던 사람들이 방금 12시 부근을 기해서 갑자기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멍떄리는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단 말이네! 한국은 아직 밤이라 조용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벌써 패닉에 빠진 도시도 있는 듯 하네. 몇 가지 의구심이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상황이 내가 구상했던 것과 비슷해! 전세계 정부가 결탁하고 우민화 계획을 실시하려 했지만 실패했을 때의 모습이야! 어째서 폭력성의 급격한 증가를 수반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봐야 하겠지만 말이지! 완벽해! 정부는 이 사실을 감추려 했고 이를 믿지 못한 다른 멍청한 교수 놈들은 큰 코 다치게 될거란말야!”
“잠깐만요 교수님,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이성을 잃은 폭력적인 사람들이라니요?”
김명식은 진짜로 교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코올은 그의 상상력을 관장하는 대뇌의 어느 부분인가를 계속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흠.. 뭐에 비유해야 할까. 그래, 자네 좀비는 알고 있겠지? 그와 매우 유사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들을 현재 좀비라 부르고 있어.”
“좀비요? 좀비말이라면…”
그의 친구와 함께 보았던 좀비 영화에 대해 어서 떠올리려는 그였지만, 알코올은 그마저도 방해했다. 결국 그는 영화라는 큰 카테로리로 뭉뚱그려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말입니까?”
“그래 그래! 생각보다 개체수가 적은데 이는 아마 인류의 면역 체계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고, 정부가 인간을 과소평가한 걸 수도 있지! 그렇기 때문에라도 나는 밖에 나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야 하네! 아니 그 이전에, 더 정확한 이유를 찾아내야만 하지! 그렇기에 자네가 필요하다네, 김명식군. 자네라면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있어! 나를 도와주게! 진실을 찾는 것을 도와주게!”
“’의심이 갔을 때 진실을 찾지 않는다면 불만을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것입죠!”
제자는, 광신에 가까운 확신을 담은 긍정의 목소리를 교수에게 보냈다.
“좋아, 정말 좋아! 내 집에 오는 길을 알려줘야겠군!”
제자와 교수는 전화기를 붙잡고 약 5분가량을 대화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챙겨야 할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렇게 모든 대화가 끝나고, 핸드폰에 나타난 ‘통화 종료’라는 버튼을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눌렀다.
제자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전화기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방금까지 실연에 빠져 질질 짜고 있던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표정을 지은 그는, 착실히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그 자신도 대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알코올이 가져온 비이성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실연이라는 크나큰 고통은 잊기 위해서였다는 방어기제도 한 몫 했다는 사실도 존재했다. 하지만 해도없이 망망대해를 떠돌던 그에게 있어서 비록 고장나 올바르지 않은 방향을 가리킬지라도 한 방향 만을 곧게 가리키는 나침반이 손에 주어진 이상, 그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만 햇던 것이다.
그는 대화가 끝난 즉시 여러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맨 처음 꺼낸 것은 무기였다. 집을 지을 수 없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구입했던, 공구는 자신의 몸에 맞아야 한다는 별 의미없는 지론에 의해 구매했던 슬랫지 해머, 오함마와, 어째서인지 같이 구매했던 소방도끼가 그것이었다.지금 와서 어째서 구매했는지는 중요치 않지만, 그래도 있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하며 케케묵은 배란다의 잡동사니 속에서 그것들을 꺼내놓았다.그 다음은 구급상자였다. 혹시 몰라 챙겨놓은, 결국은 두통약과 소화제 몇 알만 쓰고 말았던 충실한 대형 구급상자. 붕대와 테이프, 봉합에 사용 가능한 실과 바늘까지 있는 본격적인 세트였지만 그는 꺼내는 것 조차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꽤나 애용했던, 뛰어난 내구성의 등산용 배낭도 꺼내 들었다. 수통에 물을 채워 넣고 배낭에 집어넣었다. 목장갑도 챙겼다. 방금 오함마와 소화도끼라는 무서운 무기를 꺼내놓았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는 망치도 깨냈다.
이쯤 되서야 그는 자신이 다시 이 집안에 들어오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진지하고 중대한 진실이 그의 머리 속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머리를 꽉 채운 것은 갈아 입을 옷 생각이었다. 속옷과 질긴 청바지, 등산복, 보니햇, 그리고 볼 때 마다 좋지 않은 기억만을 떠올리게 만드는 군복으로 차곡차곡 배낭을 채워넣었다.
이 정도라면 끝 이려나, 하고 생각하고는 그는 자취방 앞에 주차한 자신의 미니밴의 트렁크에 짐을 차근차근 옮겨 실었다. 다 옮기고는 그는 자취방의 문을 자연스럽게 잠그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만약 챙기지 못한 게 있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3.
그가 온다. 그가. 나의 충실한 제자가.
교수는 즐거웠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가 그 동안 할 수 없었고 하지 못했던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춤추거나, 웃거나,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는 점잖게,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모니터만을 뚫어지게 지켜보던 남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쓰지 않던 지하실에 들어간다. 석유 냄새가 살짝 베어나오는 지하실에서 교수는 혹여나 비상용 발전기가 고장 나지 않았는지, 식량은 충분한지 확인했다. 이 집안의 모든 물을 정화하고 많은 양을 재사용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정수기도 확인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기에 두 번 체크했다.
지하실을 나와,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집 안에 있는 방임에도 전자록이 달려있는 특이한 방이었다. 불을 켜자, 새하얀 자태를 다시금 드러낸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다. 좀더 넓은 이 공간에는, 수많은 실험기기들과 실험관, 실험 약품등, 관찰하고 예측하는 데에 있어 가장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 공간은, 최정익 교수가 자신의 돈을 모두 쏟아 만든 꿈의 공간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날개를 펼쳐 세상에 다시금 뛰어나가기 위해서 이 시설을 만든 것이었다. 그 뜀박질을 최정익이라는 이름의 모 대학교의 전 교수는 오랜 세월 준비만 하며 기다려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교수는 자신이 뛰려는 방향에 대해 개의치 않아하며 발돋움을 시작하려 했다.
무척이나 기쁜, 행복한 표정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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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4월 13일에 적었던 글인데 비공개로 돌려놓고 지금 겨우 발견한 글이네요;
처음 볼땐 내가 이 글을 쓴거 맞나 할정도로 기억이 안나던..
자취하던 시절에 쓴 글인데, 그냥 묵혀두기 아까워서 업로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