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등대지기
- 칼럼
- 자전거여행
- 매드맥스
- 게임
- 재기드 얼라이언스 3
- 스팀
- 베데스다
- 스타필드
- 게임 디자인
- 비디오 게임
- 위버틴
- 노인
- 장르_코드_전력_계절
- 장르_코드_전력
- 테라 닐
- 건설
- 블루_만추 #보이드_바스터즈 #시스템쇼크 #서바이벌_호러 #로그라이트 #한글화
- 생태계
- 로빈슨 크루소
- 짧은리뷰
- 디볼버 디지털
- 전략
- 식민주의
- Today
- Total
네크의 무개념 분지
안개왕 이야기 본문
지금 인간이 디스 헤레토라고 부르는 보기 사막 너머 위버틴 대륙 북쪽에 도달하기 전에 이 지방에는 지금은 멸종한 종족이 살고있었다. 묘사에 따르면 귀가 작고 엘프와 비교했을때 절반을 겨우 넘는 평균적인 신장을 가진 종족으로써, 대체로 인간과 유사한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엘프는 이들은 반쪽이, 혹은 하플링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건적인 군주제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으며 팔그람(번역하자면 순례교)이라는 종교를 국교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하플링의 국가는 크게 세개의 왕국으로 나뉘었는데, 현재의 헬른과 누넨리히 지방을 통틀어 다스리던 케식스가와 지금 인퍼토 연합이 차지하고 있는 케르트에서부터 첸탈산까지 이르는 땅을 다스리던 웨인가, 그리고 그 사이의 땅에서 비교적 약한 세력을 유지하던 펠그림가의 세 왕국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왕국중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는 펠그림이었는데,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난립하던 시대에 등장해 빠르고 굳건한 질서를 세웠기에 꽤 오랜기간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또 팔그람의 성도인 애설레드 수도원이 영지 내에 있어 약해지는 국력에도 버틸 수 있는 국가였다. 펠그림의 뒤를 이어 케식스와 웨인이 등장했고 이들은 나름의 수완을 발휘해 곧 안정된 3강체제가 자리잡고 이 구도는 약 600년간 지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세 나라의 공통적인 종교였던 팔그람은 애설레드, 또는 순례자라고 불리는 선지자를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였는데, 마법적인 능력이나 축복을 목적으로 하였다기보다 당시 창교 당시 끊이지 않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민들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는 성격이 강했다. 또 한가지 특징으로는, 부에 대한 관점이었는데, '순례자가 떠나지 못해 머뭇거리는 자에게 가로되,'저 멀리 떠나는 철새는 비록 그 갈길이 멀다하되 그의 둥지와 함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둥지는 새로운 생명이 싹티우는 터전이 되리라.'라 일렀다.(에펠렘의 길, 4-21,22)'라는 구절등을 통해 팔그람 교도가 개인의 사욕을 위해 부를 축적하지 않고 나누며 가난한 이에게 나누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런 팔그람 수도사가 모인 수도원에는 교인들이 기부한 부를 모은 창고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는데, 이런 팔그람이 하플링 사이에 퍼진지 3세기즈음 지나자 수도원마다 금과 은이 가득 담겨인 궤짝이 사람 백명은 거뜬히 들어갈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일이 태반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수도원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히 금기로 여겨졌고 때문에 왕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이런 수도원 중 한곳인 밀턴 수도원은 케식스 북단 해안에 인접해있는 외딴 섬에 자리잡은 수도원이었는데, 어느날 북쪽에서 길다랗고 노가 많은 배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해안을 지키던 수도사는 이들의 정체를 아마 지나가는 상인이나 순례자 무리쯤으로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이들은 결코 그런 무리가 아니었다. 수도사는 곧 그들에게 자신들은 도끼와 칼을 든 자에게 나눌 것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내 그 머리가 몸보다 먼저 땅에 닿고 말았다. 이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이 공격이 노르튼 엘프의 첫 약탈임을 많은 사료가 증명하고 있다.
노르튼 엘프란 엘프어로 '위의 엘프'라는 뜻이다. 여기서 위란 북쪽이 아닌 서쪽인데, 노르튼의 어원인 노르드는 '황혼이 깃드는 땅'이라는 뜻으로, 엘프는 서쪽을 기준으로 남쪽을 왼쪽, 북쪽을 오른쪽, 동쪽을 아래로 다루었다. 이런 노르튼 엘프는 영겁의 숲 서쪽의 피오르드 반도나 그 주변 섬에 무리지어 살던 엘프의 통칭인데, 본디 서로를 믿지 못하는 엘프임에도 거대한 무리를 이루던 이유는 바로 약탈로 유지되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노르튼 엘프는 드워프를 약탈하며 살아가던 자들로써, 그들의 악명은 강을 타고 이동하며 이를 통한 재빠른 기동력으로부터 비롯됬다. 영겁의 숲 시절 전성기에 이들의 무리는 120척의 배를 이끌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그들의 배 한척에 백여명의 인원이 탔다는 것을 감안했을때 만 이천명이라는 거대한 인원이 노략질에 힘썼다는 이야기이다.
오랜 약탈로 골치를 썩이던 드워프는 갖은 대항수단을 강구하고 노르튼 엘프를 괴멸시키는데에 성공하였고, 이들은 피오르드 반도 해역으로 도주하고 해적질로 생업을 바꾸기에 이른다. 엘프답게 그들은 신을 믿지 않았으나, 대신 그들은 마족과 유사하게 조상을 숭상하고 그의 힘을 자신들이 이어받았다 믿었다. 노르튼 엘프가 숭상했던 선조 중 가장 유명한 선조는 바로 라그나로써, 수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잇거나 그의 아들임을 자처하고 그의 상징인 핏빛 두개골을 많은 노르튼 엘프의 장수가 지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맨 처음 노르튼 엘프가 밀턴 수도원을 약탈했을때 그 수는 배 한척, 그러니까 백명여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당시 노르튼 엘프의 잔존 병력이자 척후병이었다. 의도치 않은 막대한 수확을 들고 돌아간 그들은 간헐적으로 외진곳에 세워진 팔그람의 수도원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팔그람 수도사들은 이를 옛 경전에 예언된 종말의 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늘은 연기로 검게 물들었고 피가 고인 땅은 구더기가 들끓는 진흙이 되어 숨을 쉬고 걸을수 조차 없었다. 재앙의 때가 도래했음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서머싯 수도원의 기록, p.52에서)'.
노르튼 엘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무리지어 케식스의 심장부로 치고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노략질이었던 것이 순식간에 전쟁으로써 변화한 것이다. 이십에서 삼십척 가량 되는 병력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케식스의 중앙에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왔을때 케식스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당시 케식스의 왕 리카드는 각지의 지방장관에게 명을 내리고 군사를 소집했지만 이들이 모이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급히 모은 병력 또한 천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노르튼 엘프의 배에 타있는 자들이 전부 군인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배 위에서 삶을 영위했고 때문에 배 한척에는 비전투 인원인 여자나 아이, 혹은 장인들이 상당수 타있었다. 이들은 대략 배 한척당 삼할의 인원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실 병력은 천이백에서 천팔백정도에 지나지 않았긴 했으나 그들은 세월의 반 이상을 드워프와 싸워왔던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이에 비해 케식스는 물론 하플링의 군대 중 실제로 전쟁에 참전했던 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이조차도 소규모 산적과 싸웠던 자경단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경험의 차이에 곧 케식스의 군대는 대패하고 남은 잔존 병력들은 순식간에 수도인 켄팅엄까지 밀려나게 된다.
당시의 하플링의 도시란 돌로 쌓은 거대한 석조 성벽을 갖춘 성채라기 보다, 감시탑을 사이에 두고 목책이 둘러쳐져 있는 큰 마을에 불과했으며, 때문에 켄팅엄을 포위한 노르튼 엘프들 중 소수 인원이 이따금 갑자기 켄팅엄 내부로 밀고 들어가 정신을 빼놓은뒤 본진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됨으로 케식스는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포위가 한달이 조금 더 넘었을때 케식스는 백기를 들고 노르튼 엘프와 평화협상에 나섰다.
노르튼 엘프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를 위한 조건으로 잘 자란 말 200필에 버금가는 금을 요구했다. 복종 외에는 아무런 방안이 없었던 케식스는 이를 수용했고, 노르튼 엘프는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다시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지 않았다. 노르튼 엘프는 뱃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왼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들은 쥰-미르스 대륙에 당도해 다시금 약탈을 개시했고, 이 결과 바르겐, 에텐베르크 가문등이 멸망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족은 하플링과 다르게 금은보다는 각종 무기등을 만드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노르튼 엘프는 이 무기를 약탈하였고, 이후 이를 기반으로 약탈에 나선 노르튼 엘프의 전투력은 전에 없이 막강해 졌다.
끊임없이 승승장구를 올리던 노르튼 엘프였지만 하플링과 달리 전쟁할 준비가 되어있던 마족의 저항에 어느정도 피해를 입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마족을 약탈한 뒤 노르튼 엘프는 플랑드르 섬에 자리잡게 된다. 이때까지 플랑드르 섬은 그저 변방의 어촌에 불과했는데, 이 시점을 계기로 해적의 본거지가 되었으나 이를 기반으로 훗날 플랑드르 섬은 쥰-미르스 대륙과 위버틴 대륙간의 주요한 무역 거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는 당시 플랑드르 섬을 점거했던 노르튼 엘프의 수장이자, 위대한 조상 라그나의 후손을 자처한 이바르가 플랑드르 섬에 각종 항구와 항만을 건설하고 무역 기반 시설을 건설했기 때문인데, 이는 단순히 그가 이곳을 약탈의 쉼터로 생각한 것이 아닌, 더 큰 그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는 이 대륙에 정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설을 정비하는데에 십여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 유예기간동안 하플링 왕국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노르튼 엘프의 충격도 있지만 무엇보다 약해진 케식스를 펠그림이 공격, 상당한 영토를 차지하고 하플링 왕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격 도중 펠그림가의 왕인 에드위그가 죽고 말았다. 그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첫째는 앤설바드, 둘째는 앨프레드였다. 장자인 앤설바드는 곧 왕위에 올랐다. 그 즉위식 도중, 앨프레드는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말았다. 역사가는 이를 두고 케식스의 저주다, 혹은 노르튼 엘프의 독살이다라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앨프레드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죽을때까지 심각한 지병을 앓아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앤설바드는 즉위 직후부터 노르튼 엘프의 약탈을 대비하기 시작했는데, 지역구를 나누고 한 지역구가 공격당할 경우 다른 지역구에서 자동적으로 민병대를 소집, 지역을 방호하는 정책을 도입한 것이 바로 대표적이다. 이는 한 마을이 공격당하는 것으로 노르튼 엘프의 전진을 늦출 수 있었으며, 그동안 다른 지역이 병력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정책이다. 또한 앤설바드는 각 수도원에 분배되어 있던 막대한 금은보화를 방어하기 가장 용이한 지점이자 팔그람의 본산 애설레드 수도원에 전부 보관하도록 하였다.
위 정책들은 전략적으로 뛰어난 선택이었지만 국민의 많은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한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국민을 버린 왕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또한 애설레드 수도원에 팔그람의 재물을 모으는 것 또한 교민들에게 종교의 제물을 수탈하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 10년이라는 시간은 어느샌가 지나갔으며 노르튼 엘프는 다시금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이바르의 아들 '붉은 주먹' 바그람이 이끄는 80여척의 선단은 옛 전성기에 못지 않을만큼 압도적이었으며 또한 마족의 신식 무기로 무장해 강력한 전투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들은 곧 펠그림 땅에 상륙해 약탈을 시작했다.
분명 앤설바드의 정책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정책은 좋은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인해 노르튼 엘프의 자랑이던 기동력은 상당히 저하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도원을 약탈해도 전리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노르튼 엘프들이 분개하기 시작하고 이로인해 바그람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노르튼 엘프의 수장이란 누군가가 임명하거나 교육받는 것이 아닌 전리품을 얻을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실적이란 매우 중요한 수치였고 80여척의 수장인 바그람은 자신의 아버지 이바르 못지 않은 전과를 세워야만 했다.
때문에 바그람은 무리하게 내륙으로 전진하였고,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앤설바드는 오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선다. 대규모 병력이 야전에서 격돌하는 전면전에 익숙치 않았던 노르튼 엘프에 비해, 앤설바드의 하플링 군단은 노략질에 대비해 기본적인 훈련이 되어있는데다 다수의 병력이 케식스와의 전쟁을 겪은 베테랑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노르튼 엘프는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육천에 달하던 바그람의 군대는 삼천 이하로 크게 줄었고, 이에 비해 펠그림가는 천여명의 군인만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 대승에도 불구하고 펠그림은 큰 상처를 입었는데, 바로 앤설바드가 전투 도중 전사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병약하던 앨프레드가 다음 왕위에 오른다.
앨프레드의 입지는 바그람 이상으로 불안한 위치였다. 혈통 자체에 문제는 없었지만 이렇다한 업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의 즉위식때 얻은 만성적인 질병 또한 그의 입지를 깎아내리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병을 앓고있는 알프레드를 전쟁을 눈앞에 둔 지방장관들이 따를리 만무했고, 승리를 거두었던 펠그림의 군대는 앨프레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넷으로 갈려 따로 따로 행동하게 된다. 앨프레드를 따르는 군대는 천명이 될까 말까 했으며 바그람은 군사를 재정비하고 흩어진 펠그림의 군대를 각개격파하기 시작했다. 바그람은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으며, 펠그림과 앨프레드의 사기는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앨프레드는 군사를 수도로 물리고 재정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거짓말처럼 바그람의 군대가 수도 안으로 들어와 수도를 점령했다. 역사가들은 여기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정황상, 이 습격은 바그람의 협력을 얻은 지방장관들의 쿠데타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들은 못미더운 자신들의 왕을 바그람의 손으로 갈아치우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새로운 무역 거점으로 떠오르는 플랑드르 섬이 노르튼 엘프의 성과라는 점이 몇년 전부터 부각되고 있던 터라, 노르튼 엘프가 단순히 금은보화를 갈구하는 야만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점이 지방장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쿠데타에서 앨프레드는 살아남았다. 짙은 안개가 낀 아침, 앨프레드는 그 속으로 사라져 바그람 군대의 추격을 피한 것이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앨프레드는 이후 수많은 민담에서 등장한다. 영겁의 숲으로 들어가 엘프 무리를 이끌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금지된 탑으로 들어가 용을 물리치고 안개의 마법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대다수의 민담에서 안개라는 요소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팔그람에서 안개란 순례를 방해하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불길한 징조라는 점을 고려했을때 이는 당시 앨프레드에 대한 민중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9주간 지속된, 이른바 '잊혀진 유배' 기간동안, 팰그림의 민중은 이교도왕 바그람에게 고통받았고, 위대한 안개왕 앨프레드는 마치 과거에 위대한 순례자가 전쟁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이들을 이끌었던 것처럼 복수를 외치는 군사를 이끌고 안개속의 유배로부터 돌아왔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바그람이 어떠한 정치적인 행보나 정책을 내놓은 것이 아님을 고려하면, 당시 갑자기 들어선 엘프 왕에 대한 반감 또한 막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 잊혀진 유배 시절 수많은 지방에 찾아가, 바그람에 대항할 병력을 모았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많은 지방장관이 바그람에게 많은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민중과 같은 시각, 즉 노르튼 엘프에게 반감을 가진 이들과, 노르튼 엘프에게 유린당해 복수의 기회만을 노렸던 옛 케식스 땅의 주민들이 바로 대표적인 이들이다. 그들은 앨프레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바그람은 그런 앨프레드에 비해 훨신 더 초조했다. 목표로 했던 펠그림을 손에 넣었지만, 앨프레드는 아직 살아있고, 팔그람의 금은보화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설레드 수도원의 문은 굳게 잠겨 아무도 들어가고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문의 열쇠를 앤설바드가 잠그고 앨프레드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문을 부수고 약탈하면 될 일이 아니냐라는 의문이 들지만, 정복에 성공한 바그람으로써는 그 선택지는 더이상 선택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펠그림의 명실상부한 - 비록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 왕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왕으로써 팔그람의 성지를 약탈하는 것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바그람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의 수하들은 펠그림을 정복한 것 만으로도 만족하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생전 처음으로, 시간이 노르튼 엘프의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날이 갈수록 바그람은 초조해졌지만 앨프레드는 점점 강해져갔다. 급기야 앨프레드의 세력이 바그람을 따르던 지방장관의 지역을 약탈하는 일마저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점점 흉흉해 지기 시작했다. 바그람은 할 수 없이 군대를 모아 앨프레드의 게릴라를 처단하기로 나섰다.
바로 그때였다. 바그람이 맨 처음 수도에서 쫒겨난 날과 같은, 짙은 안개가 끼어있던 날이었다. 앨프레드는 바그람이 자리를 비우고 떠난 수도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당대의 역사가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가 짙게 꼈다. 하지만 위대한 왕(앨프레드)는 응당 자신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향해 행군했다. 그 뒤를 수백의 충성스런 전사들이 따랐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랜 옛날 고난에 빠진 이들을 이끌던 위대한 순례자의 현현과도 같았다.(펠그림가 연대기 11권, 레더릭 저, p.359에서)' 앨프레드는 바그람을 지지하는 지방장관들이 모인 의회로 찾아가, 그들의 머리를 모두 베어버렸다. 그리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바그람에게 말 20필에 상응하는 금은을 제공하는 댓가로 향후 50년간 공격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건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바그람은 그 제의를 단숨에 받아들였다. 앨프레드와 바그람은 서로를 마주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그람은 이전에 케식스와의 협상에서 노르튼 엘프가 그랬듯 팔그람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느릅나무 지팡이에 대고 평화를 맹세하려 했다. 하지만 앨프레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바로 이 부분을 많은 역사가가 주목하고 있다. 앨프레드는 라그나이자 바그람의 상징인 핏빛 두개골에 그 평화를 맹세토록 한 것이다. 이교에 대해 그렇게 관대하지 않던 당시에 이종족의 상징을 담보로 걸었다는 것은 앨프레드가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에 당대의 역사가는 이를 조심스럽지만 앨프레드를 칭송하는 방향으로 이를 서술했다.
문제는 바그람이 이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명 상징으로써 핏빛 두개골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협약의 구속력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앨프레드가 수도로 돌아가자 바그람은 담보로써 받았던 앨프레드 측의 인질을 모두 죽이고 - 다시말해 바그람측에서 제공했던 담보로써의 인질들을 포기하고 -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한측은 플랑드르 섬으로 돌아가, 다른 노르튼 엘프의 군세와 합류해 반격을 준비하기로 하였고, 바그람이 이끄는 다른 한측은 애설레드 수도원을 약탈하여 그곳의 금은 보화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순식간에 틀어지고 말았다. '태풍이 몰아쳤다. 평온한 어머니와도 같던 강은 매섭게 불어나 그 위에 떠있는 모든 것을 할퀴고 또 삼키었다. 수천의 약탈자가 물 속에 가라앉아 더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강가에 떠오른 시체들을 갈까마귀가 파먹었다. 신의 진노가 응당 엘프로 하여금 받았어야 하는 대가를 되찾아간 것이다.(펠그림가 연대기 11권, 레더릭 저, p.412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천재지변으로 바그람은 그의 군대 절반이 잃게 된 것이다. 바그람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절박해졌으며 이로인해 그는 무리하게 애설레드 수도원을 공략하려 힘썼다. 그런 그를 앨프레드의 군대가 애워쌌다. 켄팅엄 포위의 양상이 다시 일어났고, 이번에는 공수가 뒤바뀐 상황이었다.
전투는 순조롭게 끝났다. 켄팅엄에서 노르튼 엘프가 그랬듯, 앨프레드는 소수병력을 계속 보내 바그람을 괴롭혔고, 마침내 바그람의 군대가 피곤과 기아에 절어있을때, 앨프레드는 공격의 나팔을 불었다. 노르튼 엘프는 와해되어 포위전이 시작되었을때 천 오백가량 있던 바그람의 군대는 바그람을 포함하여 백여명이 채 안되는 생존자만을 남긴체 대승을 거두었다.
이런 바그람과 그의 휘하에 있던 몇 안되는 장수를, 앨프레드는 사형에 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앨프레드는 그것이 결국 노르튼 엘프의 반감만을 사게 될 것이고, 또한 또다른 장수가 플랑드르 섬에서 나와 라그나의 아들을 자처하며 다시금 해적질을 시작하는 것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때문에 바그람을 죽이는 대신, 앨프레드는 그에게 제안했다.
"펠그림의 정통된 왕으로써 명한다. 이교도여, 자비로운 순례자, 애설레드의 이름 아래 팔그람으로 개종하고 이교의 업보를 청산하라. 그럴경우 나 앨프레드는 너와 너의 수하를 용서하고 애설레드의 이름아래 새로운 지방장관으로 임명토록 하고 너에게는 말 20필의 무게에 버금가는 금을, 네 장수들에게는 각각 말 한필의 무게와 상응하는 은을 수여토록 하겠다."바그람은 외통수에 빠졌다. 얻은 것이라고는 일순간의 명예뿐, 그조차도 일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머물 곳 조차 없었던 그는 순식간에 앨프레드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이야기했다. 한달 뒤, 펠그림 전역에 공포를 퍼뜨렸던 라그나의 아들이 검소를 상징하는 회색 의복을 휘하의 장수들과 함께 입은체 애설레드 수도원에 들어섰다. 그들이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하던 곳이었으나, 그들의 고개는 겸손하게 숙여져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의식이 끝난 후, 애설레드 수도원을 나선 것은 더이상 바그람이라는 이름의 노르튼 엘프가 아닌 애설스탠이라는 이름의 팔그람 신도였다. 그는 케식스의 수도 켄팅엄까지 떠나는 순례길에 나서 1년뒤 돌아와 앨프레드의 지방장관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애설스탠은 지방장관으로써 자리잡은 직후 해상병력의 중요성을 주창하고, 앨프레드로 하여금 플랑드르 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 결과, 앨프레드는 플랑드르 섬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이 전쟁은 2년 뒤 팰그림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 뒤 200여년간, 플랑드르 섬을 중심으로 한 해상권을 바탕으로 팰그림은 전에 없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를 통해 마족이 쥰-미르스 대륙에서 벗어나 위버틴 대륙과 교류하기 시작하는 결과 또한 이룩해 내었다.
안개왕 앨프레드는 플랑드르 섬 정복이 끝난 뒤 4년이 지나 사망하게 되었는데, 그 사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려져 오는 바가 없다. 그의 나이 향년 46세였다.
[끝]
---------
"그렇게 안개왕 앨프레드는 팰그림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어."
난희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검은 숲 속,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그리 세게 불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모두 자고 있었다. 피오나는 물론, 패트리샤도 이미 잠에 빠져들어 조용히 코를 골고 있었고, 믿고있었던 울피나마저 고개를 괴고 반쯤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하잖아! 역사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는데 왜 다들 자는거야?"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난희가 어둠속에 대고 말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2 (0) | 2015.05.21 |
---|---|
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1 (0) | 2015.05.16 |
꿈을 꾸는 이야기 (0) | 2015.04.19 |
혼돈의 사제 (0) | 2015.04.18 |
통 속의 뇌 (0) | 2015.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