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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별의 바다 이야기

Nake 2015. 8. 14. 11:16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기 전, 수많은 배가 저 검고 푸른 별의 바다를 항해했었지. 각양 각색의 크기와 모양을 지닌 그 배들은 죄다 다르고 특이한데다 수백 수천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타고서 제각기 나름의 목적지를 향해 배를 몰았어. 그들 중 일부는 배를 사랑하고 항해를 사랑했지만 또 다른 일부는 배를 싫어하고 또 항해를 싫어했어.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항해에 나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군가는 그들이 살던 땅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도망쳐나왔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이 살던 곳이 저주를 받아 아무것도 자라나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땅을 버리고 떠난거라고 이야기했지. 또 누군가는 그들이 끝나지 않는 전쟁에 지쳐 그 땅을 외면했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그들이 호기심에 못이겨 그들 자신을 별의 바다로 이끌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어느것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된 바는 없어.

그 수많은 배들에는 왕이 있었어.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며 다툴때마다, 왕은 그들을 중재하고 더 나은 길,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역할을 맡았지. 어떤 배엔 수백개의 이름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배엔 단 하나의 이름만 존재하기도 했지만, 모든 배엔 언제나 단 한명의 왕만이 존재했었지. 그건 규칙이었거든. 맨 처음 고향에서 떠나온 이들이 만든 규칙말야.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타있었던 배 또한 마찬가지로 한명의 왕이 있었어. 그들의 성격도 목적도 결점도 모두 제각기 달랐지만,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현명한 왕의 중재 아래 하나의 목소리로 입을 모아 갖은 풍파와 고난을 견디고 앞으로 나아갔어. 수많은 배가 부서지고 길을 잃고 별의 바다 너머로 스러져갈때,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왕이 이끄는 배는 올곧게 자신의 길을 나아갔었지.

그런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타고 있던 배는 홀로 항해하지 않았어. 멀리서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타고 있던 배와 함께 평행히 별의 바다를 헤치던, 밝은 별이 지나치는 순간 황금색에 가까운 주황색으로 밝게 빛나는 그 자태에 모두가 열광하고 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황금색 배가 함께하고 있었지.

수많은 세대가 지나며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통치하던 왕이 그들이 떠나온 고향과 그들이 꿈꿔오던 미래, 그리고 그들과 함께 출발했던 다른 모든 배를 잊어버렸지만, 그 황금색 배만큼은 결코 시선에서 놓치지 않고 언제나 기억했어. 언제나 멀리서 말을 걸 뿐 직접 마주해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왕은 그 배로부터 언제나 희망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어.

그렇게 몇 세대가 더 지났을때 쯤, 왕은 자신이 늙고 병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누구보다 오래 살았음에도, 그 생이 결코 영구히 지속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은 왕은, 언제나처럼 황금색 배를 향해 말을 걸었어. 그리고 조용히, 다른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황금색 배의 왕에게 부탁했어. 자신은 힘들고 지치고 늙어 곧 죽게 되니, 자신의 배에 타있는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주어 이 길고도 긴 여행을 마쳐달라고 말이야.

하지만 황금색 배의 왕은 그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태도로 역정을 내며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을 대했어. 자신의 배에 그들을 들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이야기하며, 이를 무시할 경우 자신들에 대한 침략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

하지만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어. 왕은 자신에게 목숨을 맡긴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은 끊임없이 황금색 배의 왕을 설득했고, 황금색 배의 왕은 끊임없이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을 거절했어. 끊임없는 설득이 모두 거절당하자 결국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은 배가 별의 바다로 나선 이래 처음으로 다름 배와 배를 맞대기로 결심했지. 황금색 배로 건너가 황금색 배의 왕과 직접 담판을 짓기로 한거야.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은 그런 자신들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리고는 천천히 별의 바다를 가르며 황금색 배를 향해 나아갔어. 황금색 배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 황홀한 배의 자태가 창 너머로 서서히 드러나 주위의 별빛을 반사하며 우아하고 웅장하게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 이에 흥분한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배의 오랜 친구들을 만날 기대에 한껏 기분이 고조되었어.

하지만 황금색 배는 갑판을 열어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을 맞이하는 대신, 불타는 쇠화살을 쏟아내어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배에 쏘아보냈어. 별의 바다를 가르고 빠르고 곧게 날아간 화살들은 모두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배의 두꺼운 장갑을 뚫고서 그 진로에 있던 모든것을 산산 조각으로 부수어버렷지.

난데없이 뚫린 구멍 사이로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태운 배는 그 속의 내용물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그 파고에 휩쓸려가 거친 바다를 향해 내던져지고 말았지. 빠른 속도로 그 구멍을 막는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자신의 아이와 연인과 부모를 잃은 이들이 소리높여 황금색 배에 대한 복수를 하자고 소리쳤지. 마치 오랜 세월동안 함께해온 그들의 우정이 처음부터 없었던것 마냥.

왕은 사람들의 의견을 중재해 그들의 화를 풀고 황금색 배의 왕을 설득해보려 시도앻ㅆ지만, 그건 불가능했어. 사람들에게서 중재할 의견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야.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이름, 복수를 외쳤어.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배는 황금색 배를 향해 포문을 열었어. 그 포문의 끝이 순간적으로 빛나며, 벼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올곧고 또 기다란 빛줄기를 황금색 배를 향해 쏟아냈지. 몇초 지나지 않아 그 빛이 사라졌을때, 그 광채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 불타고 녹아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황금색 배의 심장이 있었던 자리를 정확하게 빛줄기가 지나갔기에, 황금색 배의 고동은 멈추고 차갑게 식어 서서히 멈추었지. 더이상 황금색 배의 왕은 말하지 않았고 조용한 침묵만이 황금색 배로부터 들려올 뿐이었어. 텅빈 구멍을 통해 수많은 잔해가 쏟아져나왔고,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배는 그 잔해를 천천히 헤치고 나아가 그 옆에 배를 대었어.

왕과 몇몇 용감한 선원들이 갑판을 대고 황금색 배로 건너가 생존자를 찾아보기로 결심했지. 왕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황금색 배로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그 안엔 아무도 타있지 않았어. 선원도 없었고, 항해사도 없었고, 요리사도, 가족도, 자식도, 왕도 없었어. 시체조차 없었지. 그곳에 남겨진 거라곤 단 한가지, 오랜 세월을 홀로 견딘듯한, 곰팡이가 핀 단 하나의 편지 뿐이었어.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어. '내 오랜 벗이여. 이 편지를 본다면 이미 우리는 사라지고 만 것이겠지. 내 그대에게 이야기 하지 않은 사실 하나를 고백하겠네. 우리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지만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네. 결국 우리가 수많은 배 사이에 홀로 남겨진게 아닐까하고 말일세. 그대들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내 배에 타있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언급하며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네. 결국, 누군가는 배에 남겠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 배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지. 오랜 세월 잊혀져버린 고향과 목적과 동려들을 다시금 떠올리고, 나는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네. 수많은 이들이 배를 떠나고, 그들의 뒤를 따라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배를 떠났다네.

편지를 쓰고있는 지금 이 배에 타있는건 수십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 뿐이라네. 배의 심장은 스스로 뛰기에 결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겠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을 유지하기에 우리의 수는 너무 적다네. 그러기에 이 배가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네.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거라네. 내가, 우리가 드디어 죽어가는 거지.

이 사실을 왜 자네들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의아해하겠지. 이해하네. 우리는 자네들에게 도움을 청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를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 대신 그대들을 속이는 방법을 택했다네. 왠 줄 아나? 기나긴 항해 동안, 결국은 부서져버리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그대들의 푸르고 우아한 배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라네. 그대들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었던거네. 그렇기 때문에 난 알았지. 그대들또한 우리의 배를 보고 그리 생각하리라는 것을.

절망이라는 놈은 병과 같아서 손쉽게 전염되고 사람의 마음을 천천히 갉아 먹는다네. 낫는다 해도 그 흉터는 영원히 남아 사람의 낙인으로써 존재하게 되지. 나는 그 병을 자네들에게 전염시킬 수는 없었네. 그래서 나는 대신 침묵한 걸세. 그대들을 위해서말야.

오랜 세월 서로 떨어져 살다 마침내 이 편지를 찾아냈다면, 아마 그대들 또한 그대들 나름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겠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려 한 것이겠지.

안타깝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건 단 하나의 충고 뿐이라네. 이 거대한 별의 바다에 안주해버리고 만 내가, 꿈을 잃어버리고 만 내가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충고는, 꿈을 다시 떠올리라는거야. 고향과 동료를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꿈은 언제나 다시 꿀 수 있네.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게. 그곳에서 모두와 함께 새로이 시작하게.

같이 해온 오랜 세월이 야속하게도, 지금 나는 더 많은 시간을 그대들과 함께 했으면 했다고 바라고 있다네. 하지만 그 꿈은 요원해 보이는구만. 유령으로라도 남아 그대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은 그 편지를 품에 넣고선 조용히 자신의 배로 돌아왔어. 그리고 그 선원들에게 자신들이 본 것을 절대 언급하지 말라 당부했지. 왕을 마주한 열두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왕에게 황금색 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어.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왕은 침묵했어. 그리고 말했어.

"내 죽음이 멀지 않았다. 배를 대고 장례를 치를 때가 되었어."

오랜 세월 별의 바다를 떠돌던 배는 그 오래되고 육중한 몸뚱아리를 검은 흙과 푸른 나무와 청명한 물의 바다에 대었지. 그러자 엄청난 충격이 배를 덮쳤고 낡은 배의 부품은 우수수 떨어져나가 그 형태를 잃고 말았고, 더이상 별의 바다로 다시금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지. 열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왕은 이제는 결코 그 어둡고 아름다운 별의 바다를 항해할 수 없게 된거야. 하지만 왕은 만족했어.

모두가 살아있었고, 모두가 함께였었기 때문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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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이야기야."

패트리샤가 말했다. 검게 드리운 밤하늘 아래 패트리샤와 울피나, 그리고 피오나가 언제나처럼 모닥불 옆에 옹기종기 앉아 난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와중이었다.

"별이 잔뜩 떠있는 바다라니, 상상만 해도 예쁜것 같아."

"예쁜걸로 따지면 인간들의 별 이야기도 좋은데? 운명의 푸른별과 제케니아의 별자리 이야기가 특히 그랬었고."

울피나가 패트리샤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음에도 울피나는 지나가며 했던 난희의 이야기들을 전부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희가 기억하기에도, 제케니아의 이야기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움이 섞인 좋은 이야기였다.

"수인족의 이야기도 좋지 않아? 울피나, 수인족의 별 이야기도 한번 쯤은 들려줘도 좋잖아."

패트리샤가 보챘지만, 울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정말로 내가 아는 이야기라곤 없어서말야. 아주 예전에, 희미하게나마 아버지가 한 이야기의 꼬투리만 알 뿐이지. 밤하늘이란 먼저 떠난 이들이 꾸는 꿈이고 별은 그 꿈에 그린 길이라는 이야기…였던걸로 알고 있어. 엘프의 별 이야기는 잘 알테고."

"혹시 모르지. 피오나라면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잖아? 숲마다 전해지는 엘프들의 이야기는 천지 각색으로 바뀌니까. 피오나. 네가 아는 별 이야기를 해줄수 있니?"

피오나는 자신에게 향한 패트리샤의 질문에 갸웃거리더니, 그 태도가 무색하게도 바로 입을 열어 이야기를 꺼냈다.

"세상을 만든 신이 검은 모루를 위대한 벼락망치로 두들기자, 버틸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쇳조각이 산산조각으로 나뉘어 폭팔해 밤하늘에 박히고 말았어. 그 쇳조각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고 해."

"…신?"

"…프쉬키르 이야기 말고도, 엘프에게 신 이야기가 있었나?"

"나야 잘 모르긴 한데, 흠. 흥미로운 이야기인걸."

난희가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 키가 작은 엘프 소녀는 난희조차 듣지 못한 완전히 새롭고 색다른 이야기를 꺼낼때가 많았다. 그녀의 고향이라고 일컬어지는 숲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는 난희에게도 새로운 이야기들이었다. 피오나가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잘 알려지지 않은 더 변방의 이야기일 뿐일까?
그렇게 난희가 고요히 생각하고 있다, 비로소 자신에게 다른 세명의 시선이 모두 쏠려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난희는 작게 웃었다.

"뭐야. 내 이야기는 다 했다구."

패트리샤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이야기야 하긴 했지만…"

"'네' 이야기는 아니었잖아."

울피나가 패트리샤의 말을 이어 완성했다. 난희는 한숨을 쉬고 그 기대에 답했다. 부정적으로.

"내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죄다 믿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이 뭐래."

"궁금한건 다른 문제니까. 한번 해줘. 닳는것도 아니잖아?"

뭐라 이야기하려다, 난희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후. 그래. 그럼 하지 그래. 음…"

난희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살았던 곳에선, 사람들이 직접 별을 만들어 하늘에 쏘아내 박고는 했지. 검은 밤하늘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빛나던 그 별들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서 그걸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능력이 있었지. 많은 사람들은 그 별을 향해 말을 걸었고, 그 별들은 대륙 저편의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그 목소리를 전해주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어디에 갈라져 떨어져 있던, 별은 굴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전하고 사랑을 속삭였지.

그런 별이 긴 궤적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질때, 속으로 작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 물론 그 별이 떨어지기 전에 세번을 반복해 그 소원을 빌어야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소원이 무어라고 절대 밝혀서도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지만말야. 왜 그런 이야기가 시작됬는지에 대해선 나도 아는 바가 없어. 그저 추측할 뿐야. 죽어가는 그 별이, 세상너머의 누군가에게 내 말을 전해주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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