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다리에서 만난 이야기

때는 늦은 저녁. 뉘엿뉘엿 쓰러져가는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그 붉은 잔영만 하늘에 드리운, 그런 을씨년스러운 저녁.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시간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소문난 도시들에게도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성실한 사람들이라면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 또다른 내일을 준비할 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 그 유명한 마족의 권세가문 헬른가의 도시 헬른은 달랐다. 황혼을 비추는 바닷가를 품은 훌륭한 상업도시의 곳곳에 마공학의 정수라 불리는 마등이 세워져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기에,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놓고 거리를 다니며 내일에 대한 걱정을 잊게 만드는 놀라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 할지라도 이 시간에 붉은 말머리 술집에 찾아오는 이들이 성실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치안은 나쁘지 않았지만 눈에 확 띄는 거리에 자리잡지도 않은 이 술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일에 대한 제대로 된 계획이 제대로 있을리 만무한 것이다. 너무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이 붉은 말머리 술집을 이용하는 손님의 대부분은 마치 버릇처럼 이 술집에 찾아오는 단골이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경험에 입각한 결론이다.

그런 붉은 말머리 술집을 향해 한 마족 남성이 다가가고 있었다. 멋들어진 검은 가죽 코트는 멀리서 바라봐도 눈에 띄었는데, 이런 느낌은 스톰 패치에 그려진 푸른 방패에 기인하기도 했다. 헬른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비대원임을 뜻하는 그 문장은 송사리 범죄자에겐 꽤나 영향력을 미쳐 마등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거리 구석으로 숨어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일반인들에게 있어선 아직 마음놓고 밖에 나다닐수 있다는 안정을 주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비대원이 대로에서 빠져 골목길로 발걸음을 돌리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더욱이 허리춤의 곤봉을 똑바로 붙잡고 걷고 있다면 더더욱. 안그래도 어두운 마족의 피부위에 넓은 챙의 모자가 드리운 그림자가 덧씌워지자 그 주변의 분위기는 더욱 더 무거워졌고, 길거리에서 지나친 사람으로 하여금 이 남자가 대체 무엇을 위해 골목 안으로 향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그는 자신이 정확하게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붉은 말머리 술집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황색 불빛을 맞으며 말했다.

"여기 맥주 한잔!"

카운터 안쪽의 엘프 여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술을 주문하는 중년의 수비대원을 비웃으며 말했다.

"헬젠 한잔, 알겠어. 적당히 앉으라고, 베젤."

베젤은 그제서야 모자를 벗고 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취객이 취객에게 이야기하며 내는 즐거운 소음과 술집 안에 가득한 담배 연기가 정말 푸근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뛰어난 견인족 바드가 현악기를 켜머 노래를 부르니 그 분위기는 더더욱 흥겨워지고만 있었다. 베젤은 이 분위기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랬기에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앉을만한 자리를 찾는 베젤의 기분은 어느 때보다 즐거울 수 밖에 없었고, 카운터의 스톨에 빈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때 그 기분은 절정에 달했다.

그 옆에 자리잡은 드워프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분명 베젤은 그 드워프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베젤이 시킨 맥주와 똑같은 술을 목재 잔에 담고서 즐거운 듯 옆자리의 인간 소년과 대화를 하던 그 드워프는 아직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만약 그가 베젤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그 또한 기분나쁜 표정을 지을 것 또한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빈 자리는 그 스톨밖에 없었기에 베젤은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옆자리의 드워프보고 들으라는 것 처럼 시끄럽게 스톨을 끌며 그 위에 올라탔다.

여느 술꾼이 그렇듯 드워프 또한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다가온 이방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곁눈질 한번으로 친근한 대화와 대화의 끝에 공짜 술의 여지가 존재할지에 대한 저울을 재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가 호의적인 이방인이 아니라 검은 가죽 코트를 입은 베젤임을 알아채자마자 그 저울은 곧 내팽개쳐졌다. 

"하, 거 참 술맛 떨어지게 껌둥이가 다가오는구만."

드워프가 거칠게 비아냥거렸다.

"엥? 어디서 모기가 날아드나? 여기선 난쟁이가 하는 말이 들리지가 않아서 말야."

베젤이 곧바로 받아쳤다. 난쟁이라는 말에 발끈한 드워프는 미간을 지뿌리며 베젤을 바라보았고, 그런 드워프를 내려다보는 베젤과 눈이 마주치자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들듯한 신경전이 몇초간 이어졌다. 언제 주먹이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때, 여주인이 끼어들었다.

"여기 헬젠 한잔. 그리고 둘 다 잘 알겠지만 이 술집에서 싸울 생각일량 꿈도 꾸지 말라고. 싸울거면 술로. 규칙 알잖아?"

꽤 무게가 나가보이는 나무 술잔을 베젤 앞에 내놓으며 여주인이 말했다. 그녀가 내뿜는 위압감은 싸움 좀 해봤다는 베젤조차 입다물고 술잔을 쥐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손으로 얌전히 술잔을 쥔 베젤은 헬젠을 홀짝이며 잠자코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애초에 주먹질로 이자크가 날 이길수는 없을테지만 말야."

"거 쫑알쫑알 시끄럽구만, 베젤. 언제는 날 이긴 것처럼 말하네?"

"그 쪽도 날 이긴 적은 없지 않나?"

"나야 널 상대로 제대로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

"한판 해보자는건가?"

"물론. 일 끝나고 바로 온 술주정뱅이 검둥이 하나쯤이야 손쉽게 해치우지."

어찌보면 유치하다 볼 수 있는 그 말싸움의 끝은 이상하게도 주먹질이 아니라 주인장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애초에 이런 말싸움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인은 그런 시선을 눈치채고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둘 다 정말 한심해. 잘 알고 있겠지만. 오늘의 키워드는 '하지만'이야. 한번씩 말할 때마다 한잔씩. 먼저 쓰러지는 쪽이 돈을 내는거고. 잘 알지?"

"물론이지."

"몇번을 했는데."

베젤과 이자크가 답했다. 마치 결투에 임하는 기사마냥, 술잔을 들어 살짝 흔들고서.

그리고는 침묵이 이어졌다. 이야깃소리와 현악이 섞인 노래소리가 가득찬 침묵이.

"언제나 생각하는거지만 할 이야기 없지 니들?"

주인장이 비꼬며 말했다. 둘 다 답하지 않았다.

"둘 다 똑같아. 알지?"

둘 다 그 말에 발끈하며 뭐라 대꾸하려다, 이내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건 페페였다.

"이자크,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요."

"무슨 이야기?"

베젤이 끼어들며 물었다. 페페와 베젤 사이에 이자크가 앉아있었기에 페페가 보이지 않았던 베젤은, 상체를 카운터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 뭐냐, 헬른 이주 전쟁때 베르톨도 헬른과 에티에네트 사이에 있었던 결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불편한 베젤의 태도에 호응해주듯, 페페도 상체를 기울여 베젤을 바라보며 답했다.

"우리 위대한 드워프와 훌륭한 엘프들은 헬른 침략 전쟁이라고 부르지."

베젤과 페페의 시선 사이, 이자크가 끼어들었다. 땅딸막한 신체덕에 이자크의 상체는 기울인게 아니라 메달린 것 처럼 보였다.

"야, 더러운 뒷통수 치우라고."

베젤이 말했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한 주인장이 말했다.

"페페하고 이자크, 서로 자리 바꿔. 그러다가 스톨이나 카운터 하나는 부서지겠구만."

순진한 개처럼 둘은 자리를 바꿨다. 좀 더 안정적인 그림이 나왔다. 무엇보다 미끄러진 이자크가 기물을 파손할 일은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 주인장에게 안정을 찾아다 주었다.

"침략 전쟁이든 이주 전쟁이든, 일단 마저 해봐요."

"하지만 이자크가 몇번 한 이야기 아냐? 입에 달고 살잖아?"

"하하! 말했다!"

이자크가 베젤을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런 이자크를 바라보며, 베젤은 반쯤 빈 나무잔을 흔들어보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시킨 첫잔을 승부잔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인상을 쓰며, 이자크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많이 하진 않았어."

"일주일마다 한번씩은 하시잖아요. 말할때마다 바뀌긴 하는데."

"아냐!"

이자크가 반론했다.

"맞아. 비슷한 이야기를 몇번 들었어. 항상 지금보다는 더 취했을때 이야기했지만."

베젤이 받아쳤다.

"그 결투를 목격했다기로서니 그것만 우려먹는건 아니지 않나 싶은데."

분명 비아냥이 섞인 말투였다. 

"핫. 하지만 너도 봤었잖아? 항상 이야기해도 모자랄 멋진 결투였다고. 긴장감 넘치고, 로망이 살아있는."

베젤이 뭐라 이야기하려다,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포즈로 잔을 흔들며 비웃는 이자크를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이자크는 술잔에 남은 술을 깔끔히 들이마시고 말했다.

"한잔 더. 여튼 나와는 다른 편에서 그 결투를 바라봤다지만 그 결투의 빛이 바래는건 아니잖아?"

이자크의 물음에, 베젤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 했다. 그래야 하는 결투였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이다.

"자,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그래. 첸탈산에서 바로 이 곳, 노르튼 해협까지 이어지는 아들라 강 하구에 있었던 거대한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헬른의 마족과 위대한 엘프 군이 대치했다는 이야기까지 했었지."

"아, 거, 위대한 말은 빼지?"

베젤이 투정부렸다.

"잡음이 심하구만? 비겁하다는 단어를 안붙이는 걸로 만족하라고. 그래서, 그 돌다리 말인데. 옛날 하플링 세 왕국이 건재했을때 만들어진 다리라고 전해졌었지. 지금은 그 다리를 지탱하던 기둥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다리가 건재했을땐 진짜 거대해서 네 진영의 방진이 한 열을 이루고 버텨도 양 옆에 마차가 한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지. 한가운데 서면 광장이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니까!"

이자크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베젤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다리 한쪽 끝에는 헬른군이, 다른 한쪽에는 엘프군이 딱 자리잡고 서있는데, 그 사이의 정중앙에 딱 두 사람만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단 말야. 피를 머금은 엘프의 영웅, 에티에네트가 수천의 대군은 마주보고도 떨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데, 얼마나 멋지던지."

"결투라고 하지 않았나요?"

페페가 물었다.

"헬른쪽에선 누가 나왔나요?"

"엥? 아, 헬른쪽에서는 베르톨도라는 친구가 나왔지. 겁쟁이 베르톨도."

"헛소리마라 난쟁아! 지금 이 도시를 책임지는 헬른 가문의 맹주, 베르톨도 헬른을 그따위로 부르지 마!"

이자크의 비아냥섞인 어리숙한 도발에 깔끔하게 걸려든 베젤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헤, 그래서 지금 그 맹주님은 어디계시나?"

"읏..."

대답도 하지 못하고, 베젤은 잔을 입에 대더니 이내 잔을 비웠다.

"얘기를 계속 하지. 그래서, 에티에네트. 수많은 기사가 그녀의 외모에 반해 결투를 신청했지만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한 전승의 전사. 패색이 얼마나 짙더라도 그녀가 전장에 나타났다 하면 우리의 사기는 다시 올라 수적 열세를 뒤엎고 승리하기 일쑤였지. 그녀의 검술은 칼을 마주하고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생각할만큼 뛰어났고, 뛰어난 마법과 타고난 궁술덕에 멀리서라도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 그런 에티에네트가 우리를 대변해 그 다리 위에 섰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정도였어."

"잠깐만요, 궁금한게 있는데, 에티에네트는 왜 결투에 나선거에요? 베르톨도가 결투를 신청한건가요?"

페페의 질문에 갑작스레 이자크의 말이 끊기더니, 끄응하고 앓는 소리가 속에서 새어나왔다.

"그게 말이지... 음... 내가 저번에 이야기할떈 뭐라고 하디?"

"어, 베르톨도가 에티에네트에게 반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 어! 그래! 그런거지. 그 정도로 예뻤다니까. 응, 응. 그래."

명백한 거짓말에 베젤은 물론 주인장도 피식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기억이 안난- 핫!"

"당첨이요, 난쟁이씨. 기억력도 구려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려고?"

베젤이 놀려대는 것을 무시하고서 이자크는 자신에게 돌아온 나뭇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그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순식간에 텅 빈 나뭇잔을 탁하고 내려놓자, 주인장이 그 잔을 집어 금새 새 맥주로 따라놓았다.

"어? 잠깐, 이걸 왜?"

"방금 마신건 아까 시킨거고, 이게 벌주야."

"하! 너무하구만!"

"으하하! 멍청하기는! 하하하!"

베젤이 마지못해 잔을 받아든 이자크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그리고서는, 숨을 들이쉬고 맥주를 다시금 마시기 시작한 이자크를 가만 두고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잇기 시작했다.

"헬른가가 결투를 신청한건 싸움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야. 알다시피 헬른 가문은 쥰-미르스 대륙에서 떠나와 위버틴 대륙에 정착한 마족이었기 때문에 떠나면 갈 곳이 없었거든. 우리가 딱히 싸움에서 연전연패한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사는 터전에서 맨날 전쟁만 할 수도 없는 법이었으니 가문 회의에서 서로의 명예를 지키는 방향으로 결투로 승패를 결착짓자 이야기한거지. 토착민 쪽에서도 그런 우리의 의견에 동의를 했고."

"아항, 그럼 베르톨도라는 사람도 에티에네트처럼 엄청 강한 사람이었나요?"

베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지. 내려져 온 이야기만 하더라도 몇시간을 이야기해도 부족할 정도로 뛰어난 군인이자 기사였고, 또 동시에 숲지기였어."

"숲지기요?"

페페가 물었다.

"숲지기가 뭔지 모르니? 마족의 영토에 존재하는 거대한 숲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하고, 거기에 사는 위험한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숲지기야. 덫이나 기계, 그리고 또 각인 마법에 통달한 사람만이 뛰어난 숲지기가 될 수 있지. 베르톨도 헬른은 그런 숲지기로써 수많은 괴물들과 맞써 사웠어. 검은 밤에만 나타나는 여섯개의 발이 달린 곰의 목을 베거나, 마을을 집어삼킨 거대한 도마뱀을 사냥하기도 했지."

"발이 여섯개라구요? 에이, 거짓말 하지 말아요."

"하하... 나도 그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구나."

베젤이 말했다.

"여하튼, 거기에 말도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베르톨도 헬른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유명한 마족의 권세 가문, 헬른 가문의 맹주가 될 수 있었겠어? 저기 난쟁이가 에티에네트가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만큼, 나도 베르톨도가 우리를 승리로 이끄리라 강하게 믿고 있었지. 나뿐만이 아냐. 그 다리위에 서있었던 마족 전체가 베르톨도를 믿고 있었어."

"하지만 그 신뢰는 금새 깨지고 말았지!"

이자크가 끼어들었다. 그의 손에 든 맥주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서로가 마주한 바로 그 순간! 둘은 이야기를 하더군.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 너무 멀어서. 하지만!"

주인장이 가져온 맥주잔을 곧바로 비우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순식간에! 순식간에 둘은 싸움을 시작하기 시작했지. 그래! 시작하기 시작한거야! 정말 멋졌어! 에티에네트의 그 멋지고 빛나는 칼이란! 사방을 가른 그녀의 칼날은 베르톨도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 칼을 베르톨도인가 뭔가 하는 녀석은 간신히 막아내고만 있었지! 이따금 이뤄진 그의 반격조차도, 에티에네트하면 함께 따라다니는 해골 머리 방패가 절묘하게 칼날을 비껴나가게 만들었고 말야! 그렇게 승기가 굳혀지나 싶을떄, 빌어먹을 마족놈이 간계를 부리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건 반칙이 아니라고!"

베젤이 황급하게 반론했다. 그러고서야, 한숨을 쉬더니 주인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은 금새 새로이 차오른 맥주잔을 카운터 위에 올렸다.

"말해두겠지만, 그건 반칙이 아니라 마법이야! 아까 말한 각인 마법!"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비겁한건 비겁한거라고! 페페, 생각해봐. 검이 뭘 때릴때마다 그 부분이 작지만 폭발하게 된다면 얼마나 위험하냐? 베르톨도가 그런 기술을 썼다니까?"

"반칙이라고 하니 말인데, 에티에네트가 쓴 마법은 왜 언급하지 않는건데? 그것도 다 실력인가?"

"엥, 그거 완전 실력 아니냐! 엘프라면 다 그정도는 쓸 줄 안다고!"

"웃기시네! 술취해서 정신을 놓으셨나. 첫합에 가슴을 노리며 찌르기를 해온 에티에네트가 순간 사라져 자세를 바꾸어 위로 올려베는 모습을 똑똑히 봤는데! 그게 그거 잖아! 위상변화인가 하는 그거! 그걸 그렇게 쓰는 사람은 처음봤다고! 거리를 좁히는 것도 아니고 자세를 변환시키기 위해서 마법을 쓴다니! 적어도 베르톨도는 정정당당하게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하진 않았어!"

"하지만, 과연 그럴까?"

또다시 맥주잔을 쾅, 하고 내려놓고는 이자크가 말했다. 그 잔을 다시 채워 가져다놓은 주인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이자크에게 말했다.

"카운터 부서지면 네 술취한 대가리도 부서질줄 알아라."

순간 거나하게 취했던 이자크의 움직임의 열기가 급속하게 식은 것을 페페는 느낄수 있었다.

"엄. 그래. 여튼. 베르톨도 그 녀석이 신체 강화 마법을 안썼다는 보장은 없잖아. 안그래? 하... 하하..."

하지만 베젤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냐. 적어도 헬른가의 기사들은 신체 강화 마법을 쓰지 않아. 아니, 못쓴다고 하는게 정확하겠지. 헬른가의 장구류 대다수엔 항마법 코팅이 되어있어서 그런 마법을 사용하면 오히려 몸이 무거워지고는 하거든. 신체의 마력과는 상관없는 각인 마법이 발달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헤에, 그걸 어떻게 베젤씨가 아는건데요?"

어째서인지 베젤이 기분 좋은듯 웃으며 답했다.

"왜냐면 나도 기사거든!"

"퍽이나."

이자크가 비꼬며 말했다.

"말 했잖아!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본가의 명령에 따르는 분가로써 부름에 따라 참전했다는 거지."

"하지만 수비대원이잖아요? 거기다 쉬는 날엔 돈받고 다른 집 수리해주기도 하면서."

"아, 그건 평시에 하는거고. 매일 갑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잖냐? 이를테면 예비 기사인거지. 여하튼."

베젤은 이상하게 흘러간 이야기를 다시 원궤도에 되놓았다.

"갑자기 머리를 향해 올라오는 칼날은 베르톨도에게도 당황스러웠는지, 첫합에 바로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더군. 바로 주먹이야. 날아오는 칼날에 재빨리 손을 뻗어 칼날을 좌로 쳐내고, 칼날 안쪽으로 파고들어 검을 쥔 오른쪽 손으로 얼굴을 갈겼지. 뒤에서 보는데 정말 아파보일 정도로 정통으로 들어간 매서운 주먹이었어."

"하지만 에티에네트와 엘프의 정신을 쓰러트리는데엔 부조캤지!"

"드디어 혀가 꼬였군!"

"하지만 취하진 아났어!"

금새 이자크 앞에 맥주 두잔이 추가되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에티에네트는 그 주먹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는듯 거리를 벌리고 마주 서고 자세를 바로잡았지. 그 뒤의 결투는 서로가 거리를 재고 싸우기의 반복이었고. 아주 약간의 근육의 뒤틀림, 호흡의 실수를 발견하겠다는 것 마냥 둘은 상대의 눈을 고요히 바라보다, 이따금 언제 그랬냐는듯 매섭게 검과 검을 맞부딪치기 시작했지. 에티에네트의 검신을 베르톨도가 칼 끝으로 쳐내고 그대로 찔러들어가면, 에티에네트는 베르톨도의 찌르기를 방패로 흘리고 바닥을 박차 다시 거리를 벌렸어. 베르톨도는 이자크가 말한 각인 마법을 통해 빈틈을 만들어 보려했지만, 에티에네트는 능숙하게 그 마법을 역이용해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그러기를 한시간여, 양측의 군대는 숨죽이며 그 대결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어. 그 결투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해서가 아니라, 결코는 다시 보기 힘든 훌륭한 싸움이었기 때문이야.

아니, 싸움이라고 하는건 그 아름다운 사건을 폄하하는 느낌이 들어. 그래. 하나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지만 너무나도 완벽하게 구도가 짜여진 그런 그림이었지. 소리도 나고, 막 그런 느낌의."

베젤은 힘들게 말했다. 머리에 떠오르는 그대로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얼굴에 띄우고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됬어요?"

페페가 물었다.

"그래. 말했다시피 그러기를 한시간여, 눈치챘어야하는 걸 그 다리 위에 서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말았어."

"그게 뭔데요?"

"그건 바로..."

"마적넘들으 수작이지, 수작이야!"

이자크가 끼어들었다. 이젠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채로, 자기 딴엔 승리의 웃음을 짓고있다는 양 당당한 말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안그럼 그런개 있을리가 업엇어! 암! 고럼!"

"하지만 그럼 매일 낮에 몰려드는 그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멍청아."

"히히... 말 했다 멍청아..."

뒤늦게 말실수를 깨닫긴 했지만, 이정도야 버틸수 있다는 듯 베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전 잔을 비우지 못했기에 한숨을 쉬고는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금새 새로운 맥주가 베젤의 앞에 놓였다.

"끄윽. 그. 무슨이야기 했지?"

"눈치챘어야 한다는..."

"아, 그래. 그때 계절이 초봄이었어. 그리고 이 근방의 날씨는 초봄이 겨울에 가깝지. 햇살은 쨍쨍한데 바다가 얼음같이 차가운 그런 날에는, 한낮에 안개가 바다로부터 다가오지. 안개라기보다, 아주 미새한 얼음 알갱이의 구름같은 느낌이지만. 여튼 땅 위는 거짓말같이 맑지만 물 위는 안개가 소리없이 다가와 애워싸고는 하지. 너도 이맘때 낮에 나가보면 볼 수 있을거다. 그 날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리없이 안개가 다가왔지. 평소라면 우리는 금새 눈치챘겠지만 그날은 두 사람의 결투에 혼이 팔려 눈치챌수가 없었어. 결국 순식간에 나타난 안개가 에티에네트와 베르톨도를 애워싸고 말았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칼소리가 들려왔지. 이따금 안개가 불꽃으로 붉게 번쩍였고."

페페는 침을 삼켰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베젤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힌 그 순간, 두 군대는 두 사람의 결말을 바라보게 되었지. 다리의 동쪽 끝, 칼을 서로 겨눈 두 사람의 모습을. 베르톨도의 판금 갑옷은 야수가 할퀸듯 깊게 여기저기 패이고 검게 그을려있었고, 뜯겨져나간 갑옷 밑의 검은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지. 에티에네트라고 다른 상황은 아니었어.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방패는 반으로 쪼개져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 반쪽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지. 몇번이고 적의 공격을 막았는지 그녀의 건틀렛은 산산조각이 나있었기에, 안개가 걷히자 그녀는 사슬을 풀고 강에 건틀렛을 버리더군."

베젤은 맥주를 홀짝였다. 이자크는 이제 거의 쓰러진 상태였다.

"그래서, 누가 이겼어요?"

페페가 물어왔다. 이제, 그의 나이 또래의 쾌활함과 호기심이 가득찬 목소리였다.

"이긴거?"

베젤이 고개를 돌려 페페를 보고 환히 웃고는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그리고는 스톨 밑으로 쓰러졌다. 

"베젤 이 녀석은 쓰러지기 전까진 쓰러질 것 같지 않는게 문제지. 술도 별로 안세면서. 반면 이자크는 술이 세긴 한데 쓰러질때까지 쉴새없이 마시고. 베젤 오기 전에도 다섯잔이나 마신놈이 무슨 패기로 싸움을 건거야?"

주인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로써는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기에 지금만큼 좋은 결과가 없었다. 물론 이 둘을 치우는데 몸이 고생이겠지만, 그녀로써는 그다지 큰 페널티는 아니었다. 

"페페, 고맙다. 자, 여기 오늘 보수."

카운터 위에 동화 네닢을 올려놓자 페페는 웃으며 그 동전을 쓸어담았다.

"주정뱅이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생이 언제나 많다."

"뭘요. 덕분에 싸움도 안나고 좋잖아요? 저야 이야기 듣는걸 언제나 좋아하구요."

"덕분에 일이 많이 줄었어. 예전엔 쉴새없이 꺠부수고 했는데. 네 평판도 좋다고?"

"그런가요? 헤헤, 다행이네요."

헤실헤실 웃는 페페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 결투, 누가 이겼어요?"

"엥? 이자크가 말 안했어?"

의외의 일이라는 목소리로 여주인이 되물었다.

"네.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취해서 뻗어버리고는 했거든요."

"하. 하긴 그럴만도 하지. 근데 정말 궁금해?"

페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스러울지도 모를텐데?"

"그래도 이야기해주세요. 이자크에게서 결론을 듣기전에 제가 술집을 하나 차리게 생겼는걸요."

"핫, 맞네. 그러네."

여주인이 웃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서는 기억이 안나. 어떻게 거치장스럽게 변한 건틀렛을 벗어던진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는 기억이 안나. 후일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길, 둘 다 그대로 쓰러져 강 밑으로 빠졌다고 하더라고. 웃긴건 나는 헬른쪽에게, 베르톨도는 우리쪽에게 구출되어 치유받았다는 거지. 그떄 분위기를 생각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던게 놀라웠을 따름이지.

사실 그렇게 싸울 필요도 없었는데 말야. 애초에 헬른과 우리는 화친을 맺기로 협약을 마친 상태였거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누구 하나 우월한 종족 없이 함께 살아가기로 한거야. 그리고 나와 베르톨도는 대충 싸우다 비기는걸로 결론을 내기로 했었고.

하지만... 검을 맞부딛쳐보니 다르더라고. 그 결투에서 나는 무언가에 홀려버렸어. 그리고 나중에 베르톨도가 이야기해준건데, 그 녀석도 그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둘은 정신없이 싸웠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그런 느낌으로?"

에티에네트가 말했다. 그리고는 베젤이 채 마시지 못한 맥주를 홀짝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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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그로인한 연기를 뒤로 한 채 굳게 잠긴 문을 두들겼다.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일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안쪽에선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난희는 고개를 돌려 해변을 바라보았다. 본디 별이 가득해야할 밤하늘은 그 대신 일렬로 정렬한 센누나하의 선박들이 켜놓은 횃불로 수평선을 따라 환히 빛날 뿐이었다. 그 어떤 배도 저 포위망을 뚫지 못하리라.

난희는 다시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려 열리지 않은 문은 다시금 두들겼다. 쾅쾅.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을수가 없다는 듯, 마침내 난희가 소리쳤다.

"문 열어, 헬른! 문 당장 열라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헬른! 네가 길다를 빼돌린건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당장 문을 열고-"

문이 움찔하고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헬른 가의 맹주, 베르톨도 헬른이 등장했다.

"크로녹스의 하얀 마녀. 보시다시피 나는 지금 자네와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데."

"닥쳐. 나는 지금 너하고 헛소리할 마음이 들지 않아. 닥치고 길다가 어디 있는지 말하기나 해."

베르톨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젓고서 나지막히 말했다.

"나도 몰라. 이 도시에 없다는 것만 보장할 수 있지."

"뭐라고? 뭘 어떻게 한거야!"

"탈출시켰지. 보게. 지금 헬른이 처한 상황을."

"어디로! 어디로 보냈냔말야!"

흥분한 난희는 화를 참지 못한 듯 베르톨도의 멱살을 부여잡고 외쳤다. 본디 베르톨도라면, 그런 난희의 손아귀를 피할 능력과 힘 모두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자코 말했다.

"영겁의 숲. 그녀가 그렇게도 찾아나서던 '인간 사냥꾼'에게 보냈어. 하지만 포위망을 맟주친 직후 연락이 끊겼지. 지금 어떻게 됬는지는 나도 알지 못해."

난희의 표정이 풀렸다. 말도 안된다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힘이 빠진 손아귀는 자연스럽에 베르톨도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한걸음, 한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안돼. 그래서는. 안돼, 길다."

베르톨도는 고개를 숙였다. 죄책감을 씻지 못한 비릿한 표정은, 그 면상을 난희로 하여금 후려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난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포탄이 헬른 관사를 세게 후려쳤다. 

난희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