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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315, 고개를 들어 노을을 바라본다. 본문

소설

#씬 315, 고개를 들어 노을을 바라본다.

Nake 2016. 6. 13. 00:33



시야의 끝에서 해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 한시간 전의 하늘과는 매우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색의 노을이 붉은 사막을 뜨겁게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절벽 끝에 걸터앉은 체 그 석양을 말없이 지켜본다. 그렇게 1분 정도 거칠게 숨을쉬다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가슴팍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꺼냈다. 칙- 하는 특유의 마찰음과 함께 불타오는 성냥개비의 불꽃을 궐련의 끝에 대고 숨을 빨아들이자 노을 못지않은 붉은 색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특유의 독하지만 그럼에 매력적인 향의 연기가 대기를 향해 흩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여성이 누워있다. 다른 인종, 아마 다른 문화와 다른 사회에서 왔으리라 생각되는 여성이었다. 외견으로는 소녀가 적확할지도 모르는 외견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의 나이를 말한적이 없었기에 남자는 그녀를 소녀따위로 낮춰부르지는 않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남자는 언제나 여성으로 그녀를 호칭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지 못하는 미묘한 동맹관계는 그렇게 불안정하게 지속되고만 있었다. 웃긴건, 정체모를 둘은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다는 것일까.


"저것 봐. 별이 지는군. 드디어 이 지랄같은 하루도 끝이 나는거야. 믿을 수가 없었어. 자네가 이렇게 큰 도움이 될줄은 몰랐다고." 남자가 말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연기가 연하게 입 밖으로 흩어져 나왔다. 그의 말은 그 연기만큼 향기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이 작게 미소를 지을만한 유머가 담겨있긴 했다. 그녀 혼자만히 웃을수 있는 그런 유머였다. 상호간의 유대관계. 둘은 책임지지 못할 유대관계를 어느순간 쌓고만 것이다.


"솔직히 자네 아니었으면 해낼수 있었나 싶기도 하군. 동료가 전부 총에 맞아 죽고, 경찰놈들이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행성간 열차를 털수 있을거라 누가 생각했겠나."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는건 아니었다. 단지 작업을 마쳤다는 쾌감이 지금은 더 컸을 뿐이었다.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를 가능케한 수많은 우연과 기적에 감사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마 몇년, 몇달, 혹은 몇시간 후에 죄책감이 들이닥칠 것이다. 남자는 알았다. 이 직업에 그토록 오래 종사했던 것이다.하지만 남자는 알았다. 아니, 그렇기에 비로소 남자는 알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손에 들어온 보잘것 없는 승리과 막대한 재보를 즐겨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후회없도록. 그렇게 남자는 천만 크레딧 궐련을 빨아들였다.


"그래서 이제 뭘 할거야? 이렇게 깽판을 쳤으니 원래 직업으로는 돌아가지 못할텐데. 나랑 같이 작업하는게 어때? 뭐 지금 가진거로는 평생 먹고 놀아도 문제 없을테지만, 만약이란게 있잖아.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뭐랄까, 거부감이 있고." 남자가 말했다. 태양은 어느샌가 반쯤 땅 밑으로 가라앉아있었다. 여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남자는 촉구하지 않았다. 그럴법 했다. 그럴만한 신뢰가 쌓인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말할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샌가 궐련은 1/4정도 줄어있었다. 이미 불타오른 궐련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재로 변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보니, 내 이름은 엔틀란이야." 남자는 말했다.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 말해야하는 것이었는데 까먹고서 적당한 때를 찾아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듯. 


"통성명을 하지 않았었던것 같네."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난." 드디어 여자가 말했다.


"클론 K-1021."


"뭐?" 남자가 되물었다. 


"클론 K-1021. 다행성 조약기구 법집행 조력 클론." 여자가 말했다.


"내 임무는 엔틀란, 당신과 당신의 범죄집단, 페넬트란 갱이 항성간 열차를 습격, 약탈하는 것을 미연에 방치하는 것. 생사 불문." 여자가 말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당신을 잡기 위해서야. 알아?" 그런 고백에도 여자는 끊임없이 고백했다. 언제 총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누워있었다. 신뢰. 어이없는 신뢰.


범죄자에게서 신뢰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것일까? 여자는 자문했다. 논리적으로라면 그들에게 신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배웠고, 그들의 생태계가 그러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눈 앞의 이익만을 보는 그들에게 신뢰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오히려 그런 이들일수록, 신뢰가 바닥을 치고 불신이 팽배한 곳에서 신뢰의 가치는 더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 사실을 여성은 오늘 일어난 깽판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신뢰는 옳았다. 남자는 쏘지 않았다. 그저 석양만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를 잡아가. 솔직히 지쳤다고."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날 데려가면, 뭘 받게 되지? 영생? 새로운 직업? 신분? 지구로의 여행?"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뒤를 흘낏 바라보는 남자는 이를 바라보고는 웃었다. 여자가 말했다. "쓸모가 없는 무기는 어떻게 되지?" 남자는 곰곰히 생각하다 말했다. "폐기처분." "빙고." 여자가 답했다.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하지만 일은 일이잖아. 군말 없이 따라야지."


"그럼 날 도운 이유는 뭔데?" 남자는 말했다. "우연. 아마 그게 제일 클테지. 하지만 흥미도 있었어. 주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본다는거. 언제나 즉흥적으로 살아간다는거." "그정도로 즉흥적이지는 않았는데." 남자는 변명하듯 말했다. "별 상관 안해." 여자는 말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벗어나고 싶지 않은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는 것 마냥. 그녀의 머리는 붉은 모래로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난 지금 내 일을 수행하고 있을 뿐야. 다만 공공선을 생각하면 체포하지 않고 같이 협력하는게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거고." 여자가 말했다. "난 널 체포할 법적 권한과 무력을 가지고 있어." "무서워라." 남자는 말했다. "체포는 언제까지 연기되는거지?" 여자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다 말했다. "글쎄." 그리고는 남자의 어께에 손을 얹었다. "한번 신체검사를 해보고 생각해볼까." 어께를 천천히 당겨 남자의 고개를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대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탁하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의 입에 물린 궐련을 조심스래 빼앗아 물고는, 그의 상반신을 더듬었다. 어께. 가슴. 배. 그리고. 천천히, 마치 실크를 쓰다듬듯 흘러내리는 손길을 남자는 거부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믿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그리고 불안한 신뢰인지를 알고 있음에도, 달콤한 솜사탕이 주는 순간의 약속처럼 조심스래 즐기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여자의 손길을 음미했다. 그러다 갑자기, 여자가 속삭였다. "너도 할 생각이 있으면 노력 좀 해보지 그래?"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여자의 상체를 강하게 끌어않고는 여자가 그리했듯, 하지만 남자가 해야하는 것처럼 강하게 애무했다.


 


태양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노을은 이내 푸른 우주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세상은 검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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