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들의 여정

가난은 단순히 재물이 부재함을 이르는 단어가 아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것조차 가지지 못함을 이르는 단어다.

숨쉬는 것 조차, 가난을 안은 자들에게는 사치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난했다. 이 어두운 던전 속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위에 걸친 무구와 지금 당장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톳불의 흔적 뿐이었기에.

그렇다. 우리에겐 희망조차 없었다. 죽어가는 나병 환자조차 잃지 않는 그 희망을 우리는 이 던전 깊숙한 곳 어딘가에 놔두고 말았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습게도, 우리는 목표를 향해 똑바로 전진하고 있었다. 실패일랑 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

제프리가 멍한 눈으로 화톳불을 쑤셔댔다. 꺼져가는 불씨가 겨우 숨이 틔였다는듯 화악하고 밝게 빛났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본디 건조해야 했음에도 마치 옆에서 누군가가 숨을 내뿜는 듯 기분나쁘리만치 축축하고 따뜻한 공기 안에서, 그 불씨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마을에서 떠나온지 도대체 얼마나 지나온거지? 새삼스런 물음을 가슴에 품었다. 버려진 대성당의 밑, 숨겨져만 왔던 이 지하 감옥에 햇빛이 비칠리는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어림짐작으로만 시간을 재왔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우리가 막 여정을 시작했을땐 이에 대해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 전부가 그랬다.

'오늘이 몇일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 그때의 우리는 희망에 가득 차있었다.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써 이 던전을 이용할 희망에 부푼 가슴을 껴안고 부서진 돌바닥을 거침없이 딛고 나섰었다.

우습게도 그때의 우리는 목표가 전혀 같지 않았다. 

정교단의 성기사로써, 고드프리는 버려졌던 대성당을 다시금 되찾으리라 다짐했었다. 잊혀진 성유물을 되찾아 떨어진 정교의 권위를 되살린다 자기 자신에게 약속했었다. 그리하여 승리한 자신이 모두의 모범이 될 수 있길 바라던 그는 그의 방패와 메이스를 높게 치켜들고 이형의 괴물에 맞섰다. 그런 그에게서 후광이 흘러나오는 것을 놓칠 수 있을리 없었다.

허나 날때부터 도둑이었던 아르비드는 고드프리를 비웃곤 했다. 이제와서 무슨 권위냐며, 잊혀지고 모욕된 신을 되살리는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세상에 유일하게 의미가 남는건 번쩍이는 금은과 아름다운 보석밖에 없노라고.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있어서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고드프리가 괴물에게 그리하듯, 아르비드는 던전 곳곳에 숨겨진 함정을 맞서는데에 거침이 없었다. 괴물보다 무서운건 얼마든지 봤다는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란 전혀 없었다. 그렇기 그는 마치 길거리의 양아치를 대하듯 추악한 괴물에 맞섰다.

그런 아르비드와 달리 힐다는 명예를 아는 전사였고, 노련한 군인이었다. 그녀의 칼은 무엇을 베고 찔러야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정확하게 그 행동만 취했다. 그리고 그 정확함은 이따금 상처를 입은 우리들의 몸으로 향해져 치명적일 것만 같았던 상처마져 치료해내고 말았다. 그럼에도 힐다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일확천금을 바라던 아르비드와 다르게, 그녀는 그녀가 받았던 선금과 그녀가 받게될 보수만을 신경썼다. 힐다에게는 신뢰가 있었다. 결코 굴하지 않을 신뢰가 존재했다.

소문에 따르면, 제프리에게 힐다와 같은 종류의 신뢰가 있었을지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하곤 했다. 아니, 그가 인간인지조차 의심하고는 했었다. 사냥꾼은 돈만 아는 사기꾼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는 힐다 못지않게 신의깊은 자였다. 제프리는 이 어둡고 축축한 지옥에 나타난 모든 괴물의 특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를 상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푼돈을 받고서 지금까지 이 저주받은 생명체들을 사냥하고 다녔던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는 돈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알수 없는 시간을 끊임없이 같이 해온 결과,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 서린 증오와 분노가 그 이유를 내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싸움에 이골이 난 그들과 나는 전혀 달랐다. 그들과 괴물 사이 만큼이나, 나는 그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주교는 나에게 성혈이 흐른다 이야기했다. 기적을 이루는 내 기도가 이를 증명한다 말했다. 나도 그것만을 믿고 있었다. 내 이름으로 사람을든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쓰러진 이들을 치유했다. 하지만 나는 속고 있었다. 거짓말은 언제나 그것이 덮고있는 진실보다 순수한 것이다. 진실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쌓아온 죄를 인식할 수 있었다. 속죄해야했다. 속죄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던전으로 향했다. 끝모를 산지옥을 정화하기 위해서. 혹은 내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서.

허나 우리는 금새 깨닫고야 말았다.

모두 부질없었다.

고드프리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화톳불조차도 부질없는 어두운 묘실 안에서 그는 내 눈길을 눈치채고는 으르렁대며 손 안에 쥔 무언가를 쉴새없이 뜯었다.

음식은 동난지 오래였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먹어서는 안될 것. 먹을수도 없는 것. 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그것을 물어뜯었다. 마치 내가 그 고기를 빼앗아갈 것처럼. 

나는 그 고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아르비드와 고드프리가 죽도록 싸운적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육포 한조각을 위해서. 고드프리는 그 육포를 빼앗고야 말았고, 남은 음식은 그 후로 그의 말에 따라 분배되었다. 나중에 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육포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그런 고드프리가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힐다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멈춘적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도리는 전혀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가 우리를 저주하지 않기만을 바랬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배에서 쏟아진 내장을 꿰매도록 한 이후에 그 바램은 더더욱 깊어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내 기도 덕이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럴법 했다.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돼. 더 이상은, 제발.'

나는 주교가 내게서 감춰온 진실을 발견했을 때 이상으로 공포에 질렸다. 간신히 토악질을 참고서 마치 아무말도 듣지 못한 것 마냥 다시 싸움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시작된 그녀의 중얼거림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나는 그때 깨달은 것이다. 이 곳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은 죽음임을.

그나마 순전히 아르비드 때문에 나는 아직 저들만큼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중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서 자기 할 일을 훌륭히 해냈기 때문이다. 몇번이고 잃을법한 목숨을 아르비드로 인해 건졌었던 나는, 그로인해 저주받은 존재 앞에서도 재정신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종이 한장의 얇고 아슬아슬한 차이일 뿐이었지만.

우습게도, 맨 처음 만났을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이 여정에 동참한 것은 분명 유별날 정도로 뛰어난 기술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하는 아르비드가 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놀라운 일로 가득찬 법이다. 신을 향한 믿음이 조금씩 닳아갈수록, 아르비드를 향한 신뢰는 조금씩 커져만 갔다. 나는 어느새 악의섞인 그의 농담과 조롱마저도 능숙하게 포용할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생긋 웃었다. 아르비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다시 웃어보였을 뿐이다.

"뭘 바라보시는겁니까, 코르넬라?"

제프리가 물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웃기는 농담이군요."

나는 답했다. 아르비드도 소리없이 웃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것 처럼, 제프리는 숨을 잠시 머금었다 금새 내뱉고는 손질하던 석궁에 다시 눈을 돌렸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제프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다음의 싸움을 준비하며 고요히 집중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런 그가 가장 냉정하고 그렇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착각임을 금새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던 것이다. 희망을 바라지 않았었던 것이다. 이토록 광기에 물들기 직전에서야 나는 겨우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는 가난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말해, 그는 살아감에 있어 희망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프리는 알고 있었다. 싸움 다음에 다가오는 것은 또다른 싸움뿐이라는 것을. 그런 끝없는 싸움의 반복 속에서 희망은 불필요한 것임을.

때문에 그는 우리의 마지막 싸움을 목전에 두고서 취하는 마지막 휴식에서조차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끝이 다가왔다. 눈 앞의 전투가 지나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고 대성당은 다시금 휘황찬란하게 부활할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나?

희망없는 승리에 대체 무슨 의미가?

그 물음은 우리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 

그저, 이 마지막 싸움을 한시빨리 넘길 수 있기만을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