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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서지는 왕

Nake 2016. 5. 16. 00:08



"아! 왕이여! 


오, 위대한 왕이여, 검을 든 우리들의 왕이여! 전쟁을 이끄는 강인한 왕이여!


오, 위대한 왕이여.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타오르는 당신의 거구가 우리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 벽 너머의 악의로부터 저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검은 강철로 주조된 당신의 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오, 위대한 왕이여. 그리고 또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베어넘긴 수많은 거한의 갑옷과 그 사이에서 솟아오른 끈적한 선혈을. 그리고 그 선혈이 닿은 땅으로붙어 새어나온 역겨운 냄새를. 저는 이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 위대한 왕이여.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경배합니다. 피와 내장으로 얼룩진 전장에 서서 저희가 아닌 저희가 나아설 미래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디딜 평야를 둘러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 위대한 왕이여. 저는 본디 나약하고 미천한 수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시 고개를 들어 왕의 존안을 마주 뵐 자격조차 없는 수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런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사명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 위대한 왕이여.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희는 언제나 성벽 위에 서서 당신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합니다. 성벽 위에서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돌아오길 위대한 신께 기도드립니다. 그때 저는 언제나 바라볼수밖에 없습니다. 수천배에 달하는 적을 대검 한자루로 베어넘기고 그들이 쏘아내는 마창과도 같은 화살을 온몸으로 견디는 당신의 위대한 모습을.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면 다시금 나아서지 않습니까.


오, 위대한 왕이여. 그렇기에 저는 당신의 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 위대한 왕이여. 그렇기에 연민을 가지지 마십시오. 노을진 전장에서 누군가 당신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집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이 당신의 눈물에 의해 씻겨나갔다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그 눈물이 구하지 못한 신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이 몰려오는 적에게 대한 경의의 의미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연민은 버려야합니다. 그대의 위대한 힘은 아직 베어 죽이지 못한 적들과 아직 살아있는 저희들만을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 위대한 왕이여. 그렇기에 연민을 가지지 마십시오. 제가 맞이하게 될 희생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부탁하는 것입니다. 연민을 가지지 마십시오. 아직 남은 과업을 위해 지금은 연민은 참고 견디셔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 위대한 왕이여. 제 말들이 제 미천한 주제를 넘어선 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해야하는 것은 당신을 보좌하는 성기사과 대주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당신을 수호하게 될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기에, 저는 말하겠습니다. 왕이여. 살아남으십시오. 싸우십시오. 그리고 연민을 가지지 마시고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오, 위대한 왕이여. 제 목숨이 그대의 새 살이 되어 이 왕국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가져다주길 바랍니다.


오래된 신과 새로이 떠오를 위대한 태양의 이름을 빌어 기도드립니다."


기도를 마친 수녀는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 옆에 있던 거한의 사내가 수녀의 목을 들고있던 거대한 검으로 내리쳤다.


인간의 몸은 본디 쉬이 잘리지 않지만, 검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거한의 힘 때문이었지, 아니면 몇번이고 반복한 처형인의 노하우 때문이었는지 단번에 수녀의 목은 잘려나가 양동이에 담겼다.


두건을 쓴 수도사가 재빠르게 그 양동이를 치우고 새로운 양동이를 받쳐,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받았다.


살짝 경사지게 설치된 수녀의 침대 때문인지, 수녀의 선혈은 심장이 활동을 멈추고도 이내 몇분동안 끊임없이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곧 끝을 맞이했다. 두건을 쓴 수도사는 이를 확인하고는 피가 든 양동이를 들고 바로 옆에 있는  왕에게 향했다.


상의를 입지 않은 왕은, 마치 명상을 하듯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허리를 펴고 고르게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그의 몸에 난 수많은 흉터는  왕이 숨을 들이쉴때마다 춤을 추듯 꿈틀거렸다. 


셀수없는 수천의 크고 작은 흉터 사이에는 아직 흉터조차 되지 못한 깊은 상처 또한 자리잡고 있었다. 거칠게 베이고 날카롭게 찔려 뜯겨진 살갗이 노골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그런 상처에 이미 익숙해졌다는듯,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수도사는 그런 왕의 등뒤에 다가가 목조 계단을 가져다 놓고 올라갔다. 그제서야 그는 지금껏 올려다봐야 했던 왕의 머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수도사는 그렇게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그럼과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수녀의 피를 부었다.


고르게 흘러내린 수녀의 피는 왕의 등 뒤와 앞을 타고 수많은 상처와 흉터를 적셨다.


왕은 조용히 수녀의 기도를 떠올렸다. 


딱지조차 생기지 않은 상처가 수녀의 피와 닿자 매일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검은 불꽃이 환부에서 피어올라 상처를 지졌다.


왕은 그 불꽃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살이 타는 냄새가 방 안에 가득찼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개의치하지 않아했다. 그저 고요히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피로 세례된 왕은 그제서야 그의 눈을 떴다.


그는 수녀를 등지고 앉아있었기에, 그의 눈에는 수녀의 주검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왕은 창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창 밖에는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찬란히 빛나는 태양. 언제 봐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태양으로부터 비롯된 햇빛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초원을 비추었다.


썩지 못한 사람들의 주검과 검게 굳은 피가 범벅이된 검붉은 초원을 비추었다. 


왕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흉터밖에 남지 않은 왕의 단련된 육체가 단단히 부풀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뉘인 자신의 검은 대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전장을 응시했다.


또다시 나아가야 할 전장을.


피를 흘려야할 전장을.


그는 눈물을 흘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 피가 흘러야하는가.


그렇게 남의 피를 뒤집어쓴 거구의 사내는 또다시 초원으로 향했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대검과 채 꺼지지 못한 불씨를 두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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