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의 무개념 분지

멸망을 걷는 자 본문

소설

멸망을 걷는 자

Nake 2016. 3. 22. 10:50




'이번에도. 또다시.'





그 세계는 거대한 잿빛 공터와도 같았다. 그 공터는 끝이 없어서, 말 그대로 공터가 하나의 세계였고 세계가 하나의 공터였다. 하늘 아래 땅 위 공터가 아닌 곳이 없었고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불타 불씨마져 모두 스러져 사라진 재의 황무지였다. 이 세계가 어찌하다 이러한 모습을 취하게 되었는지, 그 이전엔 어떠한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저 공터 밑 깊숙한 땅 속에 파묻혀 살이 썩어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곳에 한 이방인이 당도했다. 땅과 구분가지 않는 침침한 잿빛 하늘 아래, 그 이방인은 소용돌이 비슷한 것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허공에서 나타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등장이었다. 먼지구름이 걷힌뒤 드러난 이방인의 모습은 독특했다. 성인 남성이라고 하기엔 작은 키의 체형에 자신의 몸보다 몇 사이즈는 커 보이는 군용 웃옷을 걸쳐입고서, 한눈에도 급조한 티가 나는 장구류를 착용한 모습은 누가 봐도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복장에는 나름의 규칙이 존재했으며, 그 규칙에 따르면, 이방인의 드레스코드는 시대의 패션에 완벽하게 부합하고 있었다. 


그 이방인은, 방독면을 벗지 않은체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검은 두 눈의 렌즈 안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이방인의 표정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허나, 주위를 둘러본 이방인이 갸우뚱거린다는 사실만은 그 몸짓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방인은 말했다.


"이상하네. 또 여기야?"


물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혼잣말은 이미 공터의 행성에 고요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한달이 지나면 미풍이 되어 이 자리에 다시 도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같은 세계에 반복해서 도착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니..."


그리고서, 허리춤의 주머리에 들어있던 기계를 꺼내들었다. 손 한뼘보다 살짝 큰 크기의 기계에 달린 안테나로 주위를 훑어보듯 팔을 차분히 흔들었지만, 기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체 멍청히 화면만 점멸할 뿐이었다.


“뭔가에 이끌리는건가? 생체신호는… 없는데. 닮았다고 하기엔 소름끼치게 똑같아보이고..."


곧, 이방인은 이 세계가 자신이 알던 그 세계가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미친듯이 넓기만한 공허한 세계에 자신이 버려두었던, 완전히 부서져버린 권총을 바닥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비록 녹이 슬고 먼지가 양껏 쌓여있었지만 손질하기 어려웠던 그 독특한 구조를 보고서는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방인은 자신이 저번에 이곳에 온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용무가 끝나면 무언가에 쫓기듯이 세계를 이동하던 이방인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알 수 없는 시간 끝에 이방인은 다시 이곳으로 왔다.


그렇게 무릎을 꿇은채로 생각에 잠겨있다, 이방인은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멀리 던지고는 팔을 치켜들었다. 또다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 거친 바람이 멎었을때, 이방인은 더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방인은 또다시 그 세계에 도착했다. 그 투박한 부츠가 땅에 닿았을때, 이방인은 마치 무너지듯 쓰러졌다. 허둥지둥대며 얼굴을 덮고 있던 방독면을 거칠게 벗어던졌다. 그 속에서, 검은 재와 끈적한 타르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소녀의 여린 얼굴이 드러났다.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표정을 하고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녀의 얼굴 말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도착한 이 곳이 안전할지 어떨지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은체, 이방인은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마냥 거칠게 산소를 갈구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양껏 들이킨 숨을 내뱉을때엔, 격통을 억지로 참아내려하는, 그렇게 견디려 하는 이방인의 신음소리가 섞여있었다.


“끄으하앗… 으흐읏…"


소녀는 가슴팍의 칼주머니에서 투박하게 커다란 단검을 꺼내더니, 시뻘건 피를 한껏 머금은 허벅지의 옷을 잘라냈다. 그 밑의 거친 피부는 끈적한 피로 범벅되어 어디를 다쳤는지 알 수 없었기에 등에 멘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그 안의 액체를 상처 위에 부었다.


“끼야학! 으-흐하악!"


온몸을 비틀며 고통을 참아내려한 그녀였지만 머리를 뒤흔드는 격통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온몸의 근육을 뒤틀어가며 내는 그 비명은 공허한 세계에 울려퍼졌다. 탁하게 풀린 눈동자로 고통에 몸부림칠때야 비로소 그녀의 눈에 이 세계가 들어왔다. 다시금 이 텅 빈 세계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기에 이방인은 이를 무시했다. 끈적하게 달라붙은 피를 모두 씻어냈음에도, 총알이 만들어낸 구멍으로부터 펌프질치듯 선혈이 뿜어져나왔다.


이방인은, 상처 부위를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피가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통 속에서 숨을 들이키고는, 눈을 꼭 감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상처 안에 집어넣은 뒤 벌렸다. 그 고통이 뇌에 전해지기 전에, 이미 왼손에 쥐고 있던 막대기를 상처에 꽃아넣은체, 막대 끝의 버튼을 눌렀다. 프쉭하고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막대기 안이 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납덩어리가 툭, 하고 허벅지에서 빠져나와 투명한 막대기의 끝에 걸렸다. 이방인은 그 탄환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피를 늦기전에 지혈하고, 상처 또한 봉합해야했다.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소녀는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또 마지막이 될 리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총을 겨눌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소녀는 고통으로 희미해져가는 의식 아래에서 생각했다.


그랬기에, 순간 발소리가 정면에서 들려왔을때 소스러치게 놀란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권총을 꺼내들어 겨눈 것은 수많은 경험과 그 결과로 학습되고 또 각인되어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건, 단순히 팔 근육에서 시작된 힘이 손가락까지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손가락은 커녕 지금의 그녀로써는 견디지 못할 무거운 총을 집어든 팔을 겨우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총구는 그 무엇도 노리고서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총구 앞에 서게된 흰 옷을 입은 소녀는, 자신에게 겨눠지려 하는 그 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총에 능숙한 군인과 같았다. 하지만 그 소녀가 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총에 익숙했기 때문이 아닌 것은 자명해보였다. 오히려 그 소녀는 총이라고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보였다. 그 가설만이 지금 소녀의 행동을 훌륭하게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유가 어찌됬건, 흰 옷을 입은 소녀는 이방인이 거닐었던 다른 세계와도 같이 이 세계가 맞이한 종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마냥 새하얀 원피스와 향기로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떨리는 총구 앞에서. 


“꺼-꺼져."


이방인이 말했다. 이미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의식 속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말했을 뿐이었다. 소녀는 답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그 소녀는, 흐려져가는 시야 속에서 입을 움직였다. 그것이 이방인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본능에서 비롯된 필사적인 외침이었는지, 이방인은 결코 알지 못했다.


“-계속 서있을거면, 돕던-흐윽-!"


하지만 그 문장이 어떤 심정에서 비롯되었건, 이방인은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소녀에게 닿았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세상이 빛을 잃었다.


 


 


어째서 흰 옷을 입은 소녀가 상처입은 이방인을 도운걸까? '상처입은 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타인에 대한 신뢰를 아직 잃지 않은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탄탄한 사회가 아닌 세상에서는 양심이란 이름의 미덕이 이방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종류의 미덕임을 모른다. 숨을 쉬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모든 것을 잡아먹어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밖에 학습할 수 없는 야만적인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에 비해, 그들은 너무 과분한 축복을 받은 것을 모른다.


이방인은 그런 축복을 받지 못했다. 축복받은 아이가 양심과 배려를 배울 나이에, 그녀는 살아남는 법과 죽이는 법을 배웠다. 그랬기 때문에 이방인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응급처치가 전부 끝났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허벅지에 감겨진 붕대를 보고서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이, 자신이 죽었고 이 모든게 환상일 거라는 변명일 정도였다. 그래야만, 그녀의 사고방식이 이 비논리적인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기분나쁜 대기의 냄새와 언제나처럼 공허하고 매마른 대지의 흙, 그리고 뼛 속 깊이 각인된 총상의 고통이 허황된 이론을 그 즉시 반박했다. 


이방인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익숙해진, 수없이 반복하며 숙달한 응급처치를 결국 무의식 속에서 해내고 만 것일까? 말도 안되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몸에 난 흉터가 몇개인지도 잊어버린지 오래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몸에 난 구멍에 의료용 스테이플러를 박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이방인은 믿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그럴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방인은 눈 앞의 소녀가 아무 이유없이 자신을 치료했다는 사실을 믿느니, 차라리 그런 거짓을 따를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소녀가 이방인을 치료했다. 그 사실을, 이방인은 오랬만에 맞이한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서 천천히 납득하고야 말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소녀는 지금 이방인의 곁에 순수한 얼굴로 앉아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순수해서, 타인에 대한 신뢰가 결여된 세상에서 자라난 이방인마저 무심코 안심하게 만드는 얼굴을 하고서. 그것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종류의 얼굴이었다.


그래. 그 소녀는 실재한다고 믿기엔 너무나 환상에 가까운 소녀였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열댓살이 갓 되어보이는 어린 소녀가 티없이 깨끗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생체기 하나 나지 않은 체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방인은 정말 잘 알고 있었다. 그 소녀는 명백하게 거짓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거나. 


하지만 오히려 그 소녀가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다는 결론에 다다랐기에 이방인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방인은 안심했다. 그녀에겐 포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이방인은 자신의 옆에 앉은 소녀를 바라보며, 권총을 쥔 손의 힘을 풀고 그대로 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소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넌 누구야?"


소녀는, 그 용모만큼이나 맑은 목소리로 즉각 답했다.


"난 나야."


"너라니?"


"나야. 아마도? 나는 나겠지. 당연한거 아닐까?"


이방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름은 없어?"


"이름? 그게 뭔데?"


"다른 사람이 너를 지칭하기 위해 붙여준 명칭말야."


"다른 사람?"


"그, 아니다. 됬다."


"이름이라는거, 너도 가지고 있는거야?"


예상치 못한 물음에, 이방인은 놀랐다.


"어? 어, 뭐, 그렇지."


"그래? 그럼 나도 갖고싶어. 나한텐 없는거잖아?"


"이름을 달라고?"


"응."


"미안하지만, 난 너와 일면식이 없는 낯선 이일 뿐이야. 이름은 낯선 이가 주는게 아니라 네게 중요한 사람이 주는거고. 예를 들자면, 널 낳은 사람이라던가."


"음-"


소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거 없는걸."


이방인은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던 소녀의 정체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생체 신호를 탐지하는 레이더가 지금도 품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이방인은 억지로 다시 떠올려야 했다.


"이름을 지어주면, 날 놓아주는거지? 난 이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나에겐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기에 이방인은 최대한 소녀에게서 빨리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놓아주다니? 난 널 붙잡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너 말고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게 없는걸."


"네가 있잖아?"


"나는 곧 이 세계를 떠날거야. 이번에도. 또다시. 수많은 세계를 뒤로 했듯, 이 세계도 뒤로하고 떠나야만 해."


"날 내버려두고? 너무해에."


소녀의 목소리는 너무하다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방인은 이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이방인은 소녀의 정체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응? 이름을 줘. 제발요..."


"갑자기 왜 존댓말을 쓰는거야..."


어쩔수 없는 것 마냥, 이방인은 생각했다. 허나 이방인은 이름을 짓는데 능숙하지 않았다. 사람은 물론 물건에도 애착을 가진 적이 없어서, 용도를 다하거나 어딘가 고장나 대체품을 찾게되면 지체없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렸다. 그래서인지 이방인은 소녀의 이름을 궁리하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들였다.


"...루치아."


이방인은 자신의 빈약한 기억을 뒤지던 도중, 우연히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루치아? 그게 내 이름이야?"


"아, 아무것도 아냐. 내가 알던 사람의 이름이지. 너하고는 안어울려. 넌 전혀 루치아스럽지 않은걸. 넌 뭐랄까, 좀 더..."


"좋아! 루치아! 루치아가 좋아!"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이방인은 당황했다.


"아니, 루치아는 아니래도. 내가 아는 루치아는, 혼자 식량을 축내는 걸신들린 욕심쟁이였어. 남을 이간질하고, 물어뜯고, 결코 양보하지 않는 여자였지. 공동체가 습격당했을때 약탈자들에게 가장 먼저 버림받은 이유가 있는걸. 그 이름은 좋지 않아."


양손을 내저으며 정색할만큼 루치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인의 행동은 이방인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미신일진 몰라도, 이방인이 그 이름조차 기피할 정도로.


"루치아! 루우치아! 재밌는 이름이야! 발음이 재밌어! 루우우~차!"


하지만 소녀는 그 이름에 개의치 않는듯 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라는걸 이방인은 조금 뒤늦게 알아챘다. 소녀에게 루치아가 나쁜 이름일리 없었다. 사실, 나쁜 이름 같은게 있을리 없었다.


"있지있지, 루치아라고 불러줘! 응? 루치아라고 불러줘!"


허나 이방인에겐 아직 그 이름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기에, 볼을 붉게 물들이며 흥분한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소녀를 보고서도 그 이름을 발음하는데에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루치아?"


하지만 결국 그 단어는 입 밖으로 나왔다. 예상외로,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응응! 내가 루치아에요! 히히히!"


소녀는, 루치아는 베시시 웃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웃는걸 본게 언제였었지? 이방인은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였다.


"있잖아 있잖아, 이야기해줘! 루치아는 어떤 사람이었어? 루치아라는 이름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거야?"


이때 이방인은 루치아를 놔둔체 떠날 수 있었다. 이 세계를 등질 수 있었다. 이 곳에 그녀가 찾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밝혀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백개의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처음으로 이 소녀 앞에 서고서야, 이 세계를 떠나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시간에도 어떤 세계는 손쓸새 없이 멸망하고 있음에도, 여인은 후회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이방인은 편안함을 느꼈다. 안락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방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별거 아닌 이야기였다. 루치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인 만큼이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는 빈약하고 초라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루치아의 표정만큼은 극적으로 행복하게 변화했다. 문득 이방인은 사람이 북적거리던 세계에서도 이렇게 오랬동안 말을 했던 적이 없었다는, 보잘 것 없는 사실을 떠올렸다.


"고마워!"


이야기가 끝나자, 소녀는 말했다.


"별거 아냐. 그냥 이름인걸."


"하지만 나에겐 없었던거야. 이름도, 그 이름이 가진 이야기도... 정말 고마워."


어딘가 애절함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이제 갈거지?"


당연했다.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다. 얼마나 편안하든 그녀는 결국 이 세계를 떠나야했다. 그 이를 구할때까지. 쉴새없이 나아가야 했다. 


"그래."


그래서 이방인은 답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또 올거야?"


아니, 라고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곧 이방인은, 그것이 자신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이방인은 루치아의 세계에 세번째로 발을 딛었다. 네번째, 다섯번째가 오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방인은 바빴다.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때문에, 일말의 가능성에 걸고 루치아에게 희망을 줘서는 안됬다. 그게 최선이었다.


"아마도?"


하지만 이방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긍정의 가능성이 섞인 대답을 들은 루치아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부푼 뺨이 발그레 상기되어 하얀 피부와 대조되었다. 어린 아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미소였다. 그런 소녀 앞에서, 이방인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냉철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자라난 여인이라도, 루치아의 미소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루치아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이방인조차 몇번이나 이곳에 도착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젠 그녀가 이방인인지조차 모호했다. 루치아에게 이름이 주어지고도 몇번이고 이 땅에 당도했던 이방인은, 이제는 명실상부한 한명의 주민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도착이 당연하다는 듯 루치아가 달려와 이방인을 팔벌려 맞이했다.


반갑다는 인사와 고맙다는 답변. 그것은 그녀가 이 세계에 도착할때마다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또 반복됬다. 이제 이방인에게 루치아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공허한 세계에 반복해서 도착하게 되는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더이상 이유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얻게된, 그동안 결코 가지지 못했었던 안식에 만족할 뿐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그녀는 이 세계에 당도했다.


그렇게 이방인이 도착하고 떠날때마다 공허한 세계는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갈라진 천장에서 비가 새는 것처럼, 그녀가 가져온 이야기와 이야기를 담은 물건들이 루치아를 위해 남겨졌다. 드문 일이었다. 이방인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서 물건을 내준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잠시의 휴식을 가지고서 이방인은 언제나 다시 길을 떠났다. 소용돌이가 몰이치고, 루치아는 홀로 남았다.


이방인은 떠나야했다. 


이번에도, 또다시.


 


 


이방인은 쓰러졌다.


피를 흘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먼지투성이가된 군용파카를 걸치고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넘어질 뿐이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누워있었다.


루치아가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다가와 이방인 곁에 앉아 이방인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루치아는 이방인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방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도대체 몇번을 반복해야 하는거지."


침묵.


“도대체 몇번을 놓쳐야만 하는거지. 그만. 멈추고 싶어."


정적.


“이번엔 정말 가까웠는데. 그를 잡을 수 있었는데. 구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구하지 못했어. 또다시 놓치고 말았어. 언제나처럼."


고요.


“이젠 모르겠어. 마법사가 되지 말걸 그랬어. 소원을 빌지 말걸 그랬어."


그리고, 신음에 가까운 독백.


"널 만나지 말걸 그랬어. 처음부터."


이방인은 흐느꼈다.


"포기하겠어. 포기해야겠어. 더이상은 나아갈수 없어. 다시는 네가 죽는걸, 내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걸 느끼고 싶지 않아. 난 너를 죽이기 위해 이 힘을 얻은게 아냐. 수백, 수천명의 너를 죽이기 위해 이 힘을 얻은게 아냐."


그 흐느낌은 조용했다. 그녀가 가져온 물건으로 조금이나마 들이찼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공허한 세계에 울림조차 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흐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로써 충분했다. 이제는 얼마나 됬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여정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던 후회와 고뇌가, 그 흐느낌으로 실체를 지닌 하나의 진실이 되어 그녀에게 닥쳐왔다. 마치 뒷통수를 후려치듯 상상의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그로인해 목이 꺾인 것 마냥, 이방인은 고개를 숙인체 들지 않았다. 


루치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분명 말을 했다. 하지만 이방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올리 없을 말이었다. 그것은 어떤 이름이었다. 오래전에 사용되었었던 이름이었다. 너무나 오래되어서, 분명히 들었음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낯설었던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계속 누워있을거야?"


그리고는 말했다.


"응."


어둡게, 이방인이 답했다.


"선물이야, 루치아.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은 바로 나야."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경직된 미소를 한 체 루치아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해. 구할 수 없어. 내가 한걸음 나아갈때마다, 내 사랑이 죽어가. 사랑을 구하기 위해 한 선택이, 내 사랑을 죽이고 있어. 그렇게 될 바엔,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는 수많은 그 이를 찾아나서지 않겠어. 나는 남겠어. 그래야만 그 이가 살수 있을거야."


이방인은 웃고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 눈물은 더러운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떨어져 고개 밑의 대지를 적시고야 말았다. 


"나아갈수 없어. 나아가선 안돼. 나아가지 못해. 그러니까 남겠어. 나와 함께 있자, 루치아. 기분좋지 않아? 아무도 구할 수 없는 나는 이런 공허한 세계에 갇혀 차갑게 식어가는게 나아."


하지만 루치아는 차갑게 대답했다.


"떠나."


이방인의 눈에는, 그렇게 말하는 루치아가, 화나있는 듯 했다.


"여긴 공허한 세계가 아냐. 멍청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라고. 이 곳은 더이상 네가 맨 처음 발을 딛었던 공허한 세계가 아니라고. 여기엔 네가 남긴 추억이 있어. 이야기가 있어."


격앙된 어조의 긴 문장을 루치아가 내뱉자 이방인은 충격에 빠졌다.


"여기엔 네가 있어. 여긴 너로 가득찬 세계야. 네가 이 세계를 만들었어."


그제서야, 이방인은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물건들이, 시야 끝에 자리잡은 지평선까지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분명 이방인이 주었던 물건들이었다. 그 선물들이, 그리고 그와 함께 주었던 이야기들이, 발길이 닿지 않을, 대신 시선만이 닿을수 있는 곳까지, 마치 원래 거기 있던양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네가 있을 공간은 없어. 비참하게 괴로워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가 이룬 것에 눈길을 주지 않는 멍청이가 있을 자리는 없어. 이 세계는 쉬지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방인의 세계니까. 단지 하루, 한시간, 일분만이라도 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두고 떠나가는 사람의 세계니까."


그리고, 루치아는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넌 이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해. 다른 수많은 세계에서처럼. 너는 사신이니까. 이야기의 종말을 가져오는 사신.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끝나야하고, 그건 결코 나쁘지 않아. 끝나야만 시작하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그리고 언젠간 네 이야기도 끝날테지. 하지만 그건 여기가 아니야. 이 세계가 아니야."


이방인은 침묵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어떠한 결말에 다다랐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일어났다는 점 뿐이었다.


재와같이 칙칙한 이 세계의 흙이 그녀의 군용 파카의 앞면에 진득히 묻어있었다. 이방인은 그 재를 손으로 몇차례 내쳐 털어내었다. 먼지가 일었다. 이방인은 곧 옷깃으로 눈을 닦았다. 눈물 대신 재와같은 흙이 잔뜩 묻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이를 한번 더 만날 수 있다면 뭘 바칠 수 있지?"


물음에 이방인은 답했다.


"모든 것."


"그럼, 떠나."


이방인은 눈을 떴다. 흙먼지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그곳에 루치아는 없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허공에 대고, 이방인은 말했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하지만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 이방인의 눈물이 고였던 자리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생겨났다.


타다못해 완전히 연소한 새하얀 재와같은 그 황무지 위에 씨앗이 싹텄다.


이방인이 남기고간, 하지만 그녀는 결코 보지 못할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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