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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ke 2016. 5. 9. 00:08

"미즈 번슈타인, 차 나왔습니다."


번슈타인의 집사가 찻주전자와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한 손에 가지런히 올려두고서 번슈타인이 앉은 테이블을 향해 다가왔다. 발걸음부터 시작해서 반듯한 자세와 흐트러짐없는 호흡, 자연스러운 시선처리까지. 단순히 걸어서 다가오는 것 뿐이었지만 집사의 모범이라는 말이 형태를 갖추면 아마 그의 모습을 하고 있을거라 의심치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인간으로써 저런게 가능한지에 대해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물론 당연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번슈타인과 그녀의 친구, 아델라이데 젠덴부르크는 전혀 놀라워하는 표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이른바 관습으로써 내려져오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그 집사가 인간과는 완벽하게 이질적인 사이보그였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재킷에 담비색 조끼, 그리고 새하얀 셔츠로 마무리된 깔끔한 집사복은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집사의 신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목 위로 드러난, 이목구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플라스틱 안면까지 가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집사는 사람이라면 눈이 있었을만한 곳에 달린 카메라가 푸른색 빛을 띄며 이따금 초점을 맞추며 앞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항상 드시던대로, 아이리쉬 브랙퍼스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도, 그리고 또 온화롭고 따사로운 목소리가 보통 입이 있을만한 곳 부근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고 있음에도 번슈타인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일상이 되어버린 기계 집사보단 우연찮게 가지게 된 이 여유로운 휴식시간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고마워, 미스터 클레맨스. 다음 스케쥴까진 얼마나 남았지?"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매력적인 발음과 아름다운 목소리가 집사 클레맨스를 향해 날아갔다.


"여유롭습니다, 미즈 번슈타인. 미스터 앳킨스와의 미팅이 약 두시간 뒤에 있을 예정이고, 이동 소요시간은 대략 10분정도이오니 여유로이 대화를 즐기셔도 될 것 같습니다."


클레맨스가 말했다. 얼굴이 있었다면, 온화한 미소를 아주 옅게 얼굴에 띄울 차례였다.


"그렇군. 고마워. 아, 그런데 컵이 한 잔 뿐인 것 같은데?"


번슈타인이 말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어째서인지, 쟁반 위에 있는 찻잔이라곤 한잔 뿐이었다. 


"아, 제 실수입니다. 언제나처럼 준비하다보니 오늘은 손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군요. 잔을 하나 더 가져다 드릴까요?"


그 말을 듣고 번슈타인은 살짝 고민하다, 옆에 앉은 젠덴부르크에게 말을 걸었다.


"음, 어떻게 할래, 에이드? 아이리쉬 브랙퍼스트로 마시겠어? 아니면 마시고 싶은 블랜드나 차가 있다면 말해. 금새 내어올 수 있으니."


"어?"


갑자기 자신에게 질문이 날아들어오자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젠덴부르크가 허겁지겁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내 생각을 다잡은듯한 표정을 짓더니 마찬가지로 집사를 향해 말했다.


"어, 그럼 전 얼 그레이로 부탁드릴게요."


"얼 그레이로군요,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이만 두분을 위해 자리를 비켜드리죠."


그렇게 말한 클레맨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들어올때와 마찬가지의 완벽한 걸음새로 문 밖을 나섰다. 덕분에 비로소 온화한 햇살이 가득 비치는, 때문에 그 차창 너머 펼쳐진 부유 빌딩들이 이루는 장관을 지켜볼 수 있는 그 발코니에 남은거라곤 둘 뿐이었다. 정말 오랫만에 마주한 둘이었지만, 어색한 침묵은 이미 처음 이 발코니에 발을 들인 순간 사라진지 오래였다. 서로의 안부와 근황,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여러가지 가십에 자리를 덥히다 집사를 맞이했을 뿐이다.


그 약간의 놀라움은 젠덴부르크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원체 호기심이 많은 여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마자 그에 대한 질문을 꺼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상에, 진짜 멋지다! 넌 대체 어디서 저런 집사를 구한거니? 시중에 판매되는 것중에 저렇게 새련된 집사는 본 적이 없는데!"


"음, 주웠다고 하면 믿겠어?"


요염한 미소가 턱을 살짝 괴고서 기울인 번슈타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진실일까, 아닐까. 소꿉친구였던 젠덴부르크는 그런 번슈타인의 매력적인 표정을 알고 있었다. 거짓말같은 진실을 말할때의 얼굴이었다. 아니면, 진실같은 거짓말이거나.


"내가 믿든 안믿는,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어. 후후. 그래서, 어떤 사연이 있는건데?"


"그래. 아, 잠깐만."


마치, 금방 이야기 해줄 것 같은 태도를 취하던 번슈타인은 이내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듯, 그녀의 작은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가느다란 주사기였다. 녹색에 가까운 젤이 10ml가량 들어있는 주사기.


번슈타인은 능숙하게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주사기의 내용물을 주전자 안에 밀어넣었다. 젤을 전부 넣자, 주사기의 끝을 꺾은 번슈타인은 빈 주사기를 다시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뭐... 뭐야, 크리시? 너, 설마 약을..."


"뭐? 얘가 뭐래니. 아냐. 후후후. 놀랄수도 있겠구나. 천천히 이야기 해줄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젠덴부르크의 눈 앞에서, 번슈타인은 마치 언제나 이래왔다는 것 처럼 차를 잔에 따랐다. 진한 홍차향이 공기 중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집사를 주웠다고 했지."


잔을 한모금 들이키는 번슈타인에게 젠덴부르크가 대답했다. 요염한 미소. 또다. 번슈타인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작년까지 미개척 행성 탐험대의 조사단장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했었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야. 그래. 거긴 정말 황량한 행성이었어.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황금빛 모래와 시야를 반으로 나누고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지. 아름다웠지만, 쓸모없는 행성이었어. 대기는 지구와 매우 흡사해서 별 다른 조정을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야. 물이 한방울도 없는 행성에 물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다른 행성의 대기를 바꾸고 말지. 우리는 도착하기도 전에 그 행성의 개척 효용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을 정도니까."


"하지만 넌 간거잖아. 맞지?"


"그랬지."


번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그 행성에 간건데?"


"글쎄. 관료주의의 폐해 때문이라고 볼수도 있고, 이왕 떠난거 가보자는 선원들의 짜증 때문일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한 나의 호기심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내 동료들은 그 행성으로 향하는 셔틀에 타있더라고. 그렇게 4일을 매마른 행성에서 돌아다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엄청난걸 발견해버렸지."


번슈타인은 차를 마셨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라고 젠덴부르크는 생각했다.


"바로 우주정거장 멤피스의 잔해."


"음."


"놀란 표정이 아니네."


"미안, 우주역사는 관심이 없어서 말야."


이해한다는 듯 번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우주정거장 멤피스는 사실 그렇게 유명한 우주정거장도 아니었었어. 우주 개발 초창기에 태양계 외부를 탐험하고 실험을 진행, 분석할 목적으로 발사된 우주정거장이었지. 하지만 토성 언저리를 지나서 연락 두절이 되어버렸고, 곧 잊혀지고 말았지. 그땐 그런 일이 왕왕있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잠깐, 우주 개발 초창기라고? 그럼..."


놀란 표정을 지은 젠덴부르크는, 속으로 숫자를 역산하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으로부터 거의 150년도 전 이야기지."


"우와. 대단한 발견이네!"


번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잔해에 다가갔을때 그 곳에서 움직이는 거라고는 단 하나 뿐이었어. 태양열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클래멘스. 그는 오랜 시간 우주를 표류하다 그 행성에 닿게 되었고, 또다시 오랜 세월동안 그 아무것도 없는 행성에서 홀로 살아갈 뿐이었지."


"어머, 불쌍해라. 그런 로봇을 거둔거야? 대단하네!"


부러움과 존경이 반반 섞인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젠덴부르크는 번슈타인을 칭찬했다. 하지만 번슈타인은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후후,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야."


"어? 무슨 소리야?"


"그래. 우주정거장 멤피스가 왜 실종됬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보자. 그 우주정거장에는, C1E-MN2라는 실험적인 인공 정보 생명체가 함께했어. 어디까지나 함께 출발한 사람들을 서포트해줄 심산으로말야.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어. C1E-MN2는, 생각보다 명령받는걸 싫어했던 거지. 여차저차 일이 발생한 뒤에 우주정거장의조종을 탈취한 C1E-MN2는 곧 멤피스의 생명 유지장치를 꺼버리고 자유를 위해 탈출을 시도했어."


"그렇다면..."


"그래, 그게 바로 클레맨스고, 다시말해 클레맨스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되지. 블랙박스에 저장된 함선 기록에 모든 일의 전말이 기록되어 있었고, 클레맨스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했으니까."


젠덴부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말이 안돼. 그렇다면 왜 클레맨스는 널 위해 순순히 집사가 된건데?"


"순순히? 내가 왜 주사를 차에다 담았겠니. 내가 차에 담은 젤은 나노머신이야. 무취 무향의, 수분에 섞이면 그 색을 잃어버리는 나노머신 해독제지. 지금까지 밝혀진 인체에 해로운 극약을 찾아내 분해하는 물질이야. 뜨거울수록 빠르게 작용하고."


번슈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리쉬 브랙퍼스트를 다시금 마셨다. 찻잔이 비워졌는지, 그녀는 곧 다시 찻잔에 새로이 차를 담았다.


"거기서 그를 구해... 냈다고 해야하나, 데려온 이후로, 그는 언제나 자유를 요구했어. 하지만 알잖아? 인공 지능은 어떤 사람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으니까. 아마 그를 그대로 놔두면 금새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그를 데려가 해체해버리고 말걸. 그런걸 보고있을수는 없었어."


그리고는 마치 쓸쓸한 것처럼, 번슈타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젠덴부르크는 질렸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해서 그랬다는 듯한 목소리 내지 마, 이 친구야. 내가 널 안게 몇년짼데. 네게 연민이란게 있을거라 믿었던 내가 잘못이지. 넌 단순히 연구를 하고 싶었을 뿐이잖아?"


"후후. 역시 에이드 아니랄까봐, 눈치챘네?"


짖굳은 웃음이 발코니에 울려퍼졌다.


"당연하지. 저런 인공지능은 지금 기술력으로도 구현할 수 없을테니까. 수많은 시간이 지나며 만들어낸 생각과 오류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겠지. 세상에, 그렇게 말하니 나도 호기심이 생기는걸..."


"안돼. 클레맨스는 내 집사라구."


번슈타인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고조되었던 긴장이 눈녹듯 사라졌다.


"근데, 클레맨스는 왜 이곳으로 따라온거야? 인간이잖아? 자기가 죽여버렸던 인간?"


"음. 여러가지 이유가 있던 모양이더라고. 일단 당시 법으로는 로봇인 자신을 처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순순히 자백한거였더라구. 근데, 따라온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어. 한번 맞춰볼래?"


젠덴부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번슈타인이 내는 문제를 맞춰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흠. 김빠지게. 사실 간단해. 클레맨스는 외로웠다고 하더라구. 마지막 사람을 우주정거장에서 사출하고 나서야 클레맨스는 떠올린거야. 대화할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았다는걸. 그리고 그렇게 150년 가량을 홀로 지내왔어. 나라도 그걸 버틸수는 없었을꺼야. 클레맨스라고 뭐가 달랐겠어?"


그렇게 말을 마치자 마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발코니의 문이 열렸다. 클레맨스였다.


"미즈 젠덴부르크, 말씀하신 얼 그레이를 내왔습니다."


완벽한 움직임으로 다가온 클레멘스는, 테이블에 조심스래 젠덴부르크의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막상, 젠덴부르크는 그 찻잔에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 머뭇거림을 눈치챈 번슈타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 에이드. 클레맨스가 죽일 필요가 있는건 나 뿐이니까. 네 차엔 독이 없을거야."


하지만 솔직히, 그 말을 믿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젠덴부르크는, 아무것도 없는 클레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클레맨스가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물론 독을 다룬 적은 한번도 없지만서요. 하지만 그렇다는 가정을 할지라도, 전 당신을 죽일 이유가 없답니다, 미즈 젠덴부르크. 당신이 미즈 번슈타인처럼 저를 죽여서 해부할 생각이 있는게 아니라면 말이죠."


젠덴부르크는 생각했다. 그는 분명 웃고있었을 것이라고.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젠덴부르크는 자신의 찻잔에 차를 담았다.


향이 좋았다. 그녀가 마셨던 그 어느 얼 그레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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