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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3 (끝) 본문

소설

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3 (끝)

Nake 2015. 6. 13. 11:49


6.

입술 사이로 억지로 흘려넣은 약이 효과가 있는지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잠자코 기다릴 뿐. 마치 마녀가 그랬듯, 그이의 옆에 앉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끊임없는 미열이 갉아먹고 있는 그를 지켜보았다.

별안간, 그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고통따위 잊은 표정으로 내 뺨을 어루어만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계속 날 만지도록 가만 놔뒀다. 행복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지친 땀냄새를 맡고, 그의 거친 굳은 살이 내 뺨을 스치는 것을 음미했다. 그의 체온을, 이제는 내려간 그의 체온을 느꼈다. 순간을 즐겼다.

"걱정 많이 했어?"

그가 말했다. 고개를 저었다.

"힘들게 했네. 미안해."

대답하지 않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안겨들었다. 그이도 밀어내지 않고 날 끌어안았다. 그의 체취가 진하게 느껴진다. 병이 옮는다 해도 좋아.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기에, 곧 사라져 버린다 해도 좋아. 

"…새삼스럽게 내가 뭐하는거람."

"괜찮아.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온화한 말투. 그가 내게 이렇게 속삭여준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 아니,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이의 다른 모습에, 풍화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쪽이던 신경쓰지 않았다. 바로 지금 그가 나를 안고 귓가에 속삭이고 있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그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아침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침 해놨어요. 이러다가 식겠네요. 빨리 가서 가져올…"

"괜찮아. 그보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그는 몸을 돌려 창문을 열었다. 밝은 햇살이 창틈으로 새어들어왔다. 귀가 먹을 듯한 새소리도, 차가운 아침 공기도 함께 섞여 들어왔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라는 것을, 함께 거리를 걷기 좋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외출 준비를 할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옷장을 열어본다. 그리 많지 않은 옷가지중, 가장 깨끗한 흰색 튜닉을 꺼내왔다. 그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기 때문에, 언제나 깨끗히 하던 옷이었다. 옷을 팔에 걸고 침실로 돌아가자 그이가 몸을 일으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오랫만에 미소를 지은 것이, 침대를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듯 했다. 종기도 모두 사라져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더이상 혼탁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지친 그이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부드러운 손길로 살포시 밀어내며 내 도움을 거절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엇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서서, 멋쩍게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불현듯, 오래전 그가 맨 처음 날 바라보던때가 떠올랐다. 그 옛날의 모습과 똑같은 미소였다.

그의 손을 잡고 거리를 나섰다. 경쾌한 새소리가 숲으로부터 세차게 울려펴졌다. 갓 떠오른 태양은 멀리 산의 능선 가까이 부유하고 있었고, 새벽이 머금고 있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오한에 몸을 살짝 떨자, 그이가 맞잡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 아프지 않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그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거리를 걸었다.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게 필요할까? 그이와 난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걷는데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문득 그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따라 앞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거리의 풍경이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그이와 함께 걸었다.

이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이, 곧 행복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문득, 누군가가 일상이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이와 함께 산책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이가 날 온화하게 응시 한 적도 없었다. 손을 맞잡은 적도 없었다. 아니, 아마 있긴 했을 것이다. 이미 잊어버릴만큼 오랜 옛날,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과거일테지만 나에게 있어선 너무나 머나먼 과거. 거짓이라고 믿어버릴 만큼의 과거. 나는 그이를 사랑했다. 그것만큼은 진짜였지만, 아마 내가 사랑하는 그이는 상상 속의 그이, 혹은 상상에 가까운 과거의 그이였다.

물론 지금의 그이도 다른 사람은 아니다. 지금의 그이도 과거도 같은 사람이니까. 지금의 그이에게는 분명 과거의 그이가 있을테고, 과거의 그이에게도 분명 지금의 그이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이의 쌀쌀함과 폭언과 폭력 속에도, 난 그 모습을 보려하지 않았다. 그 속의 따뜻했던 과거만을 바라보았다. 보고싶은 것만 보았다. 그것은 진실의 편린에 불과하지만,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모호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그이의 얼굴조차 흐릿해지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그이를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7.

눈을 떴을때, 침대에 누운 그이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8.

모든 것이 죽어가는 계절, 가을. 역병이 그 일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인지, 가을은 어느때보다 빨리 끝나가고 있었다. 계절의 언저리, 우중충한 구름이 하늘을 짙게 뒤덮은 어느 날, 바람은 놀랄만큼 차가웠다. 마치 얼음을 갈아 공기중에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불타 사라진 집에서 챙긴 거칠지만 두꺼운 유일한 로브를 가슴쪽으로 끌어당기자, 어느정도 견딜만한 수준의 한기로 멎어들었다.

하지만 숲 속으로 들어서자 그 한파는 배가 되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입이 없는 나무가 바람을 빌어 소리높여 울부짖으며 가을의 끝을, 겨울의 시작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 내가 스스로 불을 붙였다. 6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은 밝게 빛을 내며 천천히 스러져 갔다. 이제는 마을의 일상이 되어버린 이 풍경은 지나가는 이 그 누구의 발걸음도 멈추게 하지 못했지만, 난 움직이지 않고 집이 검게 타다 남은 재가 되어갈때까지 지켜봤다. 

불길이 사그라들어도 연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에, 아이가 있었으면 그이는 나에게 다르게 대했을까?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일이 없었을까? 하지만 이내 웃어넘겼다. 그럴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운명은, 여러가지 다른 모습을 취해 내게 다가왔을 것이다. 나는 그이를 사랑했고,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나는 혼자남았을테니까. 

만약 다른 변수가 있었다면 숲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숲을 걸으며 떠올렸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게 속삭였다. 만약, 만약, 수많은 만약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다다른 곳은 결국 이 숲이라는 사실을 속삭였다. 그렇지. 맞는 말이다.

가을, 역병의 계절. 남편이 죽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예전에 죽어있었다. 아니, 마치 실제로 그랬었던것 마냥,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그이의 모습에 헌신해왔다. 그리고는, 마치 내가 유일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인양 행세해 왔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안한 현실이, 나의 유일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찬란한 불꽃 속에서, 내 세상은 그 끝을 맞이했다. 망설임도, 후회도 함께 불타 사라졌다. 겨울이 오리라. 쓸쓸한 고독의 계절. 나는 이제 그 계절의 참 의미를 깨달아야 했다. 새로운 삶이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인내해야했다. 옛 세상은 사라졌으니,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마녀가 내게 그렇게 속삭였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께를 짓누르는 배낭에는 그렇게 많은 짐이 들어있지 않았다. 챙길만한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옷가지 몇벌을 챙겼을 뿐이었다. 시집올때 가져온 것 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낙엽을 차며 이제는 익숙해진 마녀의 집으로의 길을 걸었다. 비틀린 문의 황동 문고리를 잡고 두드렸다. 그녀가 문을 열었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뚱한 표정. 입에 문 파이프의 끝에선 담배연기가 옅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전 브렌다라고 합니다."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브렌다."

그녀가 내 손을 맞잡았다. 그 손 위로, 하늘에서 차가운 눈송이가 춤을 추듯 흔들리며 떨어졌다. 폭풍같던 바람은 거짓말처럼 멎어있었다. 겨울이 온 것이다.


8/E

"그 소식 들었나요? 브렌다가 마을을 떠났다네요."

"어머나, 정말 착한 여인이었는데. 안사람이 죽은게 너무 컸나봐요."

"역병도 이제 가시는듯 한데, 안타까워요."

"그런데 그거 들었나요?"

"루치아? 뭔가요?"

"그게… 아니에요."

"이야기 해보세요. 저희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건 잘 아시잖아요?"

"그렇지만… 그래. 확실하지는 않은 이야기지만요, 브렌다가 마녀의 약을 남편에게 먹인 것 같아요."

"세상에, 그럴리가요."

"믿고싶지 않지만, 브렌다가 몰래 마을 밖으로 나가 숲으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말도 안되요!"

"하지만 여름에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해메이다 아침에 돌아온 적도 있고
…"

"…"

"…하긴 그때부터 수상하긴 했어요. 왜 마을 밖으로 나갔는지 이야기해주려 하지 않았잖아요? 자기 이야기도 잘 안하던 여인이었고…"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한명도 없네요. 안그래요, 루치아?"


"정말 그렇네요. 정말 좋은 사람인줄만 알았는데."



Epilogue.

"아줌마! 빨리 좀 따라와요!"

"헥헥 천천히 좀…"

길다에겐 이미 익숙한 산 속을 걸어올라가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약초를 찾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산 속까지 들어올 필요가 있는걸까? 하지만 이 소녀는 나보다 훤히 이 숲과 산을 꽤뚫어 보고 있었고, 또 수북히 쌓인 눈 속에서 용케도 약초를 계속 찾아냈기 때문에, 불평할 수 가 없었다. 빨리 길다에게 많은걸 배워서, 그녀 없이 산을 돌아다니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때, 갑자기 멀리선가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넓은 챙의 모자와 뺨까지 오는 옷깃이 달린 코트를 입은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그걸 먼저 알아챈 건 길다였다. 그녀는 날 기다리지 않은체 먼저 달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을 헤치며 다가가는 와중에, 이미 길다는 그 낯선 손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살짝 놀란 모습. 뭘까?

숨을 몰아쉬며 다가가자, 비로소 그의 얼굴이 보였다. 짧게 친 금발과 이국적인 이목구비. 이 근처는 커녕 인퍼토 연합 근방에서도 보기 힘든 외모였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건,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의 길고도 큰 귀였다.

"세상에, 엘프는 처음봐요!"

길다가 말했다.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 헤인스그로우라고 합니다. 혹시 길 좀 여쭐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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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이 몰아쳤다. 난희는 쓰러진 잔해 속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 위에 쌓여있던 수많은 먼지가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매케한 화약냄새가 그득했다. 고개를 들어,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길다. 어디있는거야."

그녀는 나지막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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