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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아버지의 초상

Nake 2015. 2. 2. 20:08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히말리야를 등반하신 적이 있다. 언제 갔다 오셨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고, 어렸을때 이후로 가족들 사이에서 이야기도 잘 나오지 않는, 옛날의 기억이다. 사실, 단 한장 - 혹은 두장이었던 것 같기도 한 - 사진을 제외하고는 증거조차 없었다. 그 사진은 아버지의 어꼐 윗 모습을 찍었던 사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사진이 이제 집에 있는지조차,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몇번이고 스쳐 지나갔던, 그렇게 각인된 사진은, 잊혀지지 않는다.


웃긴것은, 그 기억조차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풍화되어 하나의 모습으로써가 아닌 파편화된 조각으로써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설산 위에서 비니를 쓰고있었는가? 배경은 창공이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봉우리를 비추고 있었는가? 며칠동안 깎지 못해 자라난 수염에 서리가 얼어붙어 군데군데 하얗게 변해있었는가? 어께위의 아버지의 얼굴을 나는 타다 남은 사진처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한것 같다. 아버지는, 카메라 너머를 보고있었다. 얼굴을 반쯤 덮은 고글 너머로, 아버지는 산을 보고 있었다. 그는 등산가였다. 산을 보고 있었던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기억, 그 파편에는 그것이 더 거대한 무언가로써 남아있었다. 그 사진에 찍혀있었던 것은, 더 거대했었다.


지금 나는 셀수 없이 산을 오른다. 별과 달과 하늘이 맞닿아 눈 앞의 지평선에 놓인 산봉우리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그리고 그 산이 품고있는 숲 속에서, 나는 자연을 보았다. 혹독하고, 규칙적이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자연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행위는 결코 '등산가'라는 단어가 의미하던 자연의 정복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먹히는 행위다. 거친 한기가 뜯어먹고 노도같은 폭풍이 갉아먹고 짙은 어둠이 핥아먹는다. 우리는 거칠게 자연의 위장속으로 걸어들어가 소화되어 하나가 된다. 자연의 팔다리가 되고 양분이 된다.


아버지는 그 높은 산 위에서 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카메라 뒷편, 고글에 반사된 상으로만 엿볼 수 있었던 거대한 산봉우리 앞에서, 그는 그 거대한 것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 봉우리에 올라간다는 선택을 하는 것 만큼의 용기는 커녕, 그것을 서서 자신있게 물어볼 용기조차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은, 아버지가 그 산을 내려온 뒤에도 그 산을 추억하며 다른 수많은 산을 올라갈만큼 활기차게 살아계시다는 사실 뿐이다. 비록 지금은 지치고 현실이 다가와 그때와 같은 산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시지는 않지만, 그는 확실히 살아있고, 아직도 그 산에 올랐던 용기도 간직하고 계신다. 그리고 또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거대한 무언가였다. 나는 결코 한번도 제대로 본 적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산만큼이나 거대한 무언가였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포용하지 못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는 아직도 거대하다고. 


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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