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의 무개념 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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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지

Nake 2020. 2. 5. 07:38

"정말 간만이네요. 아직 너무 늦진 않았죠? 사과의 의미로 돔 페리뇽 몇병을 가져왔으니까 너무 화내진 말아요. 맞다, 페더그린 형제는 잘 지내요? 피닉스는 너무 덥지 않다던가요?"


숨막히는 어둠이 빈틈없이 깔린,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

별빛조차 자취를 감춘 하늘 아래서, 모르는 사람이 현관 앞에 서서 말했다.






저녁.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배달드론일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니터로 다가갔다.

또 그 남자다. 어제 내 얼굴을 보고 황급히 도망쳤던.


"죄송해요."


그는 다짜고짜 사과를 해왔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당신 이름조차 모르는데."

"..."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현관에 설치한 고화질 카메라가 송출하는 그의 모습은, 놀랄만치 창백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가까운 민가로부터 40마일. 게다가 우연히 연료가 떨어져 피치못해 찾아올 도로변에 있는 집도 아니었다. 사냥꾼이나 알음알음 알만한 길을 따라 1시간을 걸어야 마주칠 숲 한가운데 지어진 저택에 잘못 찾아 온 사람이라면, 그럴만한 고난을 겪은게 당연할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런 고난을 겪은 사람 치고, 이틀 연속으로 잘못 찾아올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갈 곳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화면으로 다시 그를 훑었다. 산길을 걸어왔다고 하기엔 조금 독특한 복장이었다. 이런걸 고딕풍이라고 하는건가? 새까만 정장에 놓인 자수가 흰 조명 아래서 아름다운 윤기를 뽐냈다. 가장무도회의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본격적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닳고 헤진 느낌도 들었다. 생활감이라고 해야할까.

손에 들린 종이 봉투는 어제도 본적 있는 것이었다.


"그거 와인인가?"


내가 물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는지 헷갈린양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의 손에 들린 봉투를 살짝 들어보이고는 답했다.


"네."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난게 언제였을까.

지난번 사슴 사냥철이 1월에 끝났으니, 그때 이후로 거의 반년이 지났다. 그때조차 이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흙발로 서슴없이 들어와 시비를 거는 무례한 사람이던가, 길을 잃고 굴러떨어져 상처를 입은 무지한 사람들 뿐이었다. 어느쪽이든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이 남자의 반만큼 조심스러웠다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저택엔 언제 오신거죠?"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그는 나쁜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무기를 들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주방의 불을 켜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1년. 아니, 조금 더 됬군. 작년 3월달에 이사왔으니까."

"작년에는 저같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었나요?"

"당신같은?"

"창백하고, 선물을 들고, 길을 잃은."

"아니."


나는 담백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한밤중에라도요?"

"한밤중이라면 더더욱."


팥빵을 다시 물었다. 와인이 아까운 물건이었지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수도 없었다. 앙금의 독특한 달콤함이 스파클링 와인 특유의 깊은 향취와 기적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도, 이 조합이라면 오래고 술과 함께할 수 있었다. 아니,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기에 이 조합을 좋아하는 걸지도.


"이거 참 난감하군요."


그가 말했다. 그 한 문장엔, 쓸쓸함과 고독함, 난처함이 하나로 버무려져 있었다.


"정말로 갈 곳이 없군요."

"후회가 너무 늦은데. 내가 당신이었다면 20마일 떨어진 분기점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거야."

"당신은 왜 여기 있는거죠?"

"이 집을 샀으니까? 무슨 질문이 그래?"

"아, 그거야 그렇군요. 질문이 이상했네요."

"숲 속이라도 전기도 쓸수있고, 인터넷도 접속되고, 물도 끌어서 직접 사용한다고. 뭔가 필요한게 있으면 드론이 배달해주니까, 도시건 여기건 불편할게 하나 없지."

"하지만 혼자신거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혼자 사는 것 치고는 큰 집이지 않습니까."

"그건 집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냐."


남자가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묻지, 자넨 여기까지 뭐하러 온건가? 차림을 보아하니 밀렵을 하러 온 것도 아닐테고. 전 집주인하고 아는 사이인가?"

"네. 사실은 그렇죠."


그가 담담하게 인정했다.


"알고 계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집을 은행의 경매에서 샀을때에 이미 10년도 넘게 버려져있던 저택이라고 하더군. 아들 몇놈을 데리고 발전기도 설치하고, 보수도 다 하고, 지하수도 다시 정비했지. 전 주인이 누군진 몰라도 말없이 떠난지 한참은 됬을거야."

"어디로 갔는지는-"

"당연히 모르지. 내가 탐정도 아니고."


그가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사람을 본지 오래도 되었지만 무슨 뜻을 가진 제스쳐인지는 잊지 않았다. 많이 줄어든 그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당신 술인걸."


그는 와인을 입가에 대고 머금었지만, 바로 삼키지는 않았다. 향과 맛을 음미하며 조금씩 목 뒤로 흘려넘기는 모양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음료를 즐길줄 아는 교양이 엿보였다. 하기사,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네는 많이 젊어보이는군."

"칭찬인가요?"

"그렇게 들리나?"


입꼬리를 비틀어보이고는 씨익 웃어주었다.


"내 말은, 전 집주인을 알기에 너무 젊어보인다는 이야기였어. 스물 중반, 많이 되어야 서른은 되어보이는데. 십년도 전에 사라진 사람의 소식을 모르기에 자네는 너무..."

"어려보인단 이야기로군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가 웃었다.


"그런 소릴 많이 듣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시는 부인도 많이 젊어보이십니다."

"칭찬인가?"

"그렇게 들리시나요?"

나는 크게 웃었다. 한방 먹었는걸.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기에는 너무 젊은게 아니신가 싶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늦는 법은 없지. 가족놈들과 떨어져 혼자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언제가 됬건 나이가 몇살이건 붙잡는게 현명한거야. 사이보그고 드로이드고 집안일을 대신할 사람이 한가득인 세상에서, 가족에 연연하는게 이상한거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가 물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기다려봐. 뭔가 더 먹을게 있나 살펴보지."

"적당히 달콤한거면 괜찮을 겁니다."

"사양이란걸 모르는군."

"아버지가 그러셨죠. 초대를 받는다면 사양하지 말라구요."

"내 취향의 아버지군. 마음에 들어."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보았다. 때마침 요구에 맞는 음식이 있었다. 운도 좋은 녀석이군.


"초콜릿 케익? 맛있는걸 두고 계셨군요? 이 빵도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스파클링 와인하면 케이크를 빼놓을순 없죠. 이런 숲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만든건가요?"

"만들긴. 주문한거야. 특별한 날을 위해 말야."

"특별한 날요?"

"내 생일이거든."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와인하고 케이크는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자네 부모님도 생일인건가?"


말이 없어진 그에게, 내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무언갈 멋쩍게 생각하던 그가, 반박자 늦게 대답했다.


"음, 아뇨. 뭣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십몇년동안 만나지 않은 가족을 만나기엔 생일만큼 좋은 날이 없으니까. 비싼 와인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살갑게 다가와 화해를 청하기에도 정말 좋은 날이고."

"하하, 논리적이군요. 사실이었다면 정말이지 놀랐을 겁니다."


웃음을 머금고는,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마저 이었다.


"저희 가족은 하지를 쇠거든요."

"하지를 쇤다고? 대체 누가?"


크게 웃었다. 그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숲 한가운데에 커다란 저택을 짓고 사는 괴짜들에게 남들처럼 크리스마스를 쇠는 전통이 있진 않았죠. 대신 저희... 가족에게는 낮이 가장 긴 하지가 명절이었습니다. 다들 모여서 선물도 풀고, 밤이 길어지면 뭘 할지 이야기하고, 맛있는 음료도 즐기구요."

"코코아같은?"

"하하하. 그것보단 시원한걸 마셨죠. 여하튼, 십년도 지난 일입니다. 말씀하신게 완전 틀린 말도 아니로군요. 선물을 들고 화해를 청하기에 정말 좋은 날이군요."


그리고는 와인을 마셨다. 쓴 맛이라도 느낀듯, 미간을 찌뿌렸다. 그의 입엔 케이크가 맞지 않았던걸까.


"여기선 뭘 하고 지내십니까?"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들. 채팅도 하고, 게임도 하고, 넷플릭스도 보고. 말했잖아, 인터넷이 터진다고."

"숲 속까지 와서요?"

"아들놈과 똑같은 소릴 하네. 뭐 잘못된거라도 있어?"

"아뇨. 그건 아닙니다. 숲 속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죠."


그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저, 제가 있을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제가 집을 나온 이유부터가 그게 고리타분해서였으니까요."

"사람이 그리웠나보군?"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사람은 많이 만났나?"

"..."


그는 잠시 침묵을 머금었다. 무언가를 회상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생각나지만, 무심코 세월속에 풍화되어 가는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떤 고난이 있었는지, 어떤 행복이 있었는지 입으로 이야기하고 있진 않았지만,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그리움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나이에 맞지 않는 호기심이 떠올랐지만, 이내 억눌렀다.


"이만 가보는게 좋겠군요."

"벌써?"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이상 호의를 받으면 제가 곤란합니다. 가족도 없는 이상, 돌아가는게 맞겠죠."

"이만큼 받아놓곤 뻔뻔한 소리. 이 밤중에 나가면 나라도 길을 잃을거야."

"전 괜찮습니다. 주무실 시간인데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또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실크 모자를 꺼내 머리에 쓰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사람을 밀쳐내면서도, 사람을 갈구하는 자신의 모습.

매일 아침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기다려 봐."


내가 말했다.


"보여줄게 있어."





켜켜히 쌓인 먼지내음에 기침이 절로 나왔다.


"환기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스위치를 누르자, 전등이 밝게 빛을 발하며 상자 위에 켜켜히 쌓인 먼지를 비추기 시작했다.


"보수하면서 전에 있던 책과 그림은 다 여기에 옮겨 놓았지. 죄다 수십년은 되어보이는 물건들이라 자네와 상관이 있을까 싶었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이건... 감사합니다. 정말 도움이 될겁니다."

"도와줄까?"

"아뇨. 그걸 부탁할순 없죠. 밤이 늦었습니다. 들어가서 주무시면 제가 찾아보고 나가도록 하죠."

"헛소리 하지 마. 난 자네 이름도 모르는걸. 어떻게 그 말을 믿고 잠을 자겠어? 그리고 지금부터 자봤자 얼마나 더 잘테고 말야."

"하하. 말로는 못이기겠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다락방을 쓱 둘러보았다.


"가구가 많지 않았었나요?"

"그랬었지. 하지만 대부분이 썩어서 부서졌더라고. 대부분은 말려서 저번 겨울에 뗄감으로 떼웠어."

"도움이 됬다니 다행입니다. 책은 다 여기에 있는거죠?"

"그래. 손대거나 읽은건 하나도 없네. 프라이버시니까."

"감사드립니다. 볼건 없을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책 한권을 꺼내 펼쳐보았다. 잉크로 적힌 필기체가 가득했다. 도서관이나 E-북으로 찾아볼수 있는 물건은 아닌 모양이었다. 애초에 이런 낡은 책을 복사할 기업이 있을리도 없지만.


"난 뭘 도우면 되지?"

"어, 안에 앨범이 몇권 있을겁니다. 아버지가 사진기를 좋아하셔서 한창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으니까요. 적당히 찾아서 꺼내주시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은 쉬웠지만, 비슷한 제본의 책이 몇백여권 쌓인 상자 속에서 앨범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우리 둘은 말없이 책의 산을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노래라곤 하나 없이, 둘이서, 조용히.

이런 일을 한 적이 언제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두꺼운 책 수십권을 뒤져가는 일을 자주 할 리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이상하리만치 친숙함이 맴돌았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웠다. 무서웠다. 오늘 새벽녁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앉아있기에 두려운건 아니었다. 이 두려움은 낯섦에서 오는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고요로부터 오고있었다.

문득 떠올렸다. 이 침묵은 낯선 일이 전혀 아니었던게다. 이 외딴 저택에서 나는 언제나 그렇게 홀로 살아왔다. 침묵 속에서 살아왔다. 갑자기 깨어진 일상에, 나는 이 침묵을 전혀 낯선 것인양 착각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침묵을 깨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어짜피 돌아갈 침묵이지 않나.

허나 그렇기에, 나는 침묵을 유지해야할 이유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거울이 없군."


그래서 아무 말이나 꺼냈다.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건물을 치울때 거울 조각을 치운 기억이라곤 없으니.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같은게 가훈이었나?"

"하하하, 아뇨. 하지만 마음에 드는 가훈이군요. 가족이 생기면 써먹어보겠습니다."

"그럼 거울이 왜 없었던건가?"

"글쎄요. 저는 오히려 거울이 왜 있어야 되는지 궁금한걸요?"

"거울이 없으면 어떻게 꾸미려고? 옷 매무새를 다듬거나, 화장을 할때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가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군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남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생각하는건 언제나 중요한 거라고. 그래서 인간관계가 피곤하지만."

"하지만 내 모습이 어떤지 이야기해줄 사람이 있으면 거울이 없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기가 쉬운 법은 아니지."

"매우 힘들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죠. 가족이란게 그래서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가족이 그런 일을 해줘야 할 이유는 또 뭐라고. 그들도 사람이야. 끊이지 않는 질문으로 피곤하게 해서는 안되는 법이지."

"그게 꼭 피곤한 일이라고 볼 수도 없지 않나요? 애초에 그래서 가족이지 않습니까."

"정말 옛날 사람이로군 자네! 요즘의 가족은 많이 다르다네. 피가 이어졌다고 무거운 짐을 지워줘야 할 필요는 없는 거지. 적당히 뒤를 밀어주고, 적당히 응원해주고. 그거면 충분해."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랬음이 분명했다.


"예시를 들어주지. 내가 왜 아침에 깨어있었겠어? 아들이 올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어서야. 멍청하게 케이크도 사놓고. 하지만 보라고. 날 찾아온건 이름도 모를 자네 뿐이지. 가족이라고 지나친 기대를 해서는 안돼. 나는 내 아들놈들만큼 현명하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그녀석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옳은거겠지. 기대를 한 내가 잘못한거야."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자신이 짐이 된다고?"

"술이 들어갔더니 못하는 말이 없군."


그가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 당신의 걱정은 지나친 거라고, 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뭘 보고서?"

"20년만에 찾아온 명절의 집에 추억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있으니까요! 전 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해요! 마지막의 마지막을 넘기고 살아가는 바에야, 짐으로 기억되는 편이 훨신 더 나을테니까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화가 나진 않았다. 그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걸까?

뭐라고 해야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죄송해요."


먼저 사과한건 그였다.


"아니. 내 잘못이지. 이상한 말을 꺼냈군."

"이상하지 않아요. 맞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자네가 한 말도 맞잖아."

"둘 다 맞았다고 하죠."

"하."


작은 웃음에, 그가 답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웃을건 아닐텐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앨범을 찾았네."


제본은 똑같았지만, 펼치자 앨범의 코팅지가 서로 뜯어지는 소리가 쩍하고 들려왔다.


"이거 맞나?"

"아, 맞네요."


그는 앨범을 받아들고 말했다. 슬쩍 본 그의 창백했던 눈가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뭐라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저, 그의 뒤에서 앨범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단서가 있을거라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아뇨."

"그럼 왜 앨범을 찾은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꺼내어 내게 보였다. 그처럼 고딕풍의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젊은 커플의 사진이었다. 낡게 바랜것이, 꽤 오래 되었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이게 자네 사진이야?"

"제 아버지 사진이죠."

"어쩐지. 지나치게 젊어보인다 싶었어."

"하하. 말이 심하시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사진을 되집어넣고 그는 앨범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부자연스럽게 손을 멈췄다.


"...손을 댄 적은 없다고 했죠?"

"물론이지."

"하지만 한 장이 없군요."

"뭐? 다른 앨범에 있는거 아냐?"

"아뇨. 만약 있다면 이 앨범일거에요. 그 사진이라도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마. 찾아보지. 어떤 사진인데."

"그..."

"무슨 사진인데?"

"...가족 사진입니다. 방금 부모님과 제가 함께 찍힌. 가족이 전부 찍힌 사진은 그것 뿐이에요."


내 손이 멈췄다.


"그럼 없는게 당연하군."

"네? 왜죠."


그가 되물었다.


"그게 유일한 가족사진이라며? 넌 앨범을 펼치고 그 사진부터 찾을 정도였지."

"그렇죠. 그렇다고 그 사진이 없어질 이유는 되지 않죠."

"멍청하긴.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집을 떠날 네 부모도 그랬지 않았겠어? 가족 사진을 가장 먼저 챙기지 않았겠어?"


그가 처음으로, 해맑게 웃었다.






"도대체 숲 한가운데 지어진 허름한 저택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나?"

"그쪽이야 충분히 괴상하지 않습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하니 가슴이 아프네."

"농담입니다. 장담컨데, 몇년 이 곳에 있다가 질려서 도시로 돌아가겠죠."

"그렇다고?"

"그게 보통 사람이 하는 일 아닙니까?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신다는데, 결말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악담이 심하군."

"죄송합니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내년에 다시 뵐까요?"


꿀먹은 벙어리처럼, 나는 잠시 서있었다. 그러다, 대답했다.


"그땐 마실 것에 페어링할만한 제대로 된 음식을 준비해보지. 더 맛있는 음료를 가져와야 할거야."

"이를테면 코코아같은거 말인가요?"

"내가 그렇게 어려보이나?"

"쏘아 붙이시긴. 칭찬이라구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모자를 썼다.


"나라면 피닉스부터 가겠어."

"뭘요?"

"피닉스. 자네가 피닉스에 무슨 형제가 있었다고 했잖아.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거야."


그는 멀뚱히 서서 나를 보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요. 현명한 조언, 감사드립니다."

"뭘 또."

"...감사의 의미로 충고 하나 드리죠. 문을 여는게 좋을 겁니다."


대답하기도 전에, 초인종 소리부터 울렸다.


"대체 무슨, 또 누가 길을 잃었나?"


나는 모니터로 다가갔다. 스피커가 울렸다.


"어머니! 아직 날짜는 안지났죠? 늦어서 죄송해요, 길을 잃어버려가지고... 그래도 선물로 주전부리 좀 사왔어요! 여기서 사는건 힘드시지 않던가요?"


뒤를 바라보자, 그는 온데간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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