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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송이밀빵 이야기

Nake 2017. 6. 11. 17:17


개요


송이밀빵은 보기 사막을 건너온 인간이 가져온 송이밀을 빻아, 그 가루를 이용해 마족 전통 레시피를 따라 만든 빵으로써, 디스 헤레토 지방의 명물로써도 알려져있는 빵이기도 하다. 송이밀 특유의 고소한 달콤함이 일품인 빵이며 또한 베이킹 파우더를 이용하기 때문에 반죽을 발효하는등의 복잡하거나 긴 준비가 필요하지도 않고, 값비싼 설탕이 사용되지도 않아 서민들의 빵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한때 연금술의 부산물로써 주로 채취되는 베이킹 파우더를 이용했기에 특히 건강에 좋지 않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수많은 연구-특히 헨젤-크라제 마법 대학에서의-가 이러한 소문을 반증하는데에 성공했고, 현재는 디스 헤레토에 당도한 인간들의 고난과 이들을 맞이한 마족들의 화합을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다.


  * 본 문서에서 소개하는 송이밀빵 레시피는 당대의 여행자들을 위한 거친 빵의 복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송이밀의 고소한 달콤함을 살리면서도 즐거운 식감을 함께 성취하려는 타협이 이루어진 레시피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재료


곱게 빻은 송이밀가루 1컵하고 1/4컵 *

일반 밀가루 1컵

버터 1/4컵

소젖 1컵

손뼘만한 새의 알 1알 **

베이킹 파우더 1 큰 스푼

소금 1/2 작은 스푼

식물에서 얻은 약간의 기름


   * 계량에 사용된 컵은 인퍼토 요리 길드에서 지정한 계량용 컵을 기준으로 하여 작성되었음.

   ** 수인족의 경우, 문화적 이유로 새의 알이 사용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음. 이에 대해서는 별첨을 참고하시오.


조리법



1. 반죽을 올려놓을 팬 위에 기름을 얇게 펼친다. 오븐은 손을 안에 넣었을때, 그 열기를 하나에서 둘을 셀 정도를 참을만할 정도로 예열한다.

2. 다른 팬에 버터를 올려 녹인다. 

3. 그릇에 녹은 버터와 소젖, 계란을 한데 넣고 휘저어 잘 섞어준다. 그리고 여기에 송이밀가루,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와 소금을 같이 넣고 잘 섞어 반죽한다.

4. 준비한 반죽을 팬에 올린다. 직사각형으로 칼집을 내면 좋다.

5. 예열된 오븐에 반죽이 올려진 팬을 집어넣고 20분에서 25분 가량 기다리다 반죽이 황금색으로 익으면 꺼낸다. 중앙을 막대로 찔러 끝이 깔끔하면 모두 익은 것으로, 먹어도 좋다. 따뜻할때 내어놓는게 좋다.



별첨


수인족은 '스스로 몸을 가뉘지 못하는 여린 형제는 스스로 먹을 수 없기에 먹힐수도 없다'라는 전통적인 문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수인, 즉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독자적인 군락을 형성하며 이종교배가 가능한 종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적용되는 터부이다. 하지만 새에 한해서, 알이 부화하기 전에 그 알의 부모가 수인의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수인 사이에서는 알을 기피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고, 이는 버디안(Birdian, 조인족)이 절멸했다 알려진 지금까지도 굳게 자리잡은 터부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를 감안하여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면, 인퍼토 요리길드를 비롯한 수많은 요리길드에서 식용으로 판정받은 뒤 판매되는 새의 알을 이용하거나, 변조 마법을 통해 마법사가 만들어낸 마란을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문화적 터부를 우회하는데 그치는 방안임을 알아둠이 좋다.




[위버틴 대륙 연안의 수많은 요리들, 13~15페이지 발췌]







전운이 감도는 센 누나하를 지나지 않고서 인퍼토 연안에서 헬른으로 넘어가려면, 첸탈 산맥을 가로지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실 산맥이라고 하기엔 그저 멍청할 정도로 거대할 뿐인 첸탈 산을 지나가는 것은 평소에도 미친 짓이었건만, 난희는 무리해서라도 헬른으로 향하려 했다.


그래서였을까. 예상치 못한 눈보라를 마주친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 다져진 길도 쉼없이 쏟아지는 눈폭풍에 금새 그 자취를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두꺼운 모피를 두른 늑대도 이 이상 마차를 몰고나갈수는 없다는 듯 으르렁대며 마부를, 그러니까 울피나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무리한 여행에는 반대했던 울피나였다. 그랬기에, 이렇게 되어버린데에 있어 울피나는 난희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울피나는 사라져가는 길가에 세워진, 대피소라고 하기엔 조금 지나치게 완벽한 오두막을 발견하고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 강도가 우글거리기로 유명한 첸탈 산이었다. 이 건물도 엘프가 먹이감을 꼬시기 위해 지어놓은 건물일지 몰랐다. 


하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별 수 없이, 일행은 이 오두막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피오나의 도움을 받아 거칠게 숨쉬는 늑대와 짐마차를 헛간 안에 넣으면서도 울피나는 등골을 타고 달리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30여분의 노동 끝에, 쏟아지는 땀을 뒤집어 쓰고 오두막으로 들어간 피오나를 가장 처음 맞이한건 난희의 목소리였다.


"자, 비장의 이민자식 정통 송이밀빵입니다. 우쿠아 졘."


거친 나이프가 꽃힌 송이밀빵은 울피나와 피오나처럼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 김이 품은 고소한 냄새 정도.


"어느새 이런걸 준비한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울피나가 난희에게 물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지."


난희가 받아쳤다. 생글생글 웃고있는게, 언뜻 보면 울피나의 고생을 알지 못한 듯 보였지만, 실은 난희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울피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철면피.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능글맞은 그녀의 처세에 적응하기란 힘이 들었다.


한숨을 쉬며 앉을 곳을 찾아 오두막 안을 둘러본 울피나는, 이내 이 오두막의 안이 밖에서 얼핏 봤을 때보다 더 잘 관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금방 불을 피울수 있도록 준비된 장작이라던가, 아주 얕게 쌓여있을 뿐인 창틀의 먼지가, 적어도 일주일에서 이주일에 한번은 사람이 직접 청소하고 있음을 짐작케 했으니 말이다.


빵이 담긴 접시도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분명 이 오두막에 비치된 물건일테다. 아주 간단한 형태의 나무 접시였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식기를 비치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사소하면서도 꼼꼼한 준비였다.


"네가 말한대로, 아마 이 집은 함정인것 같긴 한데 말이지."


난희가 말했다. 그녀도 울피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단 쓸수 있는건 쓰자구요. 이 눈폭풍을 뚫고 올 성실한 강도가 있을 것 같지도 않구요."


패트리샤였다.


"재료는 어디서 난거야?"


"이런 일이 있을까 가지고 있었지. 여기 있는 식재료를 쓴건 아니니 걱정 말라고. 아무리 나라지만 그런 짓을 할까봐."


"제가 보증할게요. 걱정 말고 드세요."


패트리샤가 송이밀 빵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지만, 울피나는 그릇을 집어들길 주저했다. 대신 피오나가 그릇을 받아들어, 작은 손으로 빵을 조그맣게 뜯고는 자신의 입에 집어넣었다.


적어도 맛은 있는 모양이었다. 오물조물 송이밀빵을 씹던 피오나는 곧 미소를 지으며 빵을 들고는 한웅큼 더 크게 베어물었다.


"여기 우유 있으니까 마시면서 천천히 먹어. 그러고 보면 이 우유, 용케 안얼었구나."


항상 들고다니던 철제 컵에 우유를 따라 건네던 난희가 문득 깨달았다는듯 말했다.


"쿠지르트에서 구한 통에 담았었거든. 추운 곳에서 와인이 얼지 않도록 엘프가 마법으로 코팅했다던가, 그랬을거야. 여행용으로 혹시 몰라 구매한건데 이런 곳에서 효용을 발휘할줄은 몰랐네. 일단 나도 한잔 줘."


"여기 있습니다. 아, 우유 조금 따라서 밖에다 놔둘까?"


"얼음 우유? 나도 좋아하긴 한데, 굳이 그걸 위해서 문을 여닫을 필요는 없다고 봐. 온기가 새어나가는건 정말 싫다고."


그렇게 말하며 울피나는 우유를 홀짝였다. 얼지는 않았다지만, 등골이 서릴정도로 차갑게 식은 우유는 온몸에 소름을 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열심히 땀을 흘린 뒤라,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울피나의 열기가 오두막의 온기에 가라앉을 즈음, 난희가 다시 빵을 접시에 담아 권했다. 울피나는 잠시 그 접시를 응시하다, 마지 못해 받아들었다.


"싫어해?"


울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빵을 자주 먹지는 않는 편이거든."


"아, 알때문에?"


난희가 난처한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난희는 울피나에게 울피나가 싫어하는 음식을 줬다는 것 보다, 새의 알을 기피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는 사실에 더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여행을 하진 않았지만, 명색이 하얀 마녀였다. 크로녹스의 이야기꾼. 흰 머리의 중재자. 진작에 알았어야할 정보였지만,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후회가 무안하게, 울피나는 금새 손을 저으며 난희의 가정을 부정했다.


"아냐, 아냐. 터부가 있는건."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 이해 한대도."


"아니, 애초에 반쪽 수인족인데다 전통을 따르는 집안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취급하면 나만 곤란하다고."


그렇게 말하며, 울피나는 송이밀빵을 한조각 떼어 입에 던져넣었다. 조금 식었지만, 송이밀 특유의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풍미가 입에 진하게 퍼졌다. 식감이 조금 거칠었지만, 충분히 먹을만했다. 식사 완비라고 떠드는 허름한 여관에서 내어주는 빵보다 몇배는 나았다.


"아버지 쪽이 수인족?"


난희가 물었다.


"응. 쉬피언(Sheepian), 양인족이지. 어머니는…"


"엘프랬지?"


"그렇지. 어머니와 함께 자랐었고. 습관 같은 건 차라리 엘프쪽에 더 가깝다고. 날 수인으로 대접하면 지나가는 다른 수인이 비웃을거야."


그리고 빵을 떼어 다시 입에 던졌다. 만들기 간단한 만큼 맛도 간단했지만, 결코 무시할수 없는 맛이기도 했다. 기본적인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나, 울피나는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그냥, 뭐라고 해야할까. 어머니 식습관은 면류가 중심이었거든. 면에는 미쳤다고 해도 될 정도로."


과거를 생각하며, 울피나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묻으려는듯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세찬 눈발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난희는 침을 삼켰다.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울피나는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최후의 수단을 언제나 쓸 수 있도록.


패트리샤는 나이프를 몰래 숨겼다. 문 앞의 덩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피오나는 빵을 쥐었다. 그리고는 입 안에 집어넣었다. 


"..."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람은, 말없이 그 자리에 못박혀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듯 상체가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지만, 원채 두껍게 몇겹의 모피와 옷가지를 뒤집어쓰고는 그 위에 커다란 코트까지 껴입고 있어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그 사람은 손에 도끼를 쥐었다. 하지만 그는 그 두꺼운 장갑으로 손도끼를 아주 조금  들어올리다 금새 포기하고는 도끼를 주머니에 되집어넣었다. 그리고, 아둥바둥대며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방인이 끼고있던 두꺼운 장갑으로는 그 큰 문고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듯 했다. 게다가 폭풍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두꺼운 목재 문짝이었다. 활짝 열린채로 강풍이 붙잡고 있는 그 문을 닫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와줄까?"


난희가,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사람은 난희쪽으로 상체를 돌리고는, 누구든 알아볼 수 있도록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에 코트를 벗어 걸어놓은 난희는, 의자에서 가볍게 일어나, 낯선 손님과 함께 폭풍과 맞서 싸웠다. 몇초 뒤, 오두막은 다시금 차디찬 폭풍으로부터의 안식처로 돌아왔다. 난희는 문을 닫고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하아... 하아..."


이방인은 자연스럽게 오두막 구석으로 향해, 뒤뚱거리며 눈이 잔뜩 쌓인 두꺼운 옷가지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커다란 가죽 털장갑을 먼저 벗어 땅에 떨어트리고, 단추를 풀어 벗어낸 코트 밑의 귀는, 길다랬다. 엘프. 울피나는 주머니 속의 나무 조각을 불 속에 던질 준비를 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외투를 벗고있는 엘프의 모습은, 보른에 퍼진 엘프 강도의 소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황도 이상했다. 이 시기에 이 곳에 혼자다닐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아무리 엘프라도, 그건 미친 짓이었다. 게다가 그가 지닌 손도끼도, 벌목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작았고, 사냥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전투적이었다. 패트리샤는 품에 쥔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하아... 긴장들 풀라고... 젠장... 이 눈보라 속에서 장사를 하고싶은 마음은 나도 없으니까..."


선수를 친건 엘프였다. 딸깍. 벨트의 단추마저 풀고,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트리자, 벨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도끼도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에 부딛쳤지만, 엘프는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그렇게 탈의를 마친 엘프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곰의 가죽과도 같은 두꺼운 옷가지들을 능숙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빵이라도 한조각 주겠어?"


엘프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피오나가 자신의 접시에 송이밀빵을 덜어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엘프는 감사하다는듯 고개를 까닥였다.


"긴장들 할 필요 없어. 나도 눈을 피하러 이 곳에 온거니까."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자연스럽지 않나?"


난희가 물었다.


"그거야, 이 오두막을 내가 지었으니까."


엘프가 받아쳤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이런 일이 있을줄 알고 지은거지. 산이다 보니까 눈이나 비가 갑자기 쏟아질 떄가 많거든."


"그걸 피하려는 사람들을 먹이로 삼으려고 하는건 아니고?"


울피나의 날선 질문에, 엘프는 웃으며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나도 정도란게 있다고. 저 눈보라를 힘겹게 뚫고 와서까지 남을 등쳐먹을 생각은 없어. 뭣보다, 이렇게 고소하게 구운 빵을 나눠준 사람을 공격하는건 사람된 도리가 아니지.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말야."


그렇게 말하며 엘프는 빵 한조각을 통째로 집어들고는,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흠... 이건..."


"다 삼키고 말해."


난희가 말했다. 긴장이 풀린듯, 그녀는 자신의 잔에 있던 우유를 홀짝이며 바닥에 앉아 송이밀빵을 먹어치우는 엘프를 바라볼 뿐이었다. 확실히, 난희에겐 엘프를 향한 적의는 없어보였다. 오히려, 저 고된 폭풍을 단신으로 뚫고 왔다는 사실에 작은 연민마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이건, 무슨 빵이지?"


주어진 빵을 모두 집어삼킨 엘프는, 이젠 고르게 변한 숨으로 물었다.


"송이밀빵."


"송이밀! 그랬군. 어쩐지 먹어본적 없는 맛이라 생각했어. 인간은 모두 이런걸 먹나?"


"엘프가 모두 버섯만 먹는게 아닌 것 처럼, 인간도 송이밀만 먹진 않아."


울피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바닥에 앉은 엘프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울피나를 곁눈으로 살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렇기야 하겠지. 음.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피비앙. 그 유명한 첸탈 산맥의 엘프 강도중 한명이야. 그나저나 이 시기에 여길 지나가려고 하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군."


피비앙은, 마치 강도가 마치 상인이나 경비원같은 평범한 직업인양 이야기하고는, 금새 말을 돌렸다. 


"모든 사람의 길에는 각자의 이름표가 있을 따름이니. 난 그것보다, 당신이 오늘 일을 쉬는 이유가 더 궁금한데?"


난희가 되물었다. 피비앙은 그런 난희를 유심히 살펴보다, 웃으며 말했다.


"팔그람 경전을 인용했군. 인간 신자는 아닌줄로 알고있는데?"


"뭘로 알고있는데?"


"그거야, 검둥이 놈들의 유명하신 하얀 마녀."


파비앙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리한 자신의 옷가지의 품 속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유명한가?"


난희가, 울피나에게 물었다. 울피나는 그저 고개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나도 왠만큼 살았으니 말이지. 이리봬도 뉘르소에서 상인도 한 적이 있단 말씀. 뭐, 그쪽이 모습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당연하다는 듯, 난희가 눈썹을 까딱였다. 


"크로녹스의 이방인, 흰 머리의 여행자, 가끔씩 지나가는 이야기로 꾸준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볼 줄이야. 만나서 반갑군. 나머지 일행은 같이 여행을 하는건가? 인간 귀족에, 쉬피언 상인에, 엘프 꼬맹이라. 특이한 조합이군."


"귀족이 아녜요."


패트리샤가 말했다.


"귀족이 아니라니, 인간은 계급이 없다는 뜻인가? 말이야 없다고 하겠지. 말투나 자세나 행동이나,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고 자란 녀석들은 귀족이나 다름없다고. 인간들 스스로만 모르는 거지."


퉁명스러운 말에, 패트리샤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기분 나빠하진 마. 내가 다른 사람을 쉬이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강도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겠지. 나는 인간을 다른 난쟁이, 검둥이, 털복숭이를 싫어하는 만큼 싫어해. 평등하게 싫어한다고 알아두라고."


"엘프는?"


울피나가 물었다.


"귀쟁이? 최악이지."


피비앙은 웃으며 답했다.


"아무리 그런 나라지만, 오늘은 더럽게 힘들고 진이 빠지는 날이라 더이상 일을 하고 싶진 않아. 이런 나라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운 때가 있고, 칼날 협곡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더러운 눈보라를 마주친 날엔 그 어느때보다도 더 타인을 그리워하게 된단 말야. 안그래도 최근 골때리는 일도 몇건 일어났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을 맺는 피비앙의 목소리엔 어딘가 공허함이 담겨있었다. 알고있던 누군가를 잃은듯한 목소리. 되돌아가지 못할 일을 저지른 목소리.


"정 못믿겠다면, 이 도끼라도 가지고 있던가. 무기를 찾고싶다면 온몸을 뒤져봐도 괜찮아. 아무것도 나오지 않겠지만."


잠시의 침묵을 두고 다시 입을 연 피비앙은, 도끼 목을 쥐고 자루를 난희쪽으로 향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무기가 없더라도 엘프라면 충분히 위험하지. 마법을 어떻게 다룰지도 모르는데 말야."


울피나였다. 아무도 받아쥐지 않은 도끼 자루를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면서.


"영 불안하면 아까부터 쥐고 있던 소환 부적을 불구덩이에 던지지 그래. 젠장, 아무리 내가 쌓아온 업보라지만 이렇게 신뢰를 못 사다니."


"너무 솔직하게 강도라고 밝혀서 그래."


마침내, 난희가 웃으며 도끼를 받아 들었다. 가죽 도끼집에 담긴 손도끼는, 묵직하면서도 미묘하게 밸런스가 잡혀 사용자의 오랜 숙련도에 맞춰 제작됬음을 어렵지 않게 알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도끼를 잠시 받아들다, 난희는 식탁 위의 구석에 도끼를 올려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그만 거짓말을 하는게 차라리 나았을지 모르겠군."


"뭐. 이런 눈보라 속을 뚫고온 전령이라고 이야기라도 하게? 말도 안되는 소리. 너나 저 수인의 눈치라면 어렵잖게 내 정체를 들켰을텐데. 그땐 더 뻘쭘하겠지, 안그래?"


"뭐, 그렇기야 하지만."


순순히 난희는 사실을 인정했다. 능글맞은 처세. 울피나는 예상치 못한 이방인을 맞이하고도 자신의 페이스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난희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찬듯 얼굴을 감싸쥐었다.


"정말로 밤을 저 엘프와 같이 보낼 생각이야?"


"왜. 나가서 죽으라고 할수는 없잖아."


"엘프잖아? 알아서 살아남겠지."


"저기, 아직 잘만 들리는데말야. 게다가 살아남기 위해 이 집을 지은거라구."


피비앙이 작게 손을 들고는 말했다.


"어쨌든 나는 반대야. 안전을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같이 지내서는 안되는거라고."


"글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나쁜 친구는 아닌것 같단 말이지."


"네가 누구인지 저쪽에서 먼저 알아봐서 그런거야?"


울피나가 장난스러우면서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인기에 연연해하는거 봤어? 게다가, 사실 나보다는 패트리샤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을까?"


난희는 그렇게, 이야기 밖에 있던 패트리샤를 곁눈질로 끌고 들어왔다. 갑자기 이야기에 참여하게 된 패트리샤는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조금 무례하긴 하지만, 저도 난희의 말에 동의해요. 괜찮지 않을까요? 여차하면 소환 부적을 태우면 될테구요. 헬렌씨는 금방 오지 않나요?"


"그거야 그렇지만, 너무 과신해서도 안된단 말이지. 애초에 그녀를 부르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게 최선이야."


"이야기는 아직인가?"


피비앙이 능청스럽게 물어왔지만, 울피나는 그런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피오나를 향해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저 강도와 함께 있어도 괜찮겠어?"


피오나는 잠시, 언제나 그리했듯 침묵하다가, 언제나 그리했듯 작지만 간결하게 말했다.


"괜찮아."


"결판은 났네. 삼 대 일. 아니면 밖의 늑대에게 물어봐야하나?"


피비앙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만, 조건이 있어."


난희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울피나는 한숨을 쉬었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무언가 즐거운 것을 떠올린 목소리. 익히 들어왔고 그래서 이젠 조금 질린 목소리로 난희가 입을 열었기 떄문이다.


"방금 먹었던 송이밀빵은 말이지, 보기 사막을 건너서 디스 헤레토에 도착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송이밀 가루를 마족식 빵으로 구워낸, 이른바 '화합'의 상징이야. 그리고 화합이라는건 말이지, 서로의 것을 나누는데에서 시작되는거야."


"잠깐. 지금 강도를 강도하려는거야? 웃기는군. 실제로 할수 있지는 둘째 치고 가진건 저 옷가지와 도끼, 수통밖엔 없어."


"난 물건엔 크게 신경쓰지 않아, 피비앙. 알고 있잖아. 나는 하얀 마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야기꾼이야. 내게 필요한건,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야. 우리가 화합할수 있게, 아니면 적어도 이 밤을 보낼 수 있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해."


그렇게 말하고는, 난희가 히죽이며 웃었다. 결과적으로 별거 아닌 일을, 뭔가 위험한 거래를 하는양 포장하는 것도 난희가 아니면 불가능할거라고, 울피나는 생각했다.


"웃기는군."


피비앙이 말했다. 더욱이 웃긴건, 피비앙이 그런 난희의 장단에 맞춰주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별 수 없구만. 산에서 도통 나오지도 않고 나올 수도 없는 엘프의 이야기다 보니 그쪽 입장에서 흥미로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주면 고맙겠군. 그래. 그건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야. 2주쯤 전일까?"


피비앙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많은 그림자가 쉴새없이 쏟아지는 첸탈 산의 중턱, 조금만 떨어져도 쉬이 지나쳐버릴 불빛을 내뿜는 오두막에서,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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