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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세상의 끝

Nake 2017. 8. 5. 12:11




소년은 소녀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그렇기에 유효한 표현이었다. 처음 본 바로 그 순간, 소년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가 그런 소녀를 발견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었다. 평소라면 소년은 절대 소녀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리라. 


소년이 평소의 일과를 부수고 무너진 빌딩에 발을 디딘 것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도 아니요 무언가를  발견하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이 한번도 그리해보지 않았다는 호기심이 소년을 자극했고, 사춘기 특유의 넘쳐흐르는 호르몬이 그의 뇌로 하여금 한때의 일탈에 눈감도록 만들었다.


소년의 개는 이를 매우 싫어했다. 개는 매우 단순했다. 개에게 있어서 호기심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미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자기 자신이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처럼 눈을 핥고 버섯과 이끼를 질겅질겅 씹으며, 양껏 쌓인 눈 위를 걸어다니며 다음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죽지 않을 것임을, 개는 소년이 태어났을때부터 줄곧 몸에 익혀왔고 이를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거 줄테니까 가자."


허나 소년의 유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하디 귀한 육포가 풍기는 매력적인 짠내로부터 개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개는 소년과 함께 무너진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리, 옛날 사람들은 봄이 되면 이런 건물에 들어와 놀고는 했을까?"


소년이 개를 향해 부르며 그렇게 물었다. 제리는 개의 이름이 아니었었다. 그 이름은 한때 아버지가 소년을 향해 부르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소년에게 불러줄 사람이 없어진 이후로, 소년은 자신이 알고있는 유일한 이름을 개를 향해 외치곤 했다. 그런 측면에서, 어찌보면 개의 이름은 제리일지도 몰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리는 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애초에 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울어진 바닥은 흉측한 콘크리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회색 나신을 감추려하지 않았고 썩어 문드러져 갈라진 피부 아래로 시뻘겋게 녹슨 철근이 눈에 쌓여 선을 이루었다. 그리고 소년은 그 속에서 상상했다. 눈이 오기 전의 세상을 상상했다.


하지만 소년의 상상력은 매우 빈약했다. 별수 없는 일이다. 상상은 지식에서 솟아나는 법이니까. 소년의 상상에서 소년이 발을 들인 빌딩에는 수십명의 아버지와 수십명의 소년, 그리고 수십마리의 제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뭘 하는지는 모른다. 뭘 할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은 소년의 상상속에서 갈라진 콘크리트 빌딩 위를 나다닐 뿐이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행복했다. 그리고 소년에게 행복이란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빌딩에서 소년이 소녀를 발견한건 그로부터 며칠 더 지나서였다. 개는 며칠때 일과를 깨고 건물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또는 한편으로 그의 안 어디선가 이미 이 빌딩에 들러 소년의 상상력을 인내하는 것이 새로운 일과임을 자각하고도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제리의 저항은 약해졌고, 소년의 경계심도 약해졌다. 소년은 더욱 더 잔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주위의 많은 것을 뒤지곤 했다.


소년이 소녀를 본 것은 바로 그곳에서였다. 소녀가 그려진 한 말라 비틀어진 잡지. 페이지와 페이지가 물기를 머금고 붙었다 얼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소녀가 그려진 표지만큼은 빛을 발했다. 


"비..어...벼얼....비...비이....잍... 벼얼-빛."


호르몬이, 그리고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힘겹게 소년에게 글자만큼은 가르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 사용해야 되는지를 모를뿐 소년에게 준 아버지의 훌륭한 선물이었다. 소녀의 이름을 천천히,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며 입 밖으로 내뱉을때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소년의 짐이 늘어났다.


이는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세상이 얼어붙고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영원한 겨울이 찾아오고 난 후, 인간은 사치를 부릴 능력을 잃어버렸다. 금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양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모든 행동은 열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열은, 이제는 허투루 쓸 수 없는 자원이 되어버렸다. 먹는 것, 입는 것,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움직이고, 숨을 한번 내쉬고 들이쉬는 것 모두, 에너지를 소비했다. 소년은, 인간은 이를 모두 관리해야했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살아온 소년에게, 잡지를 가지고 다니게 된 것은 정말이지 크고 비실용적인 변화였다.


그리고 그리하여 소년은 사랑에 빠진 소녀를 품에 안고 자신의 안식처로 향했다. 모든 책이 불쏘시개의 다른 형태라고 생각하던 그의 과거를 생각하면 잡지를 취급하는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옷을 말리듯 그는 책을 적당한 거리에 두고 녹이고 또 건조시켰다. 그리고 대낮임에도 앞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숨막히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낮이나 함부로 나갔다 금새 온도를 모두 잃고 정신을 잃을 거센 바람이 부는 날에 자리에 앉아 잡지를 읽고, 또 읽었다.


소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듯 했다. 별빛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검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우주 비행사란 사람인 모양이었다. 잡지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우주 비행사가 되었는지, 무엇을 꿈꾸며 우주로 향했는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우주를 바랬는지 자세하게 적어놓고 있었다. 소년의 어휘로는 모든 단어를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그 꿈만은, 정말이지 제대로 전해졌다.


그런 소년에게 있어, 소녀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이었다. 일단, 자신처럼 옷을 수겹 겹쳐입고 눈만 내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뿐만아니라 소녀는 거침없었고, 자신있었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소년에게 소녀는 빛이 되고 별이 되어 어디론가 나아갈수 있다는 꿈과 방향을 심어주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그 전까지는 존재조차 몰랐던 희망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소년은 어느날 제리에게 말했다.


"난, 저 산을 넘어가겠어."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시선 끝에는 태어나고서부터 소년이 자란 숲과 옛 인간의 도시를 품은 높은 거대한 산이 있었다. 소년의 세상의 경계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전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사춘기 또래 특유의, 허황된 목표였다. 소년은 산을 오르고 그 너머를 본 뒤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있는 비교적 안전한 세상에서 벗어나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소년은 그저, 세상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소년에게 있어 세상이란 산 아래 있을 뿐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것이 추상적인 목표일지언정, 언제나 현실적으로 생존해온 소년의 준비마저 낭만에 가득차있진 않았다. 목표를 세운 그 날부터 소년은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소년의 아버지가 메던 거대한 가방을 준비했다. 헤진 부분을 보수하고, 안에 무엇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자신이 멜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과거의 자신에게는 너무 컸지만, 지금은 생각보다 알맞게 줄어들어 있었다. 소년은 웃으며 다음을 준비했다. 


마실 물, 입을 옷, 먹을 것과 이를 사냥하고 채집할 도구. 이를 모으고 손질하고 보수하여 출발의 날까지 훼손되지 않도록 보관했다. 혹독한 추위로부터 몸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다시금 떠올리고 몇번이고 연습했다. 제리는 이 모든 과정을 보았고, 잃는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런 짓을 하기엔 너무 늙었어. 소년은 그저 웃었다.


수십개의 밤낮이 지나고, 눈폭풍이 잦아든 고요한 밤. 세는게 불가능한 별빛과 오로라가 일렁이는 평화의 밤. 소년은 마지막으로 잡지를 읽고 소녀를 마음 속에 담았다. 그리고 표지를 찢어 수겹이 옷 안에 집어넣고 굳게 옷을 여맸다. 그리고 제리를 불렀다.


"안갈거야."


제리가 오랬만에,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정말이야? 너 혼자 있게 될거라고."


"네가 혼자 되는거겠지. 난 괜찮은데, 넌 괜찮겠어?"


제리가 되물었다.


"나에겐 벼얼빛이 있는걸."


소년이 웃으며 답했다.


"퍽이나."


그리고 제리는 꼬리를 말고 몸을 웅크렸다.


"산을 넘기 전까진, 돌아올 생각일랑 하지 말아."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제리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소년도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소년은 눈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뽀드득. 뽀드득. 익숙한 발소리. 가뜩이나 고요해 귓가를 멀게 만드는 겨울의 침묵 속에서 소년에게 들리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익숙한 발소리 뿐이었다. 잔뜩 눈이 쌓인 나뭇가지에 바람이 스쳐 눈이 떨어질 소리가 날법도 했지만,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하고 고요한, 공기가 미동조차 않는 밤이었다.


자연이 언제나 이렇게 소년에게 친절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소년도 이를 기대조차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감사하지 않을정도로 못되먹은 인간도 아니었다. 이런 최적의 밤을 내어준 세상에게 소년은 감사하며 위로, 또 위로 걸었다. 


하지만 단순히 위로 걷는다고 해서 산을 넘어갈수 있는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세상이 녹록치는 않았다. 해가 떠오르자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산은 이내 사레들린듯 뺨을 후려치는 거센 바람을 내보냈고 그럴때마다 거칠게 쌓인 날카로운 눈송이가 소년을 향해 날아들었다. 고글을 쓰고 마스크를 써 최대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그렇게 한나절을, 또 한나절을 걷고도 중턱조차 오르지 못할 거대한 산등성이에서 첫번쨰 휴식을 맞은 소년은 또다시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수통에 담긴 물이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소년이 처음 맞이하는 일은 아니었다. 소년은 렌즈를 물 안에 비춰 조금씩 물을 녹인뒤 입을 적셨다. 그정도면 충분했다.


길을 한없이 올라가며 소년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거친 일은 아니라고. 모든 난관은 소년이 살아오며 소년이 한번씩 겪었던 것이었고 해결해본 것이었다. 그 순간 소년은 낙관했다. 그럴만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됬다. 소년은 미끄러졌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밖으로만 내지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낸 소년은 부러진 발목과 찢어진 배낭을 쥐고 힘겹게 한걸음, 또 한걸음을 내딛어 뿌리채 뽑힌 거대한 나무 아래 그늘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몸을 내던지듯 쓰러트린 소년은 환부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탈골이라고 소년의 아버지는 표현했었다.


다른 수는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이를 되맞춰야 했다. 몇번을 실패하고 마침내 성공한 소년이 정신을 되찾았을땐, 귀를 찢는 눈폭풍이 몰아치는 밤이 찾아와있었다.


이게 과연 가치있는 일이었을까? 조그마한 불씨를 잇따른 시도 끝에 겨우 피워낸 소년이 생각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산을 올라온거지? 저 밑에 안주했다면, 그래도 죽기 전까진 살수 있지 않았을까? 소년은 후회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을 한 자신이 미워졌다. 눈물이 나왔다. 옷이 눈물에 젖도록 둘수는 없었기에, 소년은 재빨리 마스크와 후드를 내리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갑갑한 옷을 풀어해치기 시작했다.


툭. 무언가 떨어졌다.


소년은 소녀와 눈이 맞았다.


그리고 소년은 하늘을 보았다. 별빛이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생각했다.




정상에 올랐을때는 한밤중이었다. 처음 소년이 길을 출발했을때와 같은, 고요하고 아름다운 오로라가 일렁이는 밤이었다. 산을 내달리는 밤의 바람이 처음으로 소년의 길을 저주하지 않고 있었다. 소년은 웃었다. 소년은 세상의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끝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래, 그건 마치, 별빛과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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