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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선택받은 『ChoseN』

Nake 2017. 9. 17. 21:29


세상은 거짓말로 가득 차있다.


뭐가 선택된 용사라는거냐. 위기의 때에 나타나는 구원의 전사라는거냐.


내가 나고 자라온, 내 유일한 세상이 이렇게 불타오르고 있는데, 도대체 그 용사라는 놈은 어디있는거냐.


지금 불타고 있는 고향의 사람들은 그 전설만을 믿고 살았다. 수십년, 수백년, 수천년동안.


[마왕이 태어날때,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나타나리라.]


하지만 용사는 없었다. 마왕이나 여신과 마찬가지로.


실존하는건, 도적에게 돈을 받아먹는 썩어빠진 영주와 몰려오는 마물 무리에게서 창칼을 버리고 도망간 경비대 뿐.


그게 세상의 맨얼굴이었다. 이러한 비극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위한, 지독한 거짓말로 가득 찬 세상의 맨 얼굴이었다.


그리고 모든게 늦어버린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얼마나 역겨운 세상에 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부질없는 후회를 머금는다. 피가 잔뜩 몰린 머리가 평소에 작용했던 사고 이상으로 작동하려 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무언가 해보려 노력했다. 모든게 불타오르고 난 뒤에서야.



부러진 다리로 일어선다.         -근육을 베는 고통이 엄습한다.


뚫린 폐로 연기를 들이쉰다.          -메스꺼운 현기증이 들이닥친다.


불타는 각목을 부목삼아,          -살이 익는 고약내가 코를 찌르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을,            -지키지 못한 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다.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다.


죽음이 다가온다. 느껴진다. 세상이 느려지고 있음을, 피부로 직감한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때였다. 모든걸 저주하고, 모든걸 포기하려 한 그 때, 상냥하고 갸냘픈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건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 성스럽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죽음일리 없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 여신의 목소리.



『엘로한 스타브레이커. 당신의 때는 아직 멀었답니다.』



그리고 그 여신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고서야, 나는 그게 환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런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주리라 상상조차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할 상상력이, 내겐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시간이 멈추어버린 잿더미 위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을 여신이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우유처럼 매끈한 살결 위에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정갈한 옷가지를 걸친체, 심장을 꿰뚫어 보듯 희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노란 생머리의 그녀를, 나는 여신이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대답을 하려했지만, 대신 나온건 메마른 공기 뿐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몸이 더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마치 길에서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진 망아지처럼.



『무리하게 말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의 생각은, 제게 또렷히 들려오니까요.』



말도 안돼.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이 모든게 말도 안됬다. 이 고난 자체가. 그리고 지금의 내 몸뚱아리가.


그러니까 믿어보도록 하겠어. 16년의 인생동안 믿어왔는데, 몇분 더 믿어본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나겠나.



『고맙습니다, 선택받은 용사여.』



뭐라고?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이 여인은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잘못들은게 아닙니다, 엘로한 스타브레이커. 당신은 마왕과 맞서 싸워 세상을 구원할 선택받은 용사입니다.』



아냐.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보면 몰라? 나는 세상을 지키지 못했어. 마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세상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그러고 싶었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어. 나는 나약한 농부의 자식에 불과할 뿐야.


검을 다룰줄도 모르는.



『괜찮습니다, 용사여. 당신은 당신의 능력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이, 저를 이 곳에 불러냈지요.』



그건 대체 무슨 소리야?



『당신의 절망, 고통, 그리고 세상을 고치고자하는 의지. 이 모든 것이, 용사를 용사답게 만들죠. 그리고 지금 이 세계에서, 당신보다 더 용사다운 자질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리가.



『허나 그것이 진실된 사실. 자, 이제 선택하세요, 엘로한 스타브레이커.』



무엇을? 용사가 될지를?



『네. 과거로 돌아가, 육체와 정신 또한 지금의 의지에 걸맞는 용사가 될지를. 아니면 - 』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지를.


"---..."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말로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했지만, 해낼수 없었지만, 여신은 내 뜻을 알아챈듯 했다.



『그럼, 준비하세요, 용사여. 새로운 기회로, 새로이 태어날때까지.』





눈을 감았다. 세상이 검게 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고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성스러운 섬광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몸이 떠오른다. 사라진다. 지금의 내 자신이 사라진다. 


나는 직감했다. 나는-


[용사]로 다시 태어나리라.





그렇게 믿었건만.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모두 타고 남은 집의 잔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내 옆에 쌓여갔다.


나는 과거로 가지 않았다. 나, 엘로한 스타브레이커는, 여전히 잿더미로 변하고 있는 고향땅에 남아있었다.


격통이 몰려왔다. 내 몸 스스로가 날 죽이려 소리치고 있었다. 


모든건 거짓말이었다. 빌어먹을 환각이었다.


좆같은 세상의 좆같은 종교의 좆같은 환상의 좆같은 거짓말이었다.


이 땅 위에 숨쉬는 모든 것이 날 비웃으려 하는것 같았다.


그것 믿었냐?, 고.


젠장.


젠장젠장젠장젠장.


"그렇게 자책하지 말아.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또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믿을줄 알고. 


그저, 날 어서 편하게 해줘. 날 죽음에 맞이하게 해줘.


"그럴 순 없지."


환각이 말했다. 환각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말했다.


"넌, 네가 맡은 역할을 해야지. 게으름뱅이씨."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용사의 운명을 가졌다며. 그리고, 나는 과거로 가지 못했고.


그건 내가 용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않나. 내가 죽어야한다는 뜻이지 않나.


"꼭, 그런건 아냐. 나는 분명히 널 과거로 보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너의 기억을 과거의 너로 보냈다는 거지.


이제 이 작은 촌구석에서 태어난 엘로한 스타브레이커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지식을 쌓고 있을거야.


용사가 되기 위해서 말이지."


그리고는, 소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귀엽게 웃어댔다.


"아, 궁금하겠네. 그렇다면 지금의 넌 뭔가, 하겠지. 안그래?"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음... 재활용, 이라고 해야할까? 아냐. 조금 이해하기 쉽게 말해줄게. 너도 기억하겠지?


'마왕이 태어날때,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나타나리라.'


너는 여기서, 마왕 역을 해줘야겠어."


푹.


"이거이거, 벌써부터 자질이 보이는걸?"


그렇게, 여신은 목에 각목이 꽂힌 채로 내게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불가능해.


내 손에 눌러붙은 각목은, 분명 진실이었다.


힘겹게 휘두른 움직임도, 분명 진실이었고.


하지만, 환각의 목을 찔러가는 그 둔탁하면서도 명쾌한 감촉조차, 진실이라니.


"어서 정신 차려, 엘로한 스타브레이커. 세계를 파괴하려면 할 일이 정말 많다고."


키득.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여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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