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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검과 방패

Nake 2017. 7. 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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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색으로 발광하는 배양액이 가득 든 캡슐 안, 소녀가 종소리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소녀는 그 종소리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조그만한 새앙쥐부터 집채만한 괴물까지, 단잠을 깨우는 알람소리는 기분 좋은 것일리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종소리를 기다렸다.

응당, 그래야 하기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종소리가 울렸다.

'48.'

소녀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1

거대한 돔의 가장자리를 따라 놓인, 수만개는 되는 관중석이 모두 매진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때문에, 나데시코 기업의 수많은 대주주들은 단순한 유지비만으로도 연간 수천만 비트코인이 소요되는 이 경기장의 소유권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왔다.

하지만 전석이 매진되어 유지비의 수천배를 단숨에 벌어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이의는 침묵 속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다. '모든건 결과가 대변하는 것이다'. 회장인 알렉산더 샤프스톤은 그러한 자신의 지론이 옳음을 재확인할때마다 언제나 즐거워했다.

오늘도 그런 수많은 날 중 하나였다. 즐거움의 날. 재확인의 날. 증명의 날. 열한 자릿수의 크레딧의 날.

운명의 날.

샤프스톤은 경기장은 물론 전 우주에서 경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군중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박스석에 앉아 그 날을 맞았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모두가 개미같구나'라는 말이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쳤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형형색색의 개미들이라는게 그때와는 다른 것이겠지만.

이들을 모으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리우스 항성계의 행성 몇군데는 법적으로 직관이 금지되어 이를 우회하는데에 많은 법적 소요를 겪어야만 했다. 화성 이주민들은 또 어떤가? 주위를 부수며 쉽게 경기에 흥분하는 그들을 직접 관람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좌석 구간을 설계하는데에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건 지구인이리라. 관람 전용 우주 셔틀을 운용하는 것을 수지가 맞을 수 있도록 만드는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자금은 그만한 댓가를 받고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를 추진한 나데시코 기업과 관중 모두 승리하는 모범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좋은게 좋은거지.

잔을 들어 샴페인를 입에 머금자, 그 달콤한 쓴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푀베의 샴페인가 더 맛있단 이야기도 있지만, 샤프스톤은 샹패뉴의 샴페인만을 선호했다.

허세가 아니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샤프스톤은 웃으며 긍정할 것이다. 그리고는 말하겠지, 허세를 부릴 수 있다는건 큰 권력의 상징이라고.

그렇게 한모금, 목 뒤로 넘기자 경기장에 환호성이 가득 울려퍼졌다. 오늘의 상대가 등장한 것이다.





/2

'미식가', 카이라프 혹성의 현지인들은 가축만을 골라 습격하는 생명체를 그렇게 불렀다.

가축을 습격하는 괴물을 부르기엔 독특한 별명이다. 더욱이 위험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혹성에서 키우는 가축이 5m 크기의 이족보행형 육식 공룡이라는 점을 안다면 달리 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들짐승이 넘쳐나는데도 '가축'만을 사냥하는 그 노력에, 개척민들은 그 괴물에게 미식가라는 이명을 붙여줄 수 밖에 없었다.

몇년의 노력 끝에, 나데시코 기업 산하의 보안 업체가 미식가를 포획하는데에 성공하자 현지인들은 내심 아쉬워하기도 할 정도로, 미식가는 어느샌가 현지인들의 애증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지금 이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관객들에게도 저 괴물은 똑같은 감정의 대상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저 생명체는 본디 카이라프에서 잡아왔던 미식가와는 많이 달라져있던 것이다.

더 흉폭하고, 더 거대하고, 더 위험하게, 나데시코 기업은 끊임없이 미식가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재조립해, 그들만의 괴물로 만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괴물의 이름도 기업은 새롭게 지어야 했다.

'카이라프의 살육 기계'. 지금 링 위에 우뚝선 이족보행 생명체의 이명이었다.

본디 민첩한 움직임이 자랑이었건만, 이제는 수많은 유전자 조작으로 비대하게 커진 앞발로 땅을 짚지 않고서는 괴물은 자신의 상체를 들수조차 없었다. 그 앞발을 뒤덮은 갑각은 인위적으로 못박혀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진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곳곳에 자라난 거대한 가시는 육중하지만 날카로웠다.

그렇게 시선을 계속 위로 향하다 보면, 괴물의 얼굴이 모였다. 아랫턱은 자신의 것인지 먹이의 것인지 알 수없는 검은 피가 몇겹으로 굳어 있었으며, 끊임없는 고통에 증오를 넘어 환멸을 내보이는 두 눈동자만을 내어놓은 투구는 종말의 시선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우습게도 투구위에 새겨진 수많은 스폰서들의 로고들이 아이러니한 기괴함을 새로운 경지에 도달시키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괴물의 무서움은 그러한 세부적인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원초적인 경이로부터의 공포. 샤프스톤이 앉은 위치에서도 투구에 새겨진 로고가 명확히 보일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의 덩치가 관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단순히 카이라프의 살육 기계만을 위해서, 샤프스톤은 경기장의 바닥이 절반으로 갈라져 열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밑에서 링을 올라올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 앞에서, 관중은 환호했다. 그 괴물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을 수 있을지, 어떤 파괴를 불러올 수 있을지 상상해서가 아니었다. 그 끔찍한 죽음 앞에 새로운 환희를 느껴서도 아니었다.

이를 극복할 영웅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검투사! 검투사!""

관중들은 이내, 나오지않은 등장인물을 향해 크게 외쳤다. 제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조차, '검투사'라는 이름만큼은 지구의 언어 그대로, 크게 외쳤다. 경기장이 울리도록, 그리고 그 밖의 우주가 흔들리도록 외쳤다.

이윽고, 링 끝에의 굳게 닫힌 작은 문이 열리고, 소녀가 검과 방패를 들고 등장했다.




/3

"팻! 내가 놓친건 아니지?"

관중석의 한 구석, 갖가지 간식 - 버터구이 오징어, 팝콘, 그리고 시원한 유사 맥주 - 를 든 체로 검투사의 이름을 외치는 군중이 북적이는 통로를 헤치고 제자리에 돌아온 매튜가 그렇게 말했다.

"언제 오나 했네. 그래도 이제 검투사가 등장했으니까 늦진 않았어."

"빌어먹을 화성놈들, 새치기를 얼마나 하던지. 자. 네가 고른 팝콘."

팻은 환하게 웃으며 아직도 열기가 뜨끈히 남아있는 팝콘을 받아들었다.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의 땀냄새를 뚫고 팻의 후각을 자극해왔다. 지체없이 그는 팝콘을 한줌 쥐어 입 안에 던져넣었다.

"그래, 넌 누구한테 걸었어?"

매튜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괴물이지. 저걸 어떻게 이겨? 원래 작았을때도 보안 요원 수백명이 달라붙어 수십년을 쫓았다는데, 아무리 검투사라도 저건 못이겨."

팻의 말에, 매튜는 코웃음쳤다.

"에이, 솔직히 저걸 보고도 그렇게 반응하면 안되지."

팻이 코웃음에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요. 미르도의 쌍둥이 도살자를 베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

"뭐 그것도 대단하긴 했는데, 이건 사이즈가 다르잖아? 다가가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라고, 저건."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 경기를 보기위해 2년치 월급을 때려박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뜨거운 군중의 분위기와 훌륭하게 자리잡은 수반시설. 전 우주를 통틀어도 이만한 경기장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넌, 뭐 당연히 검투사 편이겠군?"

"당연하지!"

"너무 좋아하잖아."

질렸다는 표정으로 팻이 말했다.

"여기 티켓값보다 굿즈에 돈을 더 쓰지 않았었냐?"

"글쎄, 세보질 않아서."

"질렸다 질려."

"너도 나처럼 열심히 일을 하던가. 게다가 승부에 돈을 걸어서 충당하는 비용도 상당하고."

매튜가 입가에 맥주거품을 묻힌체 말했다.

"아, 시작한다!"

각종 언어로 이뤄지던 안내방송이 때마침 끝나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무거운 호각음이 울려퍼졌다. 싸움의 시작.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두사람의 위치에선 검투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돔 천장에 달린 거대한 스크린이 모든 장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면에서, 소녀는 칼을 들고 괴물을 향해 달려나갔다.



/4

수백미터는 되어보였다. 하지만 괴물의 덩치가 워낙 커서인지, 그 수백미터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처럼 보였다.

그 사이를 좁히려하는건 당연히도 소녀였다. 소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소녀의 뒤로 피어올라 흩어졌다.

미동도 않던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한건 바로 그때였다. 카이라프의 살육 기계는, 잠시 숨을 들이쉬고는, 소녀를 향해 내뱉었다

폭풍이 몰아쳤다.

소녀의 몸이 공중을 향해 붕 떠오르려 했다. 발 밑을 붙잡는 인공 중력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재빨리, 소녀는 칼을 땅에 박았다. 밀려나는 몸뚱이를 칼 하나에 의지한체 버텨냈다. 그리고 기다렸다.

폭풍이 그치기를.

고뇌한 보람이 있었다. 괴물의 폭풍은 이내 멈추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소녀는 칼을 뽑고는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수백미터의 거리는 어느샌가 수십미터로 줄어있었다.

괴물은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폭풍을 뱉지 않았다. 대신 푸르게 빛나는 자신의 위액을 뱉었다.

소녀는 그 액체가 입에서 튀어나오자 마자, 자신의 방패를 들어 상체를 가린체 앞으로 꾸준히 나아갔다.

퍽, 첫번째 위액이 착탄했다. 땅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불타오르며 녹아내렸다. 역한 냄새는 보너스였다.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퍽, 두번쨰 위액이 착탄했다. 이번엔 소녀의 앞이었다. 위액에 의해 증발하는 대지 위에 뜨겁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점프했다.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퍽, 세번째 위액이 착탄했다. 드디어, 노린 곳에 정확히 착탄했다. 방패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갑작스러운 열팽창에 방패가 진동하며 날카로운 음색을 내뱉었다.

하지만,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눈 앞을 가리던 방패를 크게 휘둘러, 방패에 묻은 위액을 털어냈다. 땅가의 작은 돌들이 녹기 시작하며 이리저리 튀었다. 이에는 신경쓰지 않은체,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 앞에 있어야할 괴물의 왼팔은 온데간데 없었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제서야 소녀는 괴물의 왼팔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무너지는 거대한 왼팔을 볼 수 있었다.




/5

"...할 때, 계약은 끝난다."

피흘리는 소녀를 눈 앞에 두고, 샤프스톤은 조용히 말했다.

"그 뒤에는, 이리나를 돌려주는거죠?"

힘겹게, 소녀가 말했다.

"물론. 계약이 끝나면 이리나는 온전히 자유의 몸이야."

샤프스톤의 말에 소녀는 침묵했다.

그런 소녀를 향해, 샤프스톤은 상호간의 의사를 재확인 하기 위해 방금 말한 문장을 되뇌었다.

"기억해. 네가 내 의사를 충족하거나, 그 와중에 죽음을 맞이할 때, 계약은 끝난다. 동의하는거지?"

소녀는 말했다.

"예."




/6

경기장을 가득 채운 흙먼지가 어느정도 가라앉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조금씩 커져갔다.

카메라는 소녀가 있었던 곳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검투사의 잔해를 찾으려는 것 마냥, 줌인과 줌아웃을 번갈아가며 대지를 훑었다.

소녀의 생사는 거부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이는, 괴물에게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마침내, 괴물은 자신의 왼팔을 다시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내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소녀가 없었던 것 처럼, 땅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초간의 침묵.

그리고 카메라는 황급히 시점을 전환해 괴물의 왼팔을 비추었다.

카메라는, 괴물의 거대한 팔 위를 내달리는 소녀를 비추었다.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괴물은 이내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왼팔을 쓸어내렸다. 피부에 벌레가 앉았을때 여느 동물이 행하는 행동이었다.

마치 눈을 해치며 다가오는 폭주기관차처럼, 괴물의 오른손은 자신의 팔 위에 가라앉은 흙먼지를 주위에 흩뿌리며 소녀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소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크게 뛰어오른다. 거센 바람이 오른손에 앞서 몰아쳤지만, 개의치 않아했다. 그리고는 칼을 거꾸로 쥐어, 오른손에 박았다. 그리고 견뎠다. 괴물은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오른손은 팔을 전부 훑고도 결코 멈추지 않았고 계속 움직여 원호를 그렸다.

자연스럽게 오른손이 괴물의 머리 위에 위치했을때, 소녀는 뛰어내렸다.

카메라조차, 그 격한 운동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수십대의 카메라가 소녀의 제각기 다른 부위를 프레임에 유지하는데 불과했다.

겨우 그녀를 화면에 잡았다 생각했을때, 소녀는 착지했다.

푹. 소녀의 검은 괴물의 목에 깊숙히 박혔다. 군중이 환호했다.

하지만, 괴물은 아직 죽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괴물은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 느껴온 고통 사이를 비집고, 공포를 느꼈다.

코 앞에 다가온 죽음과,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공포.

기괴한 신체구조 탓에 괴물은 스스로의 목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렇기엔 너무 크고, 거대했고, 길다랬다.

대신 괴물은 몸을 흔들었다. 그것 만으로도, 경기장이 흔들렸다.

하지만,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박아넣은 검의 고리에, 허리춤에 있던 끈을 풀어 메어 자신과 연결했다. 그리고 단검을 꺼내 살점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모세혈관이 터지고, 검은 피가 배어나왔다.

그럼에도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살점이 베어져 나갈때마다, 땅에 핏방울이 흩뿌려질 때마다 관중은 환호했다. 괴물은 고개를 돌려 목의 살로 그녀를 압살하려 했지만, 소녀는 그때마다 살을 놓고 떨어져, 검에 메여진 밧줄에 의지해 허공을 날아 다른 곳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는 찾던 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쉬지않고 두근거리는 맥박을 짚어내고만 것이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베어낸 상처를 방패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한번. 두번. 세번. 네번. 관중은 환호했다. 끊임없이 환호했다.

다섯번째로 소녀가 방패를 상처 사이로 내리쳤을때, 석유와도 같이 괴물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메마른 경기장위의 폭포가 되어, 땅을 적셨다.



/7

소녀는 검은 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단지, 시퍼렇게 뜬 두 눈의 흰자위만이 세상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땅 위에 서서, 검투사라는 이름을 연호하는 어디서 온지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응시할 뿐이었다.

허나 그렇게 응시함에도, 소녀에게 그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수만명의 군중 속을 보면서도, 그녀에게 군중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이는건 단 한사람 뿐이었다.

"이리나."

작게 말했다.




/153

형광색으로 발광하는 배양액이 가득 든 캡슐 안, 소녀가 종소리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소녀는 그 종소리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조그만한 새앙쥐부터 집채만한 괴물까지, 단잠을 깨우는 알람소리는 기분 좋은 것일리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종소리를 기다렸다.

응당, 그래야 하기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종소리가 울렸다.

'47.'

소녀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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