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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변하지 않는 전쟁

Nake 2017. 5. 1. 00:02



"나는... 가장 센 여자애가 좋은것 같아."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소년의 한마디가 세상을 전란에 휩싸이게 한지 4년째, 문명은 총칼 아래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되어버린걸까?


중립을 유지하던 이과 천재 예린이가 여자애의 '강함'을 판단하는 스카우터를 발명하고나서 부터였나?


아니면 대기업 총수의 장녀 경미가 가족의 재력을 위해 자신이 견제하던 다른 '강한' 여자애를 납치, 감금했던 일 부터라고 해야할까?


유학왔었던 미국 대통령의 딸, --(주 : 이름은 후에 편집되었습니다)가 군병력을 이용해 학교를 무법지대로 만들었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겠지.


근데 왜일까. 왜 기억속의 나는 그 추억들이 정말 즐겁고 웃긴 하나의 해프닝으로 남아있는걸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배고프고 괴로운데.


무너진 건물의 외벽을 기다시피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올라갔다. 총의 무게가 어께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이미 익숙하기에 괴롭지는 않았다.


이 위로 올라가면 뭔가 보일지 모른다. 뭔가 있으리라는 확신은 없지만, 엊그제 찾아냈던 레이션은 바닥을 보여가고 있었으니까.


먹을만한 고기가 보이면 정말 좋겠는데. 맷돼지나 고라니면 정말 좋겠지만, 그건 욕심일 것이다. 개 정도만 되도 정말 좋다. 쥐고기는 너무 뼈가 많으니 말이지. 


하지만 그 위에서 발견한건 정말 의도치않은 행운이었다.


[서열 2위. 속성 - 소꿉친구]


재빨리 들어올린 스카우터도 내 예상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그래. 내가 기어올라온 건물 반대편 모서리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여자애는, 기억속의 다혜가 맞았어.


조용히 라이플을 견착, 차분하게 ACOG 스코프의 십자선에 다혜의 등을 맞추었다.


다혜를 죽이는데 성공한다면 '동창회'에서의 내 입지도 올라갈 것이다. 지금껏 존재없는 엑스트라로 살아왔던 내가 빛날 수 있는 기회다.


왜 이제와서 순위에 집착하냐고?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는 삶을 고수해왔으면서?

 

튀지 않는건 오래사는데 도움을 주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고단하다는  것도 근 일년간 뼈저리게 느껴왔다.


더이상은 아냐. 방아쇠를 지그시 당겼다.


하지만 스코프 안의 다혜는 순식간에 흔들리며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이런 젠장!


차가워지는 해질녘의 공기를 총성이 찢어낸다. 


재빨리 박차고 허리를 곧추세운뒤 눈으로 움직임을 따라갔다. 시야에서 사라졌다면, 아마 건물 아래로 내려간거겠지.


땅을 박차고 일어나 다혜가 앉아있던 모서리로 다가갔다. 지금이라면 위에서 조준할 수 있을거-


"으악!"


갑자기 시야 밑에서 뻗어온 손이 총몸을 붙잡았다. 맞서버티려 방아쇠를 짓눌렀지만, 아까운 총알이 허공에 흩뿌려질 뿐이었다.


"이, 이거 놔!"


총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부질없는건 알았지만, 한번 시도는 해봐야지.


"다짜고짜 총을 들이 밀었으면서 배짱도 좋네!"


오랜만에 만난 다혜는 내 말을 그렇게 받아쳤다. 


"어쩔수 없잖아. 이 세상에선 - 뻔뻔하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별수없이 총몸에 둔 왼손을 되물려 허벅지의 홀스터로 뻗으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삶은 더이상 싫다고. 


"2위인 넌, 결코 모르겠-커헉!"


하지만 권총을 뽑아들기도 전에, 다혜의 매서운 주먹이 명치를 강타했다. 메달린 상태에서 그게 말이 되나고-!


숨을 쉴 수 없는 격통에 무릎을 꿇은 사이, 그녀는 모서리에서 뛰어나 매끄럽게 몸을 돌며 다시금 건물 위에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육상부였지. 뒤늦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제엣- 제엔-..."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마. 스스로만 괴로워지니까."


욕짓거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 향해, 다혜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권총가 라이플을 빼앗아가는 주제에.


"너엇, 너언..."


"천천히 숨을 들이쉬어. 괜찮아. 괜찮으니까."


"뭐어갓... 뭐가.."


"괜... 괜찮아."


마치 못 만질걸 만진다는 듯, 다혜는 날 향해 손을 뻗으려다 잠시 움찔했다. 싫어. 싫다고.


날 그런식으로, 너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는 것마냥 무시하지마. 


나는 그대로 뒷허리에 숨긴 나이프를 꺼내 휘둘렀다.

 

최후의 발악.


"-큿!"


"무리하지 말래도."


하지만 그 발악은 아무것도 아닌양 제압당했다. 내가 원래 그리하듯 말이다.


당연하긴 했지만. 그 맥빠진 일격에 전 체육계가 당할리 없었다.


다혜와 나는 애초에 격이 다른 것이다. 2등에 빛나는 소꿉친구와, 순위권인 엑스트라라는 큼지막한 격의 차이가, 이토록 심하게 느껴질줄이야.


더는 싫었다. 바보처럼 무시당하는 것도, 짐짝인양 취급당하는 것도. 


모든게 괴로워 도망쳤건만 내몸을 의지할곳은 하나 없는걸.


"흐흑... 흐윽... 흐끄으윽..."


울음이 나왔다. 너무 자연스럽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젠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므- 미안! 미안해! 너무 아팠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혜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혜는 왜 놀라는거지? 전세계가 목숨을 노릴 '탑 10'인 그녀가, 싸움의 시작부터 함께해왔을 그녀가, 왜 내가 괴로워한다고 놀라워하는거지?


어째서, 총을 내려놓고 무릎에 내 머리를 올리고 안색을 살피는거지?


왜?


"은하야, 괜찮아?"


왜, 다혜는 내 이름을 기억하는걸까?


"왜?"


"뭐가?"


"왜냔 말야. 왜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날 돌보고 있는건데? 난 서열 95위에 특징도 없는 엑스트라라고.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잡몹에 불과한데. 왜?"


울음은 멎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너무 괴로웠다.


다혜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한심하다는건가? 의미없다는건가? 


"그, 뭐냐."


그 말을 바로 하기엔 무안한거겠지?


그렇게 생각할때였다.


"좋아하는 애 이름을 어떻게 잊겠어."


뭐라고?


"좋아한다니. 내가 그렇게 우스워?"


"아니, 여기서 말하긴 정말 무안하지만... 진짜야."


다혜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더 자상하고 따뜻한, 나마저 반해버릴 따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넌 2위잖아. 그, '녀석'의 소꿉친구잖아."


순간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다혜는 내 질문에 마저 답했다.


"그거야, 예린이의 스카우터가 측정하는건 강함의 정도고, 그... 새끼하고는... 그냥 옛날부터 알던 사이일 뿐이야. 지금와서는 죽여 시원찮을 새끼라고 생각하는걸."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하지마. 이렇게 만나게 되서, 이렇게 말하게 되서 정말 미안하지만, 널 좋아해. 좋아하고 있어, 은하야."


왜 그렇게 말하는건데. 왜 그렇게 자상하게.


왜 날 사랑하는건데.


"이유따윈... 없어. 복도를 지나가다 옆 교실에서 딴청피우던 너와 눈이 마주쳤을때부터 줄곧, 널 좋아해왔어. 네가 책을 좋아한다는걸 알고 도서관에서 네가 읽은 책을 읽으려고도 해봤고, 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적어서 주려고도 해봤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너에게 고백하려고도 했단말야."


몰랐다. 아니, 그저 모르려했을 뿐인가. 몇번, 우연찮게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그건, 우연이 아니었던건가.


"널 좋아해."


다혜가 다시 속삭였다.


"그리고 미안해. 지금에서야, 이런 상황에서야 고백하게 되서. 그리고... 너와 계속 사귀지 못하게 되서, 정말 미안해."


뭐?


"잠깐, 이거 놔."


"괜찮아졌어?"


다혜는 금새 내 위에 올린 손을 떼고는 내가 상체를 들고 앉을수 있도록 부축해주었다.


따스하고 배려가 담긴 손길.


"갑자기 무슨소리야? 왜 함께하지 못한다는거야?"


"그거야... 난 2위라고. 모든 사람들이 날 노려. 네가... 그랬던것 처럼."


"뭐?"


말도 안되는 이유였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


후회도, 절망도 더이상 없었다. 그저 화가 났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리고 소리질렀다.


"너도 똑같아. 네 마음대로 소리지르고, 네 마름대로 후회하고, 네 마음대로 사과하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떤 일을 할수 있는지는 신경쓰지도 않고 단정짓고! 바보같아. 하나같이 바보같아!"


울음도, 고뇌도 더이상 없었다.


"마음대로 좋아해놓고, 마음대로 고백해놓고, 마음대로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하고! 뭐냐고! 뭐가 되는 거냐고!"


"난-"


"그만! 지껄여. 그만 지껄이고 내 말을 들어! 난 널 몰라. 잘 알지 못해. 그리고 분명, 너도 날 잘 알지 못할거야. 그러니 네가 좋아하는 나는 더이상 없을거라고 생각해."


"..."


다혜의 얼굴이, 지금 생각하면 줄곧 이상하리만치 밝고 희망차있었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내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부터 알아가야겠어."


"그럼-"


"오늘부터 1일이라고."


그렇게 다혜의 눈이 빛났다.


오래전에 저문 석양을 채운, 밤하늘의 샛별보다도 더 환하게.


누가 말했었지,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랑은 변하는 법이다. 뭐, 애초에 '녀석'을 사랑한적도 없었지만.


왜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도 못할 옛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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