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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리볼버의 총성이 멎은 후

Nake 2020. 2. 13. 16:38

"머, 멈춰! 그래, 자네를 고용하도록 하지, 제프리! 얼마, 얼마를 받았지? 10 그랜드? 15? 두배, 아니 세배는 주지! 멈춰! 멈추라고!"


빅 알의 처절한 목소리가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는 호보켄의 골목 구석에서 울려퍼진다. 선량한 시민이라면, 사회의 정의를 믿고, 비가 온 뒤에는 아름다운 무지개와 맑은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라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어둡게 타락한 마음의 한 구석 아주 작은 가능성으로 그러한 희망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 911로 향하는 다이얼을 재빨리 누를터였다. 그럴만했고, 그래야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 대륙에 발딛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스스로 세운 나라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이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무시하는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될 터 였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바로 이 골목, 녹색 쓰레기통 바로 옆,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바로 이 어두운 구석이야말로 메이즈가 죽은 자리였으니까.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본다면, 흥건히 젖은 아스팔트 표면위에 녹아 떠다니는, 사체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경찰이 그려넣은 분필자국이 보일지도 몰랐다. 바로 이 곳에서 빅 알이 울부짖게 되다니. 우연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면, 필연일지도. 빅 알은 호보켄에서 태어나 호보켄에서 살아가는 놈이다. 그의 손아귀에 걸린 메이즈의 죽음은, 그리고 그 인과관계에 말미암아 찾아오게 될 터인 빅 알의 죽음은 호보켄에서 이뤄졌고 또 이뤄질 수밖엔 없었다. '이제 와서야 눈치채다니.' 5년째 담배를 피워 걸걸해진 메이즈의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듯 했다. 피곤함에 찌들어 옷 매무새조차 제대로 다듬지 못하던 그녀, 그럼에도 다른 이들의 열배는 되는 작업을 홀로 처리하던 그녀. 그런 그녀도 이 곳에서 비명을 질렀겠지. 고함을 치고, 죽기전에, 지나가는 다른 한 사람의 선의를 믿고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겠지.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이 골목은 비명을 듣지 않았다. 일말의 선조차 없는, 소리는 그저 허공에 흩어지고 마는 좁고 외로운 골목.


가늠쇠 너머 비와 피에 젖은 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생존의 가능성을 비굴하게 엿보는 빅 알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왜 메이즈를 죽였는지 물어봐야 하나? 퉁명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듣고 나름의 재미없는 유머를 곁들어 충고하던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야할 이유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게 된 메이즈의 입술로 얻어내고 만 조그만 자유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물어봐야 하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탕.


아니. 구태의연하게 물어볼 필요는 없다. 사립 탐정은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사람이지, 또다른 미스터리를 만들지 않는다.


화약내음은 빗 속에 씻겨 금새 사라지고, 빅 알의 비명도 같이 하수구로 흘러내려갔다. 미동도 하지 않는 녀석의 눈알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리볼버를 허리춤의 홀스터에 쑤셔넣었다. 총성과 시체에 사람이 꼬여 경찰이 노란 테이프를 골목 앞 뒤에 붙여넣었을때 즈음에는, 제프리라는 이름의 사립 탐정은 메디슨가의 낡은 사무실에 들어가 싸구려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켜는 중이었다.






[호보켄의 비명]


[끝]






바로 같은 시각, 토드 맥켄지 하워드라는 이름의 사진작가는 술을 한방울도 입에 대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일을 하는 순간에는 술을 한방울도 입에 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거의 종교적인 버릇이었다. 주 35시간이라는 정확한 스케쥴에 노동시간을 맞추는 종류의 직업군이 아니기에 작업 시간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금주라는 불문율만큼은 반드시 지키고는 했다. 이는 다시말해, 토드 맥켄지 하워드는 술을 입에 대는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토드 맥켄지 하워드는 자신의 명의로 등록된 고동색 도요타 프리우스를 몰아 델라웨어 워터갭 국립공원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의 블로그에 따르면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델라웨어 강의 산 새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출근에 가까웠다.


소니 a9 카메라와 이를 위한 SEL70200G 망원렌즈를 전용 케이스에 넣어놓은 그로썬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아침 일찍 날아올라 굶주린 허기를 채우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그의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뛰었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굽이치는 도로에 들어서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델라웨어 강에 채 닿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차량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그리고 제프리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몇년여의 경찰 생활과 그 배는 되는 사립 탐정의 삶 동안 그가 배운게 있다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미국 정부의 허술함을 주의깊게 눈여겨볼 수 잇는 신중함과 인내심만 가지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새로운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고 말이다. 오히려, 누군가 죽었다고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제프리는 이를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제프리와 비슷한 직종에 있는 사람이라고 모두 제 2의 신분을 만드는건 아니었다. 그런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면, 1979년 2세의 나이로 메릴랜드 주 베세스다에 묻힌 아기의 이름을 얻는건 불가능했을 테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제프리는 괴짜였다. 하지만 변명은 있었다.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일은, 제프리라는 이름의 사립 탐정으로써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토드 맥켄지 하워드라는 이름의 사진 작가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삼각대에 소니 a9을 올려놓고, 토드 맥켄지 하워드로 행세하는 제프리는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았다. 고요히, 지난주 미카무라 부부의 불륜을 촬영할 때와 같이 망원렌즈를 조작하는 제프리는 델라웨어강을 날아다니는 논병아리과 조류를 포착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렌즈는 델라웨어 강의 정 반대편을 향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제프리는 실버 빌리지 카운티의 커뮤니티 센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 일찍, 이곳의 커뮤니티 센터에선 청소년을 위한 수영교실이 열린다. 이 교외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이 교실은 필수가 아니지만, 동시에 이 아름답고 축복받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마땅히 보내야 할법한 수영교실이기도 했다. 따라서, 코니라고 불리는 15살 소녀도 매주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커뮤니티 센터에서 수영교실에 참석했다.


문제가 있다면, 코니의 부모 모두 토요일 오전에 직장에 근무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침 일찍 코니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커뮤니티 센터 앞에 내리지만, 실버 빌리지 카운티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돌아갈때에는 도로를 따라 10여분을 걸어 홀로 집에 돌아가야 했다. 이를 두고 다른 부모가 뒤에서 수근댔지만, 코니와 그녀의 부모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들이 코니를 키워줄 것도 아니었기에.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이를 혼자 두지 않는건 중요한 문제였다. 둘 중 한명이라도 신경을 썼었더라면, 아니면 애초에 커뮤니티의 친목 행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서 불필요한 수영교실에 아이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제프리가 기회를 포착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허나 이는 사후약방문이다. 제프리는 코니가 아버지의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을 똑똑히 눈에 새겼다. 작고 새침한 소녀가 인상을 쓰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번주, 저번달, 지난 겨울에 그랬었던 것처럼.


마침내 제프리는 결심했다. 오늘이다. 방금 전, 코니의 부모는 코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코니는 수영장에 들어가 1시간 30분 동안 수영교실에 참여한 이후 귀가할 것이다. 여기서 언덕길을 프리우스로 내려가면 1시간 가량 걸릴테고, 실버 빌리지 카운티까지는 32분이 소요될 것이다. 대로를 지나가는 순간, 머리를 말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코니에게 집까지 태워다 줄지 물어본다. 코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진 않을터였다. 하지만 코니는 나를 알고 있다. 명목상으로, 실버 빌리지 카운티는 토드 맥켄지 하워드의 작은 프로젝트를 후원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센터의 사진 교실에, 코니도 학생이었었다. 코니가 프리우스의 조수석에 탑승하는 순간, 토드 맥켄지 하워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코니라는 이름의 작은 소녀와 함께.


사람들은 코니를 찾아나설 것이다. 당연했다. 다른 수많은 부모들도 그리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남긴 이름을 열심히 파봐야, 이내 베세스다의 영유아 화장터에 안치된 익숙한 이름의 유골함만을 발견하게 될 터였다. 그 수많은 이름들과 나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점도 없었다. 그게 당연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제프리라는 이름의 사립탐정은, 맨해튼 섬 안팎의 빌어먹을 뒷골목에서 얻어맞은 상처를 부여안고서 술독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아무도 찾지 마시오'라는 푯말을 문 앞에 붙여놓은 체로.


운전대를 굳게 쥐고 제프리는 생각했다. 바로 몇시간 전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길때, 제프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승리했다는 쾌감이나, 복수를 달성했다는 해방감은 커녕, 그가 처한 듯 보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지프스의 지옥에 대한 고통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일까, 제프리는 생각했다.


덜컹이는 산길에서, 제프리는 조그마한 결론에 다다랐다. 미스터리를 해결하는데에, 제프리는 더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말이다.


그리고 오직,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드는 작은 일탈만이, 그에게 희열을 가져오고 있었다. 실버 빌리지 카운티 대로에 들어서며, 옅은 미소를 지은 토드 맥켄지 하워드라는 이름의 제프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뭐에요?"


잔뜩 쌓인 원고를 슬쩍 들여다보며, 조수가 탐정에게 물었다.


"작은 일탈."


"다크 서클봐. 잠도 안자고 이걸 쓴 거에요? 나이도 좀 생각하라구요."


탐정은 술이 섞인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뭐야... 탐정 소설?"


조수는 앞부분을 슬쩍 읽고는 대충 짐작하며 이야기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왜, 요즘에 들어오는 일이라곤 불륜에 도망친 세입자 찾기밖에 더 있어? 미스터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탐정이라면, 미스터리를 만들기라도 해야할거 아냐."


"헤에, 확실히 이딴 일보단 돈이 더 벌릴지도 모르겠네요."


조수의 날섞인 비난에 탐정은 쓰게 웃으며 받았다.


"그래도 정신 차리세요. 머리도 감으시고. 10시에 아만다 양이 의뢰를 가져온다고 했으니까요."


탐정은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한차례 숙였다. 받들어 모시겠다는, 자학적인 수긍.


"뭐, 책이 나오면 잘 팔릴것 같긴 해요?"


"나온다는 보장도 없는걸."


"그래도 말이죠 제프리, 믿을만한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저 이야기에 진실이 섞여있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물론, 나만의 비밀 소스를 첨가했으니 걱정 말라고."


탐정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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