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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등대지기

Nake 2020. 2. 26. 15:07

철제 계단을 타박타박 올라오는 발소리에 곁잠이 깨였다. 졸린 눈으로 바라본 얼어붙은 차창 밖의 하늘은 아름다운 은하수가 변함없이 반짝이고만 있었다.

 

"야식 가지고 왔어!"

"고마워, 언니."

 

대답에 이를 보이며 환하게 보이는 언니는, 행동거지로만 미루어 보면 동생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야식이라고 가지고 온 따뜻한 스프가 찬합 곁에 이리저리 튄 흔적을 보더라도 말이지.

 

"네가 좋아하는 버섯 스프와 으껜 감자 가지고 왔어!"

"맛있겠다."

 

나는 빈 책상 위에 언니가 가져온 쟁반을 올려두고 감자가 담긴 그릇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고소한 스프 냄새가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바로 몇분 전까지 펄펄 끓었을 스프는 차가운 층칸 사이에서도 푸근한 온기를 잃지 않아, 차갑게 식어있던 으껜 감자도 스프에서 뿜어져나오는 수증기와 함께 맛좋은 페이스트로 순식간에 변화시켰다.

 

"아, 너무 좋아. 등대 보는 일은 정말 지치지만, 언니의 스프가 있어서 버틸수 있어."

"언제나 고마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금방 가져올테니까."

"아냐. 이거면 충분한걸."

"불이라도 켜줄까?"

"아니, 괜찮아. 밤눈은 익숙하니까. 또 불빛을 보고 아래에서 착각할수도 있구 말야. 먼젓번 같은 소동은 더이상 사양이라구."

"후후."

 

내가 스프를 떠먹는 동안, 언니는 창에 손을 대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옛날에는 저 검은 하늘에 수놓여진 별을 하나하나 즐거운 이야기와 엮어 기억했던 세상도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언니도 나도 이야기의 하늘은 알지 못했다. 옛 세상과 함께, 별들의 이야기는 흘러 지나가 버렸으니까.

그렇기에, 아름다운 창 밖의 풍경은 내겐 그저 고요한 명상의 소재이자,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할 수 있게 도와주는 척도일 뿐, 실질적으로 날 즐겁게 만들어주는 경치로 자리잡진 않았다. 지금 언니가 그리하듯, 즐거운 소설을 읽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볼 수는 없었다.

 

"뭐라도 보여?"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어. 보이니?"

"언제나 보고 있는걸."

 

무심하게 대답했다.

 

"우와, 정말 대단해. 아름다워."

"여느 때와 똑같잖아."

"그렇지 않아."

 

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지. 그렇겠지. 나는 언니가 내 대답을 바로 거절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문답을 한두번 한게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내가 언니의 말을 반박한건, 이 반복되는 시간이 결코 싫지 않기 때문이다. 이 따뜻한 스프 만큼이나 언니의 목소리는 추운 등대를 따뜻하게 데워주웠으니까.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저 밤하늘의 별들은 매 시간, 매 분, 매 초, 쉬지않고 야금야금 움직이고 있는걸. 어느 별은 사라지고 어느 별은 새로 생기면서, 시시각각 새로운 하늘을 만들어간단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은 지금 우리만이 만끽할 수 있는 하늘인거야."

"그게 그렇게 신기한건지,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등대 지기였으면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텐데."

"하지만 그건 등대 지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구."

"그야 그렇겠지만, 졸고 있는 것도 등대 지기의 일은 아닐거라구?"

 

다 알고 있다는 듯, 언니가 짖굳게 웃었다. 바보. 나는 찡그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등대 지기는 정말 멍청한 일인걸. 봄을 찾으라니, 바보같아. 나는 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걸!"

"그렇게 말하지 마렴? 봄은 찾아올거란다. 늦든 빠르든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언니도 봄을 본 적은 한번도 없으면서."

 

언니의 표정이 머쓱한 웃음으로 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지평선의 끝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옛 이야기를 떠올릴때의, 언제나의 표정. 내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도 봄을 본적은 없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해. 내가 듣기로, 봄이 되면 하늘은 파랗게 변해 따스함을 지니고, 땅 위의 눈을 문질러 녹여 갈색 흙을 불러낸다고 하는데다, 먹구름은 눈이 아니라 물방울을 떨어트려 땅을 촉촉히 적시고, 그 사이에서 녹색의 식물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고 하니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야. 몇몇 풀은 따뜻해진 봄을 틈 타 아름다운 꽃을 피워 풀 사이에서도 멋지게 자기를 뽐낸다고 해. 샛노오란 개나리나 연분홍의 벚나무. 거기에 태양이 지평선 어귀에 걸린 때의 새벽녘의 하늘과도 같은 색의 제비꽃까지. 정말, 정말로 아름다울거야."

"에이, 그건 너무 거짓말 같다. 하늘의 색과 같은 꽃이라고? 그럼 그 꽃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책에서 읽은 이야기니까."

"봄이 온다는 것도 책에서 읽은거야?"

"물론. 겨울이 지나면 언제나 봄이 찾아온대."

 

쟁반을 앞으로 밀고 팔을 포개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이라도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는 행동이었지만, 더 나아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자세를 원하고 있었다. 언니의 목소리 만큼이나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자세였다. 그렇게 고요히 생각하다, 문뜩 떠오른 물음을 입 밖으로 내었다.

 

"옛 사람들은 봄을 몇번이나 본걸까?"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는 책에 적어두지 않았는걸."

"하지만 자신있게 책에 적을 정도라면, 정말로 많이 본 걸꺼야. 안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누구든 태어나면 한번쯤 봄을 봤을거야. 그렇지 않다면 봄이라는 단어가 나올때마다 단어의 설명이 세세하게 적혀 있을테니 말야."

"운이 좋다면 열번 넘게 봄을 봤을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옛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았구나."

 

센치해졌다. 평소라면 등대지기를 하면서 이런 감정에 젖어드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등대로 올려보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요한 우울감에 젖어드는 감정이 내 마음 속에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언니와 함께 이야기할때면 여러 감정들이 고개를 들고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고, 나는 결코 그게 싫지 않았다. 이런 감정에선, 언제나 같아보이는 하늘도 달라보이곤 했으니까.

 

"옛 사람들이 부러워?"

"글쎄. 잘 모르겠어. 태양이 있었던 하늘 따위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고, 이 땅이 밤이 아니었던 적도 한번도 본 적 없으니까. 하늘이 밝게 밝아오면 잠든 사람을 깨우라는 등대 지기의 임무도, 이제 와선 사실 잘 모르겠고. 모르는걸 부러워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봄이 오면 네가 가장 먼저 알아채야 하잖아?"

"일단은 그렇지만 말야..."

 

말꼬리를 흐렸다. 태양을 잃은 지구가 원래있던 자리를 떠나 항해를 시작한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했다. 그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나로서는 알 방도도 없었기에, 봄이 다시 돌아올지, 아니 애초에 이 항해가 끝이 나긴 할련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등대를 지키고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내 등허리를, 언니가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도대체 언제 뒤로 돌아간거람.

 

"그런 동생에게 동기 부여를 해줘야 하겠는걸. 내가 가지고 있는 봄을 나누어주도록 하지."

 

언니는 날 껴안은채로 고개를 어꼐 위에 올려 말을 이어갔다. 따스한 숨결이 뺨을 간질였다.

 

"봄을 나누어준다구?"

 

나는 되물었다.

 

"그래. 내 생각에, 봄은 정말 따뜻하고 포근한거야. 잠자던 세상도 무심코 깨어 다시 삶을 시작할 정도로.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온기고, 희망인거지. 내게 있어 봄과 같은 희망은, 내 사랑스런 동생과 함께 있을때 느껴지고."

 

씨익 웃었다. 멋진 말이잖아. 나는 생각을 멈추고, 언니의 뺨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봄은 정말 좋은거네, 언니. 겨울이 끝나는게 기다려져."

"물론이지. 끝이 나면 이 언니에게 바로 알려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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