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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노인 사냥꾼

Nake 2020. 3. 2. 23:54

"아이야,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느냐? 너는 내가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인 젊음을 가졌을진데, 어찌하여 그리 두려워 떨고 있느냐?"

 

익숙한 목소리가 을씨년한 옛 수퍼마켓을 울렸다.

자주 돌아다니던 곳이라고, 이미 안전을 확보했었다 믿고서, 지나치게 안이한 판단으로 무기를 놓고 온 내 잘못이 가장 크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발, 신이시여. 나는 숨죽여 흐느끼며 빌었다.

어째서 왜 아버지이십니까.

 

"그만하고 나오거라. 출구는 한 곳이고, 그 곳은 내가 잡았을 터, 네가 나올 구멍은 틈새조차 없단다."

 

저 온화하고 지혜로운 말투는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씨였다. 그랬기에 공포는 더해졌다.

살갗이 콘크리트를 붙잡는 소리가 메아리칠만큼 연속해서 들려오는 와중에, 그 목소리가 섞여들려오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전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였다. 모든 지혜를 직접 겪고 스스로 생각해본 사람이었다. 내가 살지 못한 분량만큼,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여느 노인들 처럼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내 목숨과 육신을 탐하려 덤벼들 생각이었다.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하느냐? 별 수 없구나. 가끔씩은 몸을 움직여야 하기도 하는게 장수의 비결이기도 하니 말이야. 네가 말했듯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될 때까지 살려고 하시진 않았지 않습니까, 아버지. 알아선 안되는 것을 알아버린 다른 수많은 노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겠다고 저와 약속하셨잖습니까. 어째서 우리가 사냥하기로 맹세한, 세상을 무너트린 존재가 되어 제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까.

수십개의 발소리가 가장 모서리의 진열대쪽에서 울려퍼졌다. 거대하고 위대한 존재 특유의, 기괴한 발소리. 더이상 인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비대해진 자아의 발소리.

매장 반대편에 있던 나는, 발소리를 죽여 중간의 진열대 사이로 숨어들었다. 당장의 시선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그러면서 조용히 움직여야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것은 노인을 더이상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더 민감하고 더 세심하게. 수십년의 생애 그 어느때보다 총명하고 약삭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여느 개체가 같지 않고 제각기 다른게 노인이란 존재였다. 똑같은 전략이 통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때문에 나와 아버지와 같은 사냥꾼들은 매번 노련한 전략을 짜내야만 했다. 언제나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언제나 희생이 뒤따랐다. 매번 생각했지만, 기적적이었다.

우리의 사냥이 성공했던 이유는, 노인이 사람을 사냥하기 위해 머리를 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며, 진열대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구멍이 송송 뚫린 철제 진열대 사이로, 기괴한 살과 뼈의 기차가, 텅 빈 철제 진열대 사이를 하나하나 휩쓸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돌려 입구로 향한 순간, 입이 없는 얼굴이, 10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그 텅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꼬리. 그리고 바로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심했구나."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입만이 달린 몸통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는 투의 목소리로. 그리고는,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날 책망하지 마세요, 아버지. 저는 잘 했다구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진열대를 세차게 밀치고서 입구를 향해 달렸다. 진열대는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제일 끝에 있을 아버지의 몸을 압박하길 빌었다.

하지만 진열대가 부딛치는 파열음에도 아버지의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식욕을 감추지 않는 노인의 숨소리가 저돌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 세상이 뒤집혔다.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어째서지? 붙잡힌건가?

그러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냐. 그저 쓰러진 빗자루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 뿐이야.

이렇게 죽는건가? 사냥하기로 맹세한 것의 가죽을 둘러싼 아버지의 양식이 되어?

허공을 날며 뒤로 향한 시선에,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그 또한 운명이라면.

 

그리고 굉음이 울려퍼졌다.

거대한 지네와도 같은 노인의 몸뚱이는, 자신의 아들의 코 앞에서 침을 늘어뜨리며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한 입. 그거면 충분했다. 오랜 지혜를 가진 노인은, 턱을 한번 움직이는 것으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 입이, 닿지 못했다.

철의 덫에 끼인 몸뚱이는 자신의 위에 깔린 철덩이를 뿌리치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부림쳐봐도, 여러 각도로 꺾인 몸이 움직일 틈이 없었다.

노인의 자식은 사태를 겨우 이해하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부러진 빗자루의 나무 몸대를 창처럼 곧게 들고서.

 

"아버지."

 

마치 저녁인사를 나누듯, 눈물을 흘리는 자식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빗자루를 얼굴 한 가운데에 꽃아넣었다.

피가 쏟아지지만, 그는 닦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피로 몸을 적셨다. 그것이 자신의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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