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의 무개념 분지

정류장에서 본문

소설

정류장에서

Nake 2020. 3. 2. 23:56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차갑고 검은 물이 얕게 깔린 바닥과 별 하나 빛나지 않는 하늘을 나누어 볼 수 없는 평야에 아이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봐요.

아이가 왜 여기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 곳은 정류장일 뿐이니까요. 아이는 성장하며 수많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고,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마침내 아이가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와는 큰 상관이 없기 때문이죠.

아이는 생각합니다. 너무 어두워.

아주 잠깐이지만, 바로 그 순간 빛이 지나갑니다. 빛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지는 빛 말이죠. 주위를 둘러보기엔 부족해요.

하지만,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이 천둥소리가 지나가고도 시야에 남아있는 것처럼, 순간 눈에 아로새겨진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찰나에 아이는 거대한 건물을 목격합니다.

전에 그런 건물을 본 적 있을까요? 사진으로, 글로, 말로만 보았을지도 모르죠. 어쩌면, 아이는 그런 건물이 있을거라는 발상조차 떠올리지 못해,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그 광경이 실재인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눈으로 본걸 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아이 옆으로, 한 어른이 지나갑니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며 살아가고, 그것이 빛 하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되진 않을테니까요.

이 어른이 아이와 피가 이어져 있다고 보진 않아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완벽한 타인으로 가정해,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인생동안 서로 마주칠 일이 한번도 없을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구요.

다만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만큼은, 두 사람은 같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수많은 세상의 물결 속에서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진실이에요.

아이는, 어른에게 자신에게 본 건물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닿을만큼 높고 커다랗지만, 옥상에만 창문이 달려있는, 벽만이 둘러쌓고 있는 거대한 탑을 보았다고 말이죠.

어른은 곰곰히 생각합니다. 어른은 빛이 지나가고서야 아이와 마주쳐, 그 광경을 목격한 적 없으니까요.

어른은 상상합니다. 하늘에 닿을만큼 높고 커다랗지만, 옥상에만 창문이 달려있는, 벽만이 둘러쌓은 거대한 탑을요. 짧은 고민 끝에, 어른은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건 등대란다, 어른은 점잖게 말합니다. 아이가 점잖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른은 적어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생각하고 있을거에요.

아이는 다시 물을거에요. 등대라구요? 그게 뭐죠?

어른은 답하겠죠, 그건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지표라고 말이죠.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희망이라구요.

하지만 저건 불이 없잖아요. 아이는 당연히 되물을겁니다.

글쎄. 어른은 궁리합니다. 등대지기가 없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이 곳은 텅 비어있는 아이의 세상. 등대지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등대지기를 찾아겠다고 선언한 아이는, 등대지기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걸 그제서야 깨닿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어른에게 묻습니다. 등대지기가 무어냐구요.

어른이라고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등대지기가 무엇을 하는지 만큼은 등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명할 수 있는 법이에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앞을 가려도, 폭염이 내리쬐고 홍수가 입구를 막더라도, 불꽃을 오롯이 지키며 기다리는 이, 라고 말이에요.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이는 묻습니다.

어른은 고개를 젓습니다. 이 곳은 아이의 땅, 어른은 그저 지나갈 뿐이니 거기까지 알수는 없는 법이죠.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겠네요. 이 뒤를 자신있게 이야기할 자신은 없어서요. 이 부분만큼은, 당신의 상상 이상으로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을거라 보진 않거든요.

깨달음의 순간은 누구나 다른 법이니까요.

물론, 모든 아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건 아닐지도 몰라요. 어둠 속에 너무 오랫동안 있어서, 빛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는 단순히 지나갔어야 했을 정류장에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죠. 방금 스쳐지나간 어른도, 그런 아이일지 몰라요.

하지만, 눈을 감고 떠올려봐요. 빛을 필요로 했었던 건 누구인가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희망을 바라던 사람은?

생각해요. 등대가 밝게 타오르고 있죠? 등대에서 비추는 눈부신 빛이 세상을 비추어,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평원의 면면을 시야에 담을 수 있죠? 이곳은 당신의 세상, 저 등대는 당신의 등대, 그렇다면 그 곳의 등대지기는 오롯이 당신인 거에요.

네, 당신은 등대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요. 가까이 가는건 불가능해보일지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빛이 필요하다고 믿는 한, 저 불은 꺼지지 않고 당신을 기다릴 거에요.

그러니 믿는걸 포기해선 안되요. 짙은 안개가 끼어 어디로 가야할지 헤멜 때도 있고, 누군가 일부러 등대를 가려버릴 때도 있을지 몰라요. 가는 길에 커다란 가시덤불이 자라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길 잃은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등대를 기억한다면, 방금 떠올린 멋진 세계를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이 불을 지킬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는다면, 빛은 사라질 일이 없답니다.

 

그러니 눈을 떠요. 그래요. 어둠은 아직 가시지 않았죠.

아직 세상은 어두컴컴하고, 우리는 정류장에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제 당신은 등대지기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요.

 

이 세상 먼길을 가는 동안, 언젠가 다시 한번쯤 만날 수 있길.

어른은 어른에게 말하고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우연히도, 둘 모두 등대지기였답니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니피그  (413) 2020.03.25
노인 사냥꾼  (0) 2020.03.02
힘내세요, 하나 둘 하나 둘!  (2) 2020.03.02
등대지기  (0) 2020.02.26
리볼버의 총성이 멎은 후  (0) 2020.02.1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