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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도

Nake 2016. 9. 8. 17:52



바람이 불었다.


세는게 불가능한 포탄에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산등성이에서 그 바람은 지독한 먼지바람이 되어 참호 안의 병사의 눈을 찔러왔다. 


능선 밑의 적들을 지켜보는게 그들의 임무였음에도, 병사들은 참호 아래 몸을 숨겨 그 바람이 지나가길 빌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전쟁에 몸을 담근 베테랑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멎을리 없다는걸. 전쟁이 그리하듯.


아직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은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담배 가진거 있냐?"


두시간만의 말소리에, 두려움에 덜덜 떨고있던 신병은 얼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아, 없, 없습니다."


"없어? 보급은 어쩌고."


"저, 그- 제가 비흡연자라서…"


"헹, 재미없구만."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두개피의 담배가 보였다.


"이것도 마지막이구만."


신병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잠깐이나마 내 가슴을 찔러왔다. 얄미웠겠지. 암, 그럼. 하지만 이 정도 장난은 받아줄만한 녀석이라고 봤기 때문에, 그 원망의 눈길도 그냥 넘어갔다.


"안필거야?"


"전 괜찮습니다."


"내가 한번 피우면 돗대밖에 안남는다고. 이번에 안피면 돗대라 주고 싶어도 못줘."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아? 이번에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냐. 이번 전투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마지막 말에선 혐오감까지 느껴졌다. 웃기는 친구로군. 입에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이제 완전히 수명이 다한건지, 열몇번을 부싯돌을 부딛치고서야 겨우 불이 붙었다.


일주일만의 담배였다. 얼마나 즐거운지, 말로 표현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정도였다.


"지금 피우셔도 되는겁니까?"


신병이 물었다.


"왜?"


"적이 볼수 있지 않습니까?"


"적은 우리를 모두 보고있다네, 이 친구야."


웃으면서 말했다. 담배연기가 웃음과 함께 공기 중에 춤추며 흩어졌다.


"꼭 신인 것처럼 말하십니다."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보는 사람은 많아. 소대장도 우릴 보고 있고, 중대장도 보고있을걸. 대대장은 모르겠지만. 우릴 지켜본다고 다 신이 되는건 아니지."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니? 전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그 순간이나마, 적이고, 먼지바람이고, 모든걸 잊을 수 있었다. 그게 꼭 좋은 것 만은 아니었지만, 필요하긴 했다.


"괜찮아. 지금은 한낮이라 그리 눈에 띄지도 않고. 적 저격수도 날 쏘지는 않을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저쪽 저격수는 꽤 유명한 친구거든."


작게 웃었다. 이빨 사이로 연기가 빠져나왔다.


"'월급 도둑'이라고 불리는 친군데, 들은적 없나?"


"엇, 예."


"정말 신병이구만."


그러고보니 이 이야기를 하는것도 꽤 오랫만이었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기도 했고, 신병과 함께 참호에 들어간 것도 몇달만이었으니까.


"저쪽 저격수가 맨 처음 배치된건 세달정도 전이었을꺼야. 맨 처음에는 정말 매섭게 저격을 했지. 그래서 우리는 지체않고 포격지원을 요청했고, 이내 총소리는 멎었지. 하지만 한시간이 지나면 다시 저격이 시작되는거야. 그럼 우린 또 다시 포격지원을 불렀고. 그렇게 몇번이고 반복하니까, 총소리는 나는데 뭔가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그게, 녀석이 총을 쏘긴 쏘는데 아무도 맞추질 않더라고."


"예?"


의외의 말인듯, 신병이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다 곧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는 얼굴에 핏기가 가셔 말을 더듬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고 있어. 괜찮아. 시발, 여기가 주둔지도 아니고. 편한 새끼들이나 후임 갈구지. 여기서 너 갈궜다가 등 뒤에 총맞을일 있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어. 그. 무슨 이야기 했었지?"


"아무도 맞추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맞아. 아하하, 그 저격수, 매일 아침해가 떠오르고 다시 저물어갈때 한두번씩 총을 쏘고는 잠잠해졌지. 처음에 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중대장이 눈치채고나선 거칠게 웃더라고. 사람한테 총을 쏘면 포격 지원이 쏟아질게 분명하고, 그러다 죽으면 다른 저격수로 대체될 뿐이란걸 알게 된거지.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 무언의 협상을 하는거야. 총을 허공에다 쏠테니까, 자기를 죽이진 말아단거였지. 대대장한테도 이 이야기가 들어갔고 그 심증이 굳어져서, 매일 일과의 시작과 끝을 저 월급 도둑의 총소리로 함께하게 됬지."


"아하하."


녀석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러고보니 진짜 신병인데. 어디서 온거야?"


"엇, 모르셨습니까?"


"여기선 신병이 가고 오기 일쑤라 설명같은거 안한다고. 어디 출신인데?"


"어, 그게..."


말을 더듬었다. 최대한으로 안심하라고 느껴질만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역차별같은거-"


"56연대 소속이었습니다. 56연대 2대대 5중대 소속이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56연대. 들은적 있었다. 형제 연대.


지금은 완전히 괴멸당한.


"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음. 미안해."


"아닙니다."


"괜히 물어봤구만."


"아닙니다."


담배를 다시 빨았다. 필터가 타기 시작한 듯, 맛이 고약해졌다. 젠장. 꽁초를 참호 밖에 집어던졌다.


"그..."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시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도움이 되지 않을것 같았다.


교대할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켜야한다니, 내 실수긴 하지만 지독한 실수였다.


그게 싫은듯, 신병이 입을 열었다.


"배치되자마자 적의 공습이 시작됬는데, 저는 겁에 질려 숨었죠. 목숨만은 건졌지만 같은 중대원은 모두 죽었습니다. ...저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젠장. 너무 자책하지 마."


총을 다시 잡았다. 매끄러운 차가움과 특유의 무거움이, 마음에 안정을 찾아주었다. 곧 사용할 것 처럼, 노리쇠를 당겨 총알을 장전했다.


"이 고지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다 갔다고 생각하냐? 한번에 다 죽지만 않은거지, 내 소대에 배속됬다 죽은 사람만 하더라도 중대인원을 채울 수 있을거다."


"..."


"그러니까말야, 중요한건 살아남는거야. 죽은 사람은 나중에 추도하면 되. 살아남지 않으면 그것조차 못한다고. 너네 중대는 그래서 다행인거야. 네가 살았으니까."


침묵이 찾아왔다. 한없이 맑기만한 푸른 하늘에 거칠게 불어재끼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적막을 깰 생각을 하질 못했다.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 겁쟁이같은 짓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그 적막을 깨부쉈다. 입을 열어 말했다.


"뭐 했었냐?"


선임이라면 후임에게 한번쯤 묻게되는, 마법의 화제. 이거라면-


"기도했습니다."


윽. 생각하면 할수록 이 신병은 꽤나 센 놈인 듯 했다. 내 모든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다니.


"기도라고?"


"예. 원래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내가 담배찾으면서 말걸기 전에?"


"예."


핫. 웃음이 터져나왔다.


허파에 바람이 뚫린 것처럼 크게 웃어재꼈다.


적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웃어재꼈다.


"아하하! 아하하하! 젠장! 아하하..."


"뭐가, 뭐가 그렇게 웃기십니까?"


"아핫, 아하핫, 아냐. 아니... 아핫. 아니야. 그게. 후. 그게, 원래 내가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거든. 그런데 우리나라 카톨릭 신부는 병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어서 입대한건데 바로 전쟁이 터져버린거라. 아하하. 젠장. 미안해. 미안해."


아, 여기서 신을 믿는 사람을 보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그래.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나?"


웃음이 좀 진정되자, 나는 이내 물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위해.


"예."


"그러지 마. 그 시간에, 적에게 빌라고. 살려달라고."


신병은 말이 없었다.


"의미없지, 안그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저 소리 들려?"


침묵, 적막.


하지만 내 귀에는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찢는 잔인한 소리가.


적의 돌진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참호 밖으로 몸을 빼꼼 내밀어 총을 겨누고는 말했다.


"말 했지? 살아남으라고. 기도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신병을 보지는 않았다. 녀석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떨지도 않았다. 녀석의 총에선 더이상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집중했다.


가늠좌를 너머 가늠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 적을 보았다. 먼지를 일으키며 흙산을 기어올라오는 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자연스럽게.


탕.


날카로운 총성이 적막을 찢고, 바람을 찢고, 적의 머리를 찢고 사라졌다.


"시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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