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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의 무개념 분지
재기드 얼라이언스 3, 스타필드(Jagged Alliance 3, Starfield) - 작지만 꽉 찬, 넓지만 텅 빈 본문
'스타필드'와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의 중요하지 않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 그러니까 2023년은 제게 좋은 게임들을 한가득 가져다 주었습니다. 인디부터 AAA까지, 다양한 규모와 배경, 출신에서 높은 품질의 작품들이 쏟아졌죠.
'젤다의 전설:티어즈 오브 더 킹덤'부터 시작해서, '데드 스페이스'와 '바이오하자드 RE:4'의 안정적인 재창조, 코어하면서 독창적인 덱 빌딩 게임 '던전 드래프터즈'도 좋았고 '테라 닐'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히데키 'FUNKY UNCLE' 나가누마를 비롯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봄 러시 사이버펑크'는 귀와 눈을 끊임없이 즐겁게 만들어줬죠.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웠던 '램넌트 프롬 디 애쉬즈'의 후속작 '램넌트 2'는 그 다양성에 의외의 복병으로 작용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20년도 전에 잊혀져 명맥이 끊겨있었던 고전 전략 RPG IP의 귀환은 제게 그 무엇보다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3'이냐구요? 아뇨, 그 게임도 좋아하지만서도, 그 게임을 이야기하는건 아니에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건 '재기드 얼라이언스 3'입니다.
그래요, 엄밀히 따지자면 '재기드 얼라이언스'의 명맥이 끊어지진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작품이자 IP를 제가 좋아하게 된 작품인 '재기드 얼라이언스 백 인 액션'이 바로 그 산 증거이고, 그 뒤에도 '플래시백'이나 '레이지'라는 부제를 가지고 꾸준히 시장에 나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건 이겁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80년대의 액션 아이콘들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액션 활극의 이야기는 그 아이콘들만큼이나 시간과 함께 잊혀갔다고 이야기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지금, 예전의 액션 영화들은 그 시절 이상으로 얇고 단순해 보입니다. 진짜 사람이라면 생각할 법한 당연한 논리조차 100분의 상영시간에 맞춰져 서슬퍼런 칼날에 잘려나가던 시절의 결과물을 지금 마주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관객들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돈, 우정, 복수, 애국심, 이해하기 쉽지만 그만큼 얇팍한 동기로 움직이는 이야기들은 원본과 원본보다도 열악한 카피캣들로 인해 순식간에 식상함을 불러왔죠.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의 여러 등장 인물들은 당시의 액션 아이콘들을 차용하고, 존중을 표합니다. 그 당시 헐리웃 전반의 서브컬쳐를 인용하고 당시의 팬들에게 윙크하곤 하죠.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 인용작들처럼 식상할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아프리카에 위치하는 가상의 국가, '그랑 시앵(Grand Chien)
'입니다. 다이아몬드라는 귀중한 천연자원이 나오는 탓에, 내전과 해외 세력의 간섭에 몸살을 앓고 있죠. 플레이어는 반군인 '리전'에게 점령된 '그랑 시앵'을 해방해나가며 신원 미상의 반군 우두머리 '소령'에게 납치된 대통령을 구출하는게 주 이야기입니다. 만약 지금이 80년대고 '코만도'와 '프레데터'로 한창 주가가 오르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부를 수 있다면 한 여름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100분짜리 영화 한편을 뽑을 수 있을법합니다..
하지만,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은 80년대의 헐리웃 영화가 아닙니다. 2023년의 비디오 게임이죠.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세계를 수십시간이 넘는 플레이타임동안 충실하고 유쾌하게 그려냅니다. '그랑 시앵'은 주인공이 구원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미개한 제3세계 국가가 아닙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아 많은 문화가 파괴되었지만 문명의 발원지로써 오랜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얻은 부를 이용해 다른 나라의 영향력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수많은 간섭을 받고 있는 국가로 묘사되죠.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은 그렇게 한번 언급하고 곧 잊혀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과거의 유산에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생동감넘치는 숨을 불어넣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어느날 플레이어는 보물이 숨겨져있다고 알려진 무너진 맨션에 귀신이 나타나 보물을 찾는 사람들을 쫓는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찾아가 여러가지 모험을 겪고 나면 귀신은 이 맨션에서 일하던 집사였고, 귀신이 벌이던 초자연적 현상들은 잘 숨겨진 폭발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스쿠비 두' 시리즈를 한번이라도 본 적 있다면 범인이 "참견쟁이 꼬맹이들(Meddling Kids)"라는 유명한 대사와 함께 진상을 털어놓는 이 일련의 과정이 '스쿠비 두' 시리즈를 패러디 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은 여러분의 모험과 '그랑 시앵'에 한층 더 흥미로운 사실을 더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다른 게임이었다면 그저 이벤트로 끝나버렸을 이 이야기에 개발진은 저택의 주인은 10년전 내전에 실종된 한 다국적 기업의 CEO였고, 마침 저택에 찾아온 비극으로부터 우연을 통해 목숨을 건졌음에도 주인이 살아 돌아오리라 믿고서 귀신 행세를 했다는 속사정을 더합니다. 당연하게도 이는 게임 후반에 마주칠 수 있는 또다른 이벤트의 복선으로 작용하며, 끝내는 엔딩의 분기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말하는 개가 나오는 고전 만화의 패러디가 게임 전반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장치이자 이야기의 전개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승화되는거죠.
그리고 이러한 세세한 손길은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용병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재기드 얼라이언스'는 전부터 고용한 용병간의 관계가 친해지기도, 틀어지기도 하며 서로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를 자랑했는데, 3편에서는 더 나아가 용병 개개인이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세심하게 보여줍니다.
가장 몸값이 싼 용병 중 한명인 MD, '마이클 도우슨'은 갓 의대를 졸업하고 용병 기업인 A.I.M이 의료 지원 민간 단체인 줄로만 알고 참여한 풋내기입니다. 덜렁대며 총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돕고싶어하는 마음만큼은 지지 않죠.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며, 게임의 그 어느 용병보다 진지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평소에는 총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는 한심한 2군 캐릭터가 의외의,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부분에선 주인공으로써 행동하는거죠.
자, 대략 30년만의 신규 IP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발매된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신작, '스타필드'를 보도록 합시다. 우주의 수많은 행성에 인류가 정착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인류의 기술이라고 짐작하기 힘든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미지의 능력에 눈을 뜨게 됩니다. '콘스탈레이션'으로 불리는 소위 '마지막 탐험가'들과 함께 우주 곳곳에서 관측된 유물과 이상현상을 찾아나서는게 메인 스토리의 골자입니다.
이러한 스토리 자체는 -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 이후의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오픈월드 게임이 모두 그리했듯 -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베데스다가 마련한 넓은 우주를 탐험하기 위한 핑계로 존재합니다. 이를 생각하면(맡은 역할에 충실하느냐, 잘 수행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메인스토리의 얄팍함은 베데스다의 의도된 지점이라고 선해해 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배려된 생각 위에 배치된 '세상'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만큼이나 얇고 텅 비어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법 자체는, 놀랍게도 '재기드 얼라이언스 3'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이 게임이 2300년대의 먼 미래를 다루고 있음에도, 2023년의 게임답게 2023년의 게이머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묘사하죠. 그 기반이 남북전쟁으로 갈라진 미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확한 대상은 '2023년의 미국 게이머' 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뉴 아틀란티스'를 중심으로 관료주의적 공화주의를 펼치는 '식민지 연합(United Colonis, U.C)'는 노골적으로 미국이 미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전에 사용하던 이름이고, 이와 경쟁하고 있는 '자유 항성 공동체(Freestar Collective)'는 자유를 위해 개개인이 무장해야 한다고 외치는 카우보이적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미국 문화에 친숙하다면 이것이 북부와 남부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놓치긴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스타필드'의 먼 미래가 안고 있는 문제는 지금의 우리가 당면하는 현실적 문제와 크게 괴리되어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정착지들은 정착지에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이 아니라 그 곳을 지배하는 자본과 자본가의 것이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듯 떵떵거리며 사는 부자들이 즐비합니다. 좀 크다시피한 도시에는 당연하다시피 슬럼가가 존재하고, 마약과 범죄가 만연하지만 이를 단속할 치안은 부족하거나 부패해있습니다. 현대 미국에 만연한 사회문제를 나사펑크로 비교되는 미려한 SF적 아트디자인과 함께 버무리자 그럴싸한 미래 도시가 완성되죠.
하지만 그게 끝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브레이크를 밟기라도 한 듯, '스타필드'의 세상은 거기서 멈춰 더 발전하지 않습니다. NPC 개개인들에게 인생이나 정치적 관점이 있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NPC의 행동이 변화하는 - 따위의 이머시브 심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게임을 원했다면 '데이어스 엑스'나 하러 갔겠죠. 문제는 플레이어와 NPC간의 상호작용 이전에 NPC와 NPC간의 상호작용조차 매마르고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소유한 기업도시에 거주하며 낮은 노동환경과 해고 협박으로 일자리는 물론이고 생존권의 존폐를 CEO에게 좌지우지 당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형편이 좋지 않다며 불평을 하지만, 정작 고용주를 향해서는 자신들에겐 정말 잘해주는 좋은 인물이고 나쁜일을 할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몇분 전에 자신을 해고하고 행성에서 내쫓을거라고 외친 사람에게요! 각본에 '핍박받는 노동자'와 '이중적인 기업가'라는 두가지 요소가 존재하지만, 그 두개가 플레이어 눈 앞에 제시되도 하나의 문장으로 엮이질 않는겁니다.
다른 행성을 볼까요? 마찬가지로 기업이 소유한 한 휴양 행성의 궤도에 정체 불명의 대형 우주선이 도착합니다. 행성은 이 우주선과 통신이 되지 않아 곤란하던 차에, 마침 궤도상에 도착한 플레이어에게 소통 중재를 요청하죠. 알고보니 그 우주선은 초광속 도약장치인 그래브 드라이브가 등장하기 전에 제작된 대규모 이주선이었고, 오랜 시간 냉동상태에 있다 해동되어 거주하기 적합한 행성의 궤도에 도착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주선단은 해당 행성에 이주할 수 있도록 요청하지만, 행성을 소유한 기업의 의회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 행성은 우리거야. 저들이 아니라. .... 그 자들이 우리 땅에서 뭘 할지 누가 알겠나?"
라고 이야기하면서요. 그리고는 세가지 선택지를 플레이어에게 제안합니다.
- 행성에 정착하되 기업에 고용되어 영구적으로 기업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기.
- 그래브 드라이브를 직접 구매해 정착할 다른 행성을 찾아보기.
- 이주민을 모두 죽이기.
이따위 선택지를 '윤리적 딜레마'랍시고 제공한 사실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스타필드'가 플레이어에게 보여주는 반응은 이곳에 살아있는 세계가 있다라는 환상을 걷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당사자인 이주선단에 찾아가 대화를 시도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노예로 팔려나갈지, 또다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나야할지, 고민하고 고뇌해야 할 당사자들이, 논쟁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고서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어야할 플레이어의 선택에 오롯이 의존하는 겁니다.
'스타필드'의 네러티브 요소는 다 이 따위입니다. 경찰 사이에 스파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스파이가 나타나는 법은 없습니다. 고향이 싫어서 행성을 떠난 동료를 데리고 고향에 가봤자 시큰둥하게 행동할 뿐입니다. 기업에 잠입해 사보타주를 걸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기업이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것도 아니고, 해적의 본진을 몰살해봤자 어디선가 스폰된 해적이 플레이어가 한참 전에 참살한 NPC의 포고문을 들고서 총질을 해대기 시작합니다. 이런 얄팍함은 우습게도 게임이 현실을 인용함으로써 '현실 문제에 대한 '베데스다'의 정치적 입장이 이런거야?' 라고 짐짓 오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 사실에 화가 납니다. '스타필드'의 얄팍함 그 자체보다, 수십년간 게임을 제작하며 오픈월드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회사가 보여주는 행보라는게,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그 시작지점과 별 차이를, 아니 사실상 퇴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라는 사실이, 80년대 액션 영화를 차용하던 게임이 수많은 실패를 겪고 혁신을 보여주며 충실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세상이 왔음에도 스스로의 식상함을 해결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은 체 그대로라는게 역겨운거에요.
'게임을 만들때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라는건 변명조차 되지 않아요. '게임은 정치적이지 않다'라는 문장만큼이나 거짓이죠. 모든 글과, 영상과, 노래와, 게임은, 목표하는 소비자가 있고 그 소비자를 위해 디자인되어집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매체가 활용하는 단어나 화제에서 목표 소비자의 모습이 드러나죠. '스타필드'의 소비자는, 변명할 수 없을만큼 명확하게 '게임이 제공하는 세상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강하고 유능한 주인공을 동경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위해 개발되는 게임은 이미 식상해진 파워판타지에 목숨을 걸고, 더 진지하고, 생동감넘치며, 유머러스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내던지죠.
제가 2023년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타필드'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건 이상하지 않아요. '베데스다'는 언제나 같은 소비자층을 공략했고 그 계층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리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게임들도 상업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특히요. 가벼워도 이상하지 않고 텅 비어도 문제될게 없음에도 무거워지고 가득차기를 선택한 게임들을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수가 될 날은 농담으로도 가깝진 않겠지만, 적어도 같은 이야기를 보고 감동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건, 언제나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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