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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의 무개념 분지
바스러지다 본문
칼을 뽑았다.
처음에는, 마치 세상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순간 세계가 멀어졌다. 세계가 아니라 나 자신이 세계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임을 알아차리는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가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숙명, 책임, 미래, 중력, 그것 말고도 떠올리기 싫은 모든 것. 바로 그 순간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래서일까, 3초쯤 되려나,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정말 오래도록 그 순간을 즐겼다. 내 뇌가 그렇게 받아들였다. 마치 그 3초가 1분, 10분, 1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미 내 검은 솟구치는 피때문에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신경쓰지 않았다. 몇년동안 나와 함께 싸움을 함께 해온 검이었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을 터였다. 너에게도 안식을.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더이상 검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에, 허공에 떠오른 시선이 투구 너머로 바라보는 시야는 더 자유로울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앞만 똑바로 지켜보던 내 눈은 그때야 비로소 진짜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웃긴 일이었다. 아마 세상에 나만큼 많은 곳을 여행한 이도 없을 것이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닌 나만큼, 남은 가보지 못한 극한의 오지에 가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 내가 비로소 여행의 끝에 와서야 세계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다니.
그랬다. 아름다웠다. 정말로 아름다웠다. 올라올수 없는 이 높은 창공 너머로, 태양, 진홍에 가까운 태양이 어둠의 장막을 거두며 다가오고 있음을 바라볼수 있었다. 그 붉은 태양빛에, 지평선 끝의 바다가 붉게 넘실대며 타오르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끝없이 일렁이는 그 불꽃은 분명 용이 내뿜던 화염보다 더 뜨겁고 열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시원할듯한 불씨인가.
그 밑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앞이라고 해야 정확할까. 끝없이 펼쳐진, 빽빽한 마물의 숲. 햇볕 하나 들지 않던 동굴과도 같은 숲. 수많은 늑대인간과 구울들을 썰어넘기며 지나왔던, 이제는 피와 구더기로 얼룩져 있을 바로 그 숲. 이 위에서, 나는 그 숲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고요. 평화. 그리고 삶. 그 속과는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렇기에 매력적인.
그제서야 바람이 느껴졌다. 이 위는 분명 시원했다. 낙하하면서 느끼는 폭풍이 아니었다. 맑은 상공에서만 느낄수 있는 바람이었다.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맑은 공기가, 아마 저 머얼리 인간의 왕국과 요정의 호수, 영겁의 낭떠러지의 표면을 타고 내달리던 그 공기가 이 용의 언덕을 휘감고 나를 향해 다가온 것이리라. 그중 어느 곳의 체취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랬기에 나는 만족했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바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공기였으니까.
투구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갑옷도 풀어해치고 싶었다. 투박하게 엮인 가죽끈을 풀어해지고 갑옷을 내던지고 싶었다. 못할게 뭐란 말인가. 나는 용을 죽였다. 세계를 구했다. 나를 속박하던 운명은 이제 끝을 맞이했고 더이상 나를 내모는 것은 그 무엇도 없으리라.
착각이었다. 웃기고 치기어린 착각이었다. 나는 아직 이 세게에 속박된 인간이었다. 그리고 여느 인간처럼, 아직 땅이 나를 속박하고 있었다. '되돌아오라.’ 지상이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비웃었다. 그래. 나는 곧 추락하겠지. 아니, 지금 당장 추락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추락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충격도 나를 죽이지 못하리라. 나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자유롭다고.
가까워져가는 지표면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을 비웃었다. 그 어느때보다 자유로운 지금, 나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멍청아! 정신차려!"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콜먼이었다.
“그만… 소리질러…"
너무 시끄러워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기에, 나는 겨우 비집어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봐! 오필리아가 일어났어!"
분명 그에게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기랄. 머리가 울렸다.
“괜찮아? 속이 좀 안좋을거야. 갑자기 마법을 과다투사했으니 말이지. 세상에. 세상을 구하고선 용에서 떨어져 죽다니 얼마나 어이없는 결말이겠어? 그런 이야기는 내 후손들한테 이야기 못해준다고."
콜먼이 쉴새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말이 많았지만, 이건 분명 자기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고 하는 연기였다. 이해는 해줄수 있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건 아니었다. 지금은 더더욱 싫었다.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속이 뒤집어질것 같아 몸을 꿈쩍도 할수없어 가만히 있었다. 제기랄. 손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우리는 팀이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눈치채는 것, 그게 진정한 팀이라는게 아닐까?
내게 다가온 에리카가 콜먼의 대가리를 말도 않고 후려쳤다.
“악!"
단말마가 들려왔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다.
“제기랄! 왜 떄려?"
억울한 듯 소리지르는 콜먼에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에리카가 속삭였다.
“소리 낮춰, 멍청아. 네 목소리 때문에 오필리아가 편히 쉬지도 못하겠어."
“아, 알았다고. 알고 있다고. 젠장…"
뒤통수를 부여잡고 물러난 콜먼을 뒤로 하고, 에리카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축하해, 오필리아. 네가 세계를 구했어."
원래 조용한 그녀였지만, 나를 위해서 지금은 평소 이상으로 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아주 잠시동안 이겠지만 말야."
냉소적인 것조차 평소 이상인듯 했지만.
“뭐 필요한거라도 있어?"
그녀가 물었다. 나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선 구울의 신음소리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한음절 한음절, 겨우 턱과 혀를 움직여 단어로 소리를 빚어냈고, 그 말을 정성스럽게 귀기울여 들은 에리카는 이내 일어서 콜먼에게 다가갔다.
“뭐야, 또?"
에리카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시발! 나죽네! 아이고!"
콜먼이 소리질렀다.
“오필리아의 부탁이야."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상황에서도 웃음은 정말 자연스럽게 기어나왔다. 인간의 본능이란 것인 모양이었다. 즐거웠다. 이렇게 한가롭게 본능따위를 생각한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괜찮아?"
어느샌가 내 옆에 로제르가 앉아있었다.
“아-니. 콜먼 저새끼는 어떻게 마법학교를 수석으로 나온건지 이해를 할수가 없어. 죽을 것 같다고… 젠장. 용하고 싸울때보다 지금이 더 기분나빠."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에리카의 정의 구현 때문인지 속이 조금 나아져 조금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로제르는 웃으며 내 말을 받아쳤다.
“하하. 저녀석을 물리쳐야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걸지도 몰라."
“하. 그렇다면 다음번에 세계를 구할 사람은 머리 좀 아프겠네. 쟤처럼 적으로든 아군으로든 골치 아픈 놈은 없을테니까."
“네가 구하면 되지."
“이 짓을 한번 더하라고? 안돼. 못해. 안할거야. 도망칠거라고."
“어디로?"
그러게. 어디로 가야하나. 나는 생각했다. 왕국의 눈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이 찾지 못할 사람이 있다니,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분명 과거의 나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어디로든 갈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말했다.
“이제야 깨달은건데, 세상은 넓어. 어디로든 가지 못할 곳은 없지."
“혼자 가려고?"
“글쎄. 에리카랑 가면 좋을 것 같아. 조용하지만 은근히 재밌단 말야. 요리도 정말 잘하고."
“나는?"
웃었다.
“글쎄. 로제르 너는 너무 깐깐한 구석이 있어. 은근히 말보다 행동으로 하고싶은걸 표현하고. 귀찮다고. 그런거 받아주는거."
“제길, 날카롭게 찌르는구만."
“그렇지 않으면 용사라는거 못해먹는다고."
로제르가 웃었다.
“투셰."
“득점한건가?"
“정통으로 들어왔다고."
로제르가 답했다.
“콜먼은?"
“나가 죽으라고 해. 아니, 불쌍하니까 데리고 가야지. 사회에 하나도 도움안될게 뻔해. 놔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걸. 세계를 구했으면 사후지원도 똑바로 해야될거 아냐?"
크게 웃었다. 나나 로제르나. 속이 아파왔지만, 이제는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그러다, 로제르가 뭔갈 발견하고는 말했다.
“세상에. 저거 봐봐."
“뭔데?"
아직, 몸을 치켜세울수는 없었다. 그정도로 몸이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떄문에 고개를 겨우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투구가 어느샌가 사라져있음을 깨달았다. 콜먼이 벗겼던가, 떨어지면서 날아간 모양이었다. 별로 신경쓰이진 않았다.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다. 좋았다. 두눈으로, 이 멋진 모습을 볼수 있었으니 더욱 더 좋았다. 용의 언덕, 그 위 서쪽 하늘을 가리고 있던, 이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용의 시체가 새벽빛을 받아 차갑게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너무나도 좋았다.
“젠장. 조금 더 늦었더라면 햇빛을 받고 회복했겠지?"
로제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정말 아슬아슬했어."
하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그래. 아마 후대는 나를 치켜세울 것이다. 선택받은 용사가 운명의 검을 들고 용을 용감히 무찔렀노라고. 하지만 현실은 우스웠다. 될지 모르는 어줍잖은 우연의 연속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아는건 나와 내 3명의 어줍잖은 동료 뿐이었다. 때문에 이런 현실을 비웃을 권리란 우리 네명에게만 주어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웃었다. 그 권리를 마음껏 사용했다. 그런 어설픈 운명따위에게 쓰러진, 수천명의 목숨과 수백개의 마을과 수십개의 도시와 몇개의 나라를 집어삼킨 용을 향해 신랄하게 비웃었다. 새벽빛을 받자 석고처럼 말라비틀어져 여기저기 금이가고는 맑디 맑은 바람에 가루가 되어 천천히 바스러지는 용의 시체를 향해 마음껏 비웃었다.
웃음은 전염성이 있는게 분명했다. 해가 완연히 떠올랐을때, 우리 모두는 언덕 위에서 크게 소리높여 웃고 있었다.
우리는 승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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