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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드 이야기 1

Nake 2014. 7. 12. 15:20

  • 서문
 "인간과 바퀴벌레는 별 다를게 없지. 얼마나 처절한 상황이든, 적응해, 살아남는다." -빌 코스메

 운석이 떨어진다. 많은 이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였고, 어떤 이에겐 기회였고, 어떤 이에겐 좌절의 순간이었다. 물론,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10여년, 계산의 결과. 이로인해 인류가 그전까지 쌓아온 문명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쌓아왔던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붕괴되어 갔다. 하지만 그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필사의 탈출구를 찾아낸 인간들은 결국 살아남았다. 운석이 떨어진 해를 위기력 원년으로 하기로 합의한 인류는, 그 전성기에 비해 티끌밖에 남지 않았지만 겨우 살아남은 것이다. 운석의 먼지가 대기를 잠식해 기나긴 겨울이 지구를 차지하고 30년, 끝없는 폭풍의 시기가 10년, 그리고 인류는 그제서야 맑은 하늘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몇몇은 땅을 파고 살아남았다. 수십명에서 많게는 쳔여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쉘터 - 그 크기에 따라 지하도시라고도 불리우는 인류 최후의 생존 수단을 이용해 살아남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사용할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하수구와 건물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들 또한 존재했다.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지금의 이야기를 하자면, 위기력 153년, 아슬아슬하게 구축된 인간의 사회, 혹은 그 흔적의 이야기들이다.

인용 - '[이름 지워짐]의 기록',  1권. 저자 : [이름 지워짐]



A
숲 속.

 완연한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날.
 그늘에 덮여 아직 녹아내리지 못한 눈 더미도 그 기운의 제촉에 못이겨 망울방울 녹아 검은 땅은 촉촉히 적셔가고 있을 즈음, 밝은 모래색 트랜치코트를 입은 한 남성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20대 중반즈음 되어보이는 그는 꽤 긴 길을 오랬동안 걸어온 것이 분명해 보일정도로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피로로도 감추지 못할 그의 편안한 인상은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이를 반영하는듯 그의 발걸음 또한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데에 거침이 없었다.
 물론, 그가 거침없이 이 빽뺵한 숲 속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언뜻 보면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손길이 오래전,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의 누군가를 위해 나무에 닿아 지금은 길이라고 하기 민망할 수준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기 떄문이다. 많은 인파가 밟고 지나가 다져진 흙은 거친 비바람과 새로 자라나는 나무에 의해 조각 조각 갈라져 그 의미를 상실했음에도, 어느 사람에게는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길을 이용해 이제는 죽어버리고 많은 곰팡이의 숙주로 존재하는 수많은 두꺼운 고목들 사이사이로 남자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공터라고는 부르기 힘들지만,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목에서 겨우 벗어난, 성인 남성 세넷이 앉아 편히 쉴 수 있을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남자는 엷게 미소를 띄우고 검게 썩어들어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어께에 짊어진 의류대를 내려놓았다. 주위의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온 그는 땅을 정리하고 의류대에서 무언가 물건을 하나 둘 꺼내더니, 어느샌가 춥고 외로운 밤을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줄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끝마쳤다.
 불을 피우고, 의류대 안에 들어있던 페트병의 물을 냄비 겸용 그릇에 담아 그곳에 단조로운 디자인의 레트로트 포장지를 뜯어 내용물을 뿌리고 얼마즈음 끓이자, 해 또한 뉘엿뉘엿 져가기 시작했다. 환절기 특유의, 낮과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날카로운 한기가 숲 속을 맴돌았지만, 모닥불로 열심히 끓인 남자의 스프는 이를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그 향과 온기는 쌀쌀한 공기따윈 손쉽게 내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약하지만, 나무와 나무사이를 지나치며 부는 바람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를 스쳐 지나간 순간, 남자는 간을 보기위해 들었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날도 추운데, 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저녁은 아직 들지 않았지만, 사양하겠네."
 타닥이며 불타는 모닥불의 불빛이 숲 속을 이따금 변덕스럽게 비췄지만, 남자의 눈에는 숲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이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를 찾기 위해 주의를 둘러보지 않았다. 대신, 계속 말을 했다.
 "자, 자, 그러지 마시고 옆에 앉으시죠. 이렇게 추운 날엔 감기에 걸리기 쉽답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 하지 않더라도 거기 앉을 생각이네. 자네를 여기서 쫒아버린 뒤에 말이지."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죠. 저를 쫒아내신 다음에 이 뜨겁고 맛있는 스프와 따뜻하고 편안한 모닥불을 얻으실수는 있곘지만, 다시 한 번 들을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를, 무엇보다 당신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그 이야기를 영영 놓치게 되어버린다면 스프와 모닥불 따위로는 결코 채우지 못할 크나큰 손해를 입게 될 지 모르니까요."
 그러자, 숲 속에서, 비웃음이.
 산탄총 특유의 펌프를 당겼을때, 약실에 탄약이 장전되는, 쇠와 쇠가 미끄럽게 서로의 역할을 다 하며 철컥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이야기하는 그 소리가 숲 속의 모든 이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의 냉소섞인 말이 들려왔다.
 "되도않는 우슷개소리를 하는군. 자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알고있다고 자부하는거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자네를 쏘지 않고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어야할 이유라도 있나? 그냥 여기서 자넬 쏘고, 이 자리를 뜨면 될거라고 생각하네만."
 "하하, 많은 상황에서 맞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저는 이 상황에 관해서는 꽤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잠시 남자는 말을 끊고, 스프를 조용히 떠먹었다. 레트로트 특유의 어딘가 부족한 맛과 향이 살짝 실망스러웠지만, 그는 불평할 만한 입장도 아니었고, 모닥불의 온기가 그런것 따위는 개의치 말라는듯 남자의 스프에 자신의 열을 충분히 전달해 주어 추운 밤공기를 잊게 만들어주기 충분한 온기를 제공하였기에남자는 이정도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 길을 따라 여행하려는 몇 안되는 여행자를 최근 습격하기 시작한 한 습격자의 이야기. 그 습격자를 잡기 위해 고용된 용병들이 제가 출발한 뒤 3시간정도 뒤로 출발하기로 이야기되었덨다는, 작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 말이죠."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침을 삼키고.
 "제가 가진 짐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발걸음이 빠른 편도 아니거든요. 이렇게 맛있는 스프를 끓이기 위해 한시간 가량 이곳에 있었으니, 총을 든 건장한 외국인이 나타나는건, 음... 정말로 시간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하고싶은 말이 뭔가."
 "하고싶은 말은 언제나 많죠. 하지만, 일단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말이죠."
 남자는, 그루터기의 가장자리로 자신의 엉덩이를 옮기고는 자신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침묵.
 1분가량 지났을까.
 누군가 본다면, 눈 깜짝할 새의, 하지만 그림자 속의 그에게 있어선, 영원과도 같은 침묵. 숲 속을, 새로운 종류의 차가움이 뒤덮었다.
 허세일까?
 혀 세치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꺽고 의지를 뒤틀어버린 사람을 그는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뭔가,그와는 다른 종류의 남자였다고 그는 직감했다. 
 직접 본적은 없었다. 신화와도 같은, 이전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만 들어온 허구속의 인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닳고 문드러진 시간속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낸 거짓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서 풍겨오는 자신만만함은 남자로써는 처음 느끼는 종류의 자신감이었기에, 그런 허구의 무언가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이 남자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방아쇠를.
 그러자, 멀리서,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결국, 그림자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왔다.
 비루하다. 첫인상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대다수의 일반인이 그렇듯, 노인은 비루한 차림을 하고 비루하게 서있었다. 위장무늬가 들어간 바지와 후드는 닳고 헤져서 얼기설기 풀어진 옷 솔기가 풀어헤쳐져 있었고, 
막상 그림자에서 나오고 보니 위장무늬따위는 실제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위장효과고 뭐고 느낄 수가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꾀죄죄한 차림을 한 노인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자신의 경험 떄문이었으리라. 그의 허리춤에는 개머리판이 없는, 혹은 누군가에 의해 잘라진 펌프 액션식 산탄총이 직접 무두질한듯한 가죽끈으로 매여있었고, 노인은 그 총을 손에 쥐고 있는 대신 15센치가량의 길이의 커다랗지만 투박한 디자인의 흠집많은 대검을 들고있었다. 
 하지만 그런, 비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첫인상과 달리, 남자는 흔들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는 긴장했지만 초조해하지 않았고, 상황을 냉정하게 지켜보려 하고있었다. 의도치 않은 대화의 흐름 속에서도, 그는 결코 자신의 빈틈을 보이려 하지 않았고, 주름진 피부 밑의 다져진 근육은 그 어떤 돌발상황도 감내할수 있다는듯 긴장된 체 굳어있었다.
 그런 노인이, 천천히 모닥불로 다가갔다.
 "드시겠습니까?"
 남자는 숟가락을 내밀었다.
 "사양하겠네."
 노인은 단검을 내밀었다.
 "내가 지금 자네를 찌르지 않아야할 이유를 대보게. 설사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자네를 총이 아닌 단검으로 소리없이 죽이고 그림자 속으로 다시한번 사라질 수 있다네."
 "찌르지 않아야할 이유라면, 이게 있겠습니다만.."
 남자는 옷깃을 들어보이며, 찌르레기의 형상을 단순화한 작은 금색 핀을 보여주었지만, 노인에게 그 핀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를, 남자는 모르지 않았다.
 "모른다면 어쩔수 없죠. 또 한가지 이유를 대자면, 습격자를 추적하는 용병의 우두머리는, 이전에 희생자의 피냄새만을 가지고 추적해 수십명을 살해했던 호랑이를 사냥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그다지 없는 듯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떤 이유에서든 절 찌르지 않을테니까요."
 남자는 자신의 바로 옆에 대검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음에도, 차분히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편안한듯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드시겠습니까?"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게. 이유를 말하게나."
 노임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화가 났다기 보단 짜증이 났고, 짜증이 났다기 보단 불안, 불확실함, 무언가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했거나 알아내지 못한, 그런 불안정한 기분, 그로인한 호기심, 진실을 탐구하는 자의 열정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를 본 것일까, 남자는 여유롭게, 정말 여유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들른 가장 마지막 마을은 작은 쉘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소규모 농촌 마을이었죠. 인구수는, 많아야 육백여명 정도 될까요. 딱히 이야기할만한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역이 활발한 위치에 있던것도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그럴 마을이었습니다만, 나물비빔밥은 정말 맛있었어요. 아 뭐, 각설하고, 그런 작은 마을에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정말 큰 뉴스가 되죠. 그것도 지금 세상에선 찾아보기 힘든, 환갑이 넘은 노인이 사라진다면 말이죠. "
 남자는 잠시 노인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뒤가 구린것도, 다른 사람에게 험담을 들은것도 없었던 그 노인은 쉘터 태생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은 타지사람인데, 매우 착한 여인이었고 노인과 아내의 금슬도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노인은 젊었을적에 자기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몇 안되는 마을의 자경단이 되었고, 그 일을 훌륭히 해냈죠. 그리고 많은 이들이 겪지 못하는 노년기에, 아내는 그 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자식 하나 없는 쓸쓸한 삶. 다른 사람들이라면 버티지 못했을 그런 삶을 그 노인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꿋꿋히 버텨나갔다고 들었습니다. 마을이나 다른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생각과 힘을 빌려주던 그는 마을안의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노인은 홀연히 마을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째서인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을의 모두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산 속에서 여행자를 쫒아내는 습격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더욱 말이죠. 혹시 습격자가 노인을 살해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게 아닐까? 마을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한 용병의 무리에게 부탁했습니다. 필요한건 뭐든 주겠네, 그러니 습격자를 쫒아내주게, 라고 말이죠."
 "결론을 말해."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어딘가 괴로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결론이 코앞에 있지 않은가?"
 "그런가요?"
 "노인이 사라지고, 습격자가 나타났다. 알고보니 그 둘은 한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이 아닌가?"
 "글쎄요."
 남자는 어떨까, 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노인을 찾기 위해서도, 습격자를 잡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수십명의 용병을 끌고 온다고 협박한 자가 말인가?"
 "끌고 오진 않았죠. 정확하게는요."
 노인은 칼날을 남자의 목덜미에 들이밀었다.
 "장난치는 거라면 목을 따겠네."
 "제가 찾는건-"
 그리고, 군인이 나타났다.
 "신사분들, 도와드릴거라도 있나요?"
 힐끗힐끗, 모닥불이 비추는 깊은 숲속 사이에서, 자신만이 보일만한 위치에 선 그는, 어둠 속에서도 불구하고 그 건장한 체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실수로 들켰다고 보기엔, 그 모습이 너무 완벽했기에, 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동양인과는 전혀 다른 그 신체 조건과 용모는 어둠속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가 말한 뛰어난 한국어는 그의 존재감을 더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는 군인다운 분위기를 명확하게 풍기며 돌격소총을 허리춤에 찬 체 총구를 노인에게 겨누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괜찮다는듯, 그렇게 그는 먹이감을 먼 발치에서 내려다보는 독수리처럼 편안하게 서있었다.
 노인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 군인의 모습에 적지않게 놀라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단검을 자신의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도, 남자도, 이미 군인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최소한 적지 않게 지켜보고는 적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어르신, 일단 먼저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지라 서툴더라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헌데 방금 거기있는 바드씨를 칼로 위협하고 계시지는 않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군인은 당연한 사실을 직설적이고 뻔뻔하게, 칼날이 시퍼렇게 빛나는 혀 세치로 내뱉어 노인을 찌르려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듯, 노인은 그 발언을 노골적인 자신의 이죽거리는 웃음으로 받아쳤다. 
 "칼이야 꺼냈지. 이 칼을 내가 얼마나 오래 써왔는지, 칼날이 다 닳아 풀도 베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네."
 "그런것 치고는 정말 위험할 정도까지 다가가셨었던데요?"
 무안한 듯, 허허, 하고 웃는다. 
 "나이들면 주책이 없어져, 위험한 것과 위헌한 것의 경계가 너무 희미해지는 것 같다네. 내가 장난이 조금 과했을지 모르는데, 이 젊은이가 워낙 잘 받아줘서 말일세. 늙으면 죽어야지, 안 그런가? 허허."
 "그게 진짜로 받아준 것인지 아닌지는, 바드에게서 직접 들어봐야 할 것 같네요. 바드씨. 진실은 어떤 것 인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군인과 노인 모두, 가식의 가면을 쓰고선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진정으로 해맑게 웃고 있던 것은 남자, 바드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노인의 목숨을 쥐고있는 것 또한 바드였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노인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이 산을 넘어 넘어 먼 곳에서 길을 잃으신 방랑자분이신데, 이 따뜻한 모닥불을 발견하고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밤이 어찌나 추웠는지, 처음 만났음에도 끝없이 친해질수 밖에 없었네요."
 "그렇다면, 이 곳에서 습격자를 만난 적이 없으신건가요?"
 군인은 진정으로 묻고싶은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다시 한번.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 길을 지나가던 모든 여행객을 습격하던 그가, 이런 늙은 노인을 가만히 뒀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나요? 제 생각엔 그가 돌연 사라져 버린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어딘가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이 근방의 맷돼지에게 치여 죽었는지 이젠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만."
 바드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만 하는 것인지, 군인은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엎은 이 판에서, 자신이 불리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그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결코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거 안타까운 사실이네요. 그 습격자를 해치웠다는 증거를 가지고 돌아가야만 제가 보수를 받게 되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그는 소총의 장전손잡이를 자연스럽게 잡아당겼다. 철컥. 마치 시계소리로 착각할만한, 가볍고 맑고 정확한, 정비가 잘 되어있는 총기의 소리가 소총에서 들려왔다. 결국 군인은 강도가 되었다. 무언의 협박을 하는 말많은 강도.
 "결국은 용병이라 그건가요.
 "먹고 살아야죠. 일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바드는 얼굴을 감싸쥐고는 한숨을 쉬었다.
 "얼마를 받기로 했죠?"
 "왜 물어보는걸까요?"
 활짝 웃는다.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두배로 받게 될 테니 말이죠."
 "2.5배면 더 좋을 것 같네요."
 낮게 앓는 듯한 신음소리. 남자는 이 기나긴 대화에서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불편한 표정을 얼굴에 띄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는 듯, 고민고민하다 그는 긍정의 손짓을 허공에 날렸다.
 "대신 전부 돌아가세요."
 "좋죠."
 그렇게 말한 군인은 옷깃을 부여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직후, 수십개의 딸깍대는 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왔다. 한 치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부대끼던 침묵들은 왔을 때처럼 고요하게 사라져갔다. 
 "그럼 다시 만날때까지."
 "별로 원하지 않지만 말이죠."
 진정으로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한 군인은, 그가 몰고온 다른 침묵과 함께 숲의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사라져갔다.
 "고맙네."
 노인의 감사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땔감을 조용히 20분여 넘게 지켜보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그런 그에게선 이미 전의 살의는 한층 옅어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바드로서는 그 사실이 알 바도 아니었고, 알 생각도 없었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짓다, 이내 긴장감이 사라진 숲 속의 밤을 미동없이 즐기고 있었다. 어찌보면, 이미 그는 그가 하려던 이야기를 망각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뭐, 서로 곤경에 처했었다고 보면 되니까요."
 그런 그는 감사를 받고도 1, 2분이 지나서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 여행을 하다 보면, 단순이 옳고 그름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기 마련이니까요. 원하는게 뭔지만 안다면, 어떻게든 수월하게 흘러가는게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돈이라는게 씁슬하지만요."
 "이보게, 바드, 그게 뭔지는 난 잘 모르겠네만 여하튼, 자네를 바드라도 불러도 괜찮겠지?"
 "물론이죠, 사실, 많은 사람이 저를 그렇게 부릅니다."
 남자는 사심이 없는,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드 양반, 자네가 가진 능력인지 뭔지는 무척 대단한 모양이구만."
 그리고, 노인도 비슷한 분위기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 새겨진 수많은 주름 때문일까, 웃음기 서린 그의 얼굴에서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의 나잇대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그런 분위기였다. 
 "그 핀이 자네의 능력을 대변하는겐가?"
 "그런건 아닙니다. 제가 가진 능력이라고 해봤자, 전 듣고 본 이야기를 남에게 전하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이 핀은, 제가 할줄 아는 그 유일한 행동을 돕는 유일한 도구일 뿐입니다."
 "돕는다니?"
 "이 핀을 가진 사람은 왠만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미없는 폭력에게서 벗어날수 있는 권리를 주거든요."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팍에 있는 핀을 만지작거린다.
 "아까 보셨겠지만, 그게 언제나 유효하지는 않습니다만."
 "하핫. 고생이 많구만 그려."
 노인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깊은 눈동자로 바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자네는 진정으로 습격자도, 노인도 찾으려 온게 아닌 모양이구만. 내가 이 곳을 지킨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난 내가 무엇을 지킨 것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네. 그걸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고말야. 그리고 이 길을 지나려 한 사람 중에서, 이 존재를 알고서 직접 찾아온 사람을 본것도 자네가 처음이야. 아마, 그녀는 자네를 위해 이 것을 남겼나 보네."
 그리고 조금 전 보여줬던 멋있는 웃음을 보여준체 말을 이었다.
 "자네의 능력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지? 그럼 부탁하겠네. 바드 양반, 하얀 마녀의 이야기를 해주게. 눈같이 희고 또 철저했던, 하얀 마녀의 이야기를."
 바드는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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