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Single Act Army

Nake 2016. 1. 19. 20:53



“빌어먹을, 결국엔 저지르고 말았구만. 이 친구야, 내가 누누히 말했지? 이 행성에선 마운틴 크립 갱에게 까불면 안된다고."

웃음기섞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며 손에 들린 유리잔을 쉴새없이 닦는 바텐더의 맞은편의 스툴에 걸쳐앉은 와일리는, 그 말을 듣고서 쉴새없이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 단순한 제스쳐에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데킬라나 한잔 더 따라봐라’라는 의미가 섞여 있었다. 벌써 3년, 이 술집을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한 와일리의 제스쳐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바텐드는 특유의 보조개를 띄우며 그의 빈 잔에 데킬라를 부었다.

“그래서, 언제라고?"

“정오. 내일 정오. 웃긴건 뭔 줄 알아? 지들 시간으로 정오라는거야. 이 행성계에서 통용되는 표준 시간대가 아니라. 내 시계로는 내일 한시 반 쯤이라는거지. 정확하게는 한시 이십칠분.  미친, 내가 이딴 깡촌 토박인줄 아시나. 그딴 시간은 지들이나 쓰라지, 왜 나한테 강요하는거야? 아, 기분나빴다면 사과하지. 자네를 노리고 한 소리는 아냐."

“괜찮아, 신경쓰지 않으니. 애초에 깡촌 토박이라는 말이 사실이기도 하니까. 볼 것도 할 것도 없는 이 좆같은 행성에 태어난게 죄지."

바텐더는 그렇게 냉소하며 잔을 새로 꺼내 그곳에도 데킬라를 따르고는, 잔을 들고 말했다.

“이 빌어먹을 행성을 위해 건배."

“건배."

와일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 못지않게 쓰디쓴 술을 들이키면서, 술의 맛을 쓰레기같이 느낀 원인이 방부제 가득한 질낮은 술 때문인건지, 아니면 이 행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때 대략 스물 다섯시간 남은 자신의 목숨 때문인건지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다. 물론, 그 생각은 수초뒤 식도를 불태우는 감각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정말 못 도와주는거야?"

“미안하네 친구. 자네가 떠나도 나는 여기서 살아야한다고. 계속 말하는거지만, 이 행성에서 마운틴 크립 갱에게 깝치다간 내 삶이 위험해. 튀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회사에선 지원군을 못보내주는거야?"

“‘회사 산하 보안 요원을 위한 사칙 제 468조 31a항 4절. D급 우선순위 행성에 배속된 보안요원은 자신의 신체나 재산에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지진 경우에 한해서만 추가적인 지원 요원을 회사에 요청할 수 있다.’"
 
“하. 좆같은 새끼들일세. 진짜 지원군이 없는거야?"

“'5절. 이를 보완하기 위해 D급 우선순위 행성에 배속된 보안요원은 이하의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a. 현지에서 징발한 보조요원 혹은 이에 준하는 인격 생물체. b. 회사의 사칙이 지향하는 관점에 부합하는 윤리의식을 지닌 자경단 혹은 이에 준하는 인격 생물체의 집단. c, 기타 등등..’ 알겠나? 자네가 내 보조요원이라고."

“누구맘대로?"

“자네 지난번에 사인한 종이 있잖아? 그게 보조요원에 동의한다는 서류였어."

“뭔소리야?"

“한 2년 전쯤 이야기지."

“설마 일 끝나고 거나하게 취해서 깽판쳤었던 날?"

“아마도?"

바텐더는 손바닥을 펴치며 와일리에게서 멀어지는 시늉을 했다.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야. 말했지만, 이번 일은 못 도와준다고."

“알아. 나도 손벌릴 생각은 아니었어. 정 안되면 용병단이라도 찾아가 봐야지. 애초에 술취한 배불뚝이 아저씨한테 뭘 바라겠나."

“말이 심하구만. 그나저나, 그 무슨무슨 사칙인가, 그거 다 외우고 다니는거야? 대단하구만."

“그걸 어떻게 다 외우고 다녀. 쫄려서 어젯밤에 될수 있는 한 뒤져본거라고. 그 부분은 다 외울 정도로 말이지. 좆같은 회사야. 인력을 아끼기 위해서 정말 철저하게 짜놨더구만. 수십명의 변호사가 골방에 앉아 이 규칙을 짰을 생각을 하니 웃기더구만."

“아마 세자리수 였을거야. 내 장담하지."

와일리가 웃었다.

“그래도 후회는 안하는구만."

“절대로.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같은 선택을 했을거야. 너라도 그랬을거라고."

“글쎄."

바텐더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 술을 따랐다. 자신의 잔과 와일리의 잔에.

“변치않을 선택을 위해, 건배."

“그리고 거기에 뒤따른 좆같은 결과를 위해."

잔을 들이켰다. 변함없이 맛이 없었다.

“이 잔은 바가 부담하는걸로 하지."

지갑을 꺼내기 위해 손을 집어넣은 와일리가, 그렇게 말한 바텐더의 얼굴을 놀란듯 바라봤다.

“사형수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잖나."

바텐더가 말했다.



뜨겁게 불타는 듯한 쓰디쓴 속을 부여잡고, 와일리는 차디찬 거리로 나왔다. 거리라고 해봤자 별건 없었다. 이곳이 그나마 사람이 많은 번화가였음에도, 행성 특유의 건축양식을 따른 독특한 목조 가건물이 포장조차 되지 않은 넓은 길가에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셔틀에서 나오는 뜨거운 엔진열이 길에 쌓여있는 눈을 녹이고 지나갔었는지, 쉴새없이 내리는 가루눈에도 불구하고 도로가 어디에 있는지 와일리는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도로변을, 테니스 채처럼 생긴 덧신을 신고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와일리의 머릿속엔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용병단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그건 마지막 수단에 가까웠다. 와일리는 모르는 사람은 믿지 않았고, 돈을 받고 손을 빌려주는 용병은 더욱이 믿지 않았다. 뭣보다, 그런 일을 하는 놈들이라면 마운틴 크립 갱과 한통속일게 분명했다. 애초에 그들의 가장 큰 손이 누구겠는가. 이 좁은 행성에선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와일리는 생각했다. 도움을 받으려면, 마운틴 크립 놈들이 생각하기에 와일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할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전혀 도움이 되어보이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비장의 수로써 좋은 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와일리는 생각했다. 누가 비장의 수로 적절하게 기능할 것인가. 믿을 수 있으면서도, 썩 좋아보이지 않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그런 사람.

순간 와일리는 자신이 무대의 연출자라는 상상을 떠올렸다. 적절한 상상이었다. 애초에 분위기 자체가 황량한 서부극과 비슷했다. 물론, 피부를 가르는 추위와 쉴새없이 쌓여가는 눈은  극과는 맞지 않는 요소였지만, 그것만 제외하고는 썩 비슷한게 사실이었다. 품속에 뜨겁게 예열된 빔 피스톨 한정 쯤은 애들도 가지고 다닌다는 것부터가 말이다. 하지만 와일리는 황야의 보안관이 아니었다. 그는 썩 정의롭지도 않았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을 하는 소시민 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도움이 필요했다. 금새 사라져도 괜찮을, 서부극의 엑스트라가 필요했다. 보안관보가 필요했다.

그런 생각 끝에, 와일리의 기억의 실타래 구석에서 한 이름이 떠올랐다. 조쉬, 조슈아.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것이다. 좀 뚱뚱하긴 했지만 심성은 올곧은 청년이었다. 3년전 이 변방의 행성에서도 변방에서 일어난, 회사의 기물 손괴 관련한 사건에서 도움을 받았던 청년이었다. 1년 전이었나, 이쪽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두꺼운 장갑으로 주머니를 힘겹게 뒤지다, 겨우 단말기를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휘리릭 넘어가는 수많은 주소록을 눈으로 훑다,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조쉬, 조슈아도 아니었다. 요한이었다. 그의 이름을 꾹 누르자, 단말의 화면이 변화며 통화를 거는 중이라는 표시가 떠올랐다. 

빛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와일리는 그렇게 길가에 마냥 서있었다. 전화 받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송신음은 계속됬다. 몇겹으로 껴입은 모피코트와 따뜻한 니트 모자 위에 눌러쓴 양모로 만든 방한모 사이로 드러난 맨 얼굴이 찢어지는것만 같았다. 피부에 닿는 눈송이가 마치 면도칼 조각인 것 처럼, 투박하고 흉터 가득한 와일리의 얼굴을 세포단위로 갈라버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자코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대신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요한입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니 삐 소리가 들리면.."

그리고 친숙한 신호음이 들렸다. 와일리는 서로 얼어붙어 꿈쩍도 하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냈다. 내쉬기 위해 들이킨 숨은 미칠듯이 차가워서 폐부 깊숙히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사레들린 것처럼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서, 와일리는 메세지를 남겼다.

“요한? 이 번호가 맞는것 같아 다행이네. 요즘엔 어때? 잘 지내지?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지. 내가 지금 좀 곤란한 상황에 처해서말야, 일손이 필요해. 지난번에 같이 일했을때, 자네 실력을 보고 감탄했다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해야하나. 자네가 있으면 정말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네. 자네 친구도 부를 수 있으면 불러주면 고맙겠네. 물론 보상은 두둑하게 줄거고. 거기다가, 이번 일이 잘 풀리면, 회사에 자네를 소개시켜 주도록 하겠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관심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주게."

좋아. 배우는 구했고. 확정된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요한이 거절할 사내가 아니라는걸 와일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특유의 감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확한건 아니었지만 몇번인가 그의 목숨을 구했던 감이었다. 이번에도 믿어볼 것이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믿을게 별로 없긴 했지만.

자, 그럼 이젠 무대가 필요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었지만, 방어하는 쪽에서 유리한 곳이면 어디든지 좋았다. 고저차가 있으면 더 좋고. 일방적인 사선을 형성하는 감제고지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사랑받는 위치였다. 동시에 외부에서 노출되지 않는, 다시말해 창문이 적은 곳이라면 더욱 더 좋았다. 문제는 그런 건물이 이 거리에, 이 행성에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와일리는 이내 그런 장소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래서 찾아온게 저희 은행이라구요?"

지긋한 연세의, 그리고 그 나이에 걸맞는 정정한 외모를 한 은행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 외모만큼, 은행장이 초연한 건 아니었다. 지나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금속테 안경 너머에서 와일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당혹으로 가득차있었고, 목소리 또한 당황과 황당,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가미되어 있었다.

“네. 썩 알맞은 환경 아닙니까. 창구를 겸한 로비는 탁 트여있어 어디든지 단 한 곳밖에 없는 출입구를 바라볼수도 있고, 반층 구조로 되어있는 은행장실은 훌륭한 감제고지로써 기능할 수 있죠. 보안을 위해 창문은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고 말이죠."

“저희 구조가 공격으로부터 용이한 방어거점으로 지어진건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건 강도를 위해서 디자인 된거지 당신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게다가 당신이 상대하는건 떨거지가 아니라 무려 마운틴 크립이잖아요. 그들을 상대로 당신을 도우라는거에요?"

와일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사실을 알리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은행장은 인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예. 저도 알아요. 아마 이 거리에 사는 사람 전부 알 걸요?"

“그거, 기대하지 않았던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운틴 크립이 적이라고 해서 갱단 전부 쳐들어오는건 아니라구요. 애초에 쳐들어오는건 마운틴 크립 소속조차 아닐겁니다. 요즘에 누가 그렇게 일을 합니까? 돈을 가진 큰 대가리가 밑에있는 간부한테 명령을 하면, 그 간부가 지역에 분포한 소규모 떨거지들에게 하청을 주고, 그런식으로 일이 돌아간다구요. 몇백년전 자본가 뚱땡이들이 고안한 하청구조가 범죄조직에서도 똑같이 돌아가는거죠. 제가 파악하기로 이 구역을 책임진 녀석들은 스페이스드 녀석들일거고, 그놈들이 한번에 동원할 수 있는 주먹이라고는 다섯? 여섯이나 되면 많은거죠. 한사람 잡으려고 수십, 수백을 부르는건 영화나 게임에서나 나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여전히 은행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은채 그대로였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렇게 나오깁니까? 아니, 애초에 이 은행 자체가 저희 회사의 융자를 받아 지어진 건물이잖습니까? 이 구조 자체가 저희 회사의 표준 디자인이구요. 건물주를 대표하는 대표인으로써 공적인 용도로 잠시 건물만 빌리자는 겁니다. 보안요원을 빌리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일 오후 한시 반 전후해서 두시간정도 건물을 비워달라는 것 뿐이죠.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 없는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일찍 퇴근하고 좋지 않습니까.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거에요."

“가족은 끌어들이지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말 뜻이 뭔지는 알지 않습니까. 뒷정리는 제가 하도록 할게요. 핏자국이 남을 일도 아니라구요. 보상도 충분히 할거구요."

그러나 와일리의 끈질긴 설득에도 은행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는 없어요. 지금 이 모든건 당신이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건데,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거죠? 죽고 끝나는건 당신이겠지만, 이 행성에서 살아야하는건 저희들이에요. 그런데 이 행성에서 마운틴 크립에게 찍히면 사는게 사는게 아니게 된단 말이에요. 저는 물론 저희 은행원들과 제 가족 전부말이에요. 고객들은 이 은행에서 예금을 전부 빼낼거고, 이 은행이 망한 뒤에 뭘 하더라도 방해를 받을거라구요."

“아니, 여기 말고 은행이 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신용만 있다면 은행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죠. 빌어먹을, 아마 마운틴 크립이 자기들의 은행을 차릴지도 모르는 거구요.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에요."

와일리는 곤란한것 처럼 턱을 쓰다듬었다. 아침에 한 면도가 충분치 않았던 것처럼, 금새 자라난 짧은 수염이 턱 주변에 촘촘히 자라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합니다. 만약 은행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저희 회사로부터의 지원은 꿈도 꾸지 마셔야 할겁니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저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끔찍한 일을 당하는건 하청을 받은 스페이스드 놈들 뿐만이 아닐거에요. 마운틴 크립 새끼들은 이 행성을 차지하고 있지만, 저희 회사는 이 우주를 차지하고 있다구요."

“협박입니까?"

비열한 웃음을 얼굴 가득히 띄우며, 와일리는 답했다.

“그저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예상한 것 뿐입니다. 협박처럼 들렸다면야 뭐…"

이죽이는 그의 얼굴에 마치 침이라도 뱉을것 같은 은행장은, 전에없는 눈빛으로 쏘아보다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일 일어나는 일은, 저와는 아무 상관 없는겁니다."

“물론입죠."



요한은 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와일리는 그에게, 회사 표준시로 내일 열두시쯤에, 은행으로 오라는 음성을 남겼다. 단말을 품 속에 집어넣고, 그대로 주머니 속에 손을 쳐박아놓은채 와일리는 생각했다. 배우도, 무대도 준비됬다. 더 필요한건? 각본인가. 하지만 이 서부극에서 각본은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 서부극이란게 그런거 아닌가. 장면과 장면의 인상이 서부극의 향방을 가른다. 좋은 플롯을 가졌어도 장면이 구리면 망한 서부극이고, 개연성없는 쓰레기 플롯을 자랑하는 서부극이라도 장면이 사람들의 뇌리에 쳐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서부극은 대대손손 기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롯보다 중요한건? 와일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그래. 무대장치. 소품. 자잘한 디테일. 그는 은행 입구에 서서 눈을 맞으며 자신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떠올렸다. 회사 보안 요원에게 표준 지급하는 P-58D 표준 빔 피스톨은 품 속에서, 이 행성에서 구입한, 지독한 화력을 자랑하는 개조형 APK 059 타입 F는 등허리의 홀스터에서 뜨겁게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었지만 두 총 모두 고장나더라도, 그의 발목에는 언제나 든든한, 화약 작동식 리볼버가 숨겨져 있었음으로 문제는 없었다. 이 행성의 가장 극심한 추위에도 문제없이 작동하는 그 리볼버만큼 그가 신용하는게 없었다. 그리고 최후의 최후에는, 벨트에 달린 6인치 단검을 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을 준비해도 무기는 부족한 것이었다. 과유불급은 헛소리다. 준비는 언제나 철저해야된다. 계획이라는건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래. 지금 아니면 언제 쓰겠어. 와일리는 떠올렸다. 그는 품 속에서, 한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금속 공 두개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폭발물이었다. 뇌관이 분리되어이있는, 원격 작동식 폭발물이었다.
 
놀랍게도, 이 폭발물은 그가 사적으로 구매한 것이 아닌,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회사가 보안 요원에게 표준 지급한 물건이었다. 크기에 비해 폭발력은 어마어마했기에, 이를 입구쪽에 있는 눈에 파묻어 둔다면 환영인사로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은행이 피해를 입기야 하겠지만, 마운틴 크립 쪽으로 책임을 돌리고 보험으로 돈을 받아내면 될 일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그는 금속 공에 속 주머니에 담긴 뇌관을 두 구슬 안에 결합했다. 작동이 시작됬다는 듯, 금속 구슬을 작게 울리며 열을 발하기 시작했다. 장갑 너머로, 그 열이 조금이지만 느껴졌다. 와일리는 은행 현관 앞의 눈 무더기를 파해쳐 폭발물을 집어 넣고, 그 위를 다시 눈으로 덮었다. 지금 보기엔 두개의 어색한 눈무더기가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밤새 내린 눈이 이 흔적을 지울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와일리가 웃고 있을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뭐하고 계세요?"

소년이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니, 어린애를 좋아하지 않는 그였기에 기억에 남지 않은 것 뿐일지도 몰랐다. 어찌됬든, 낯선 아이였다.

“음,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어."

“여기, 은행에서요? 잘 되길 빌어요. 그럴것 같진 않지만."

와일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한 아이였다.

“왜, 누구 주식하다 망한 사람 있냐?"

“네. 저희 삼촌이 다른건 다 잘하는데 주식만 못 하더라구요. 우리 아빠는 암말도 안하지만, 다른 행성에서 잘나가던 삼촌이 이 깡촌에 틀어박힌 이유는 안봐도 뻔하다구요."

“네가 생각하기에도 이 행성이 깡촌이냐?"

“그럼요."

“다른 행성을 가본것도 아니잖아?"

“왜 그러실까, 구닥다리처럼. 넷만 접속해도 여기보단 나은 행성이 수천개는 될거라구요. 지구도 여기보단 나을걸요?"

“말이 심하구만! 아무리 그래도 지구는 아니지. 내가 장담한다."

“하. 그러고보니 아저씨는 외계 출신이죠?"

소년은 코를 닦으며 웃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허를 찔린 와일리는 멍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왜요? 여기서 아저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구요.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아, 뭐 그건 그렇긴 하지."

“그리고 아저씨가 내일 어떤 일을 당할지도 다 알구말이죠.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마운틴을 건드리는건 제정신 박힌 사람은 못할 짓이라구요."

“거기엔 노 코멘트하지, 꼬맹아. 사나이는 꼭 해야만 하는 선택이란게 있다고."

“웃기시네. 그 소녀가 아저씨한테 고마워할 것 같진 않던데요? 어쩔거에요? 그냥 마운틴이 데려가게 놔뒀어야죠."

“그냥 죽게 두라고? 야, 이래뵈도 보안 요원이라고. 치안에 누가되는 범죄행위는 막아야 하는거야."

“웃기시네. 치안은 개뿔."

소년의 말이 하나하나 비수를 찔러왔지만, 와일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어쨌거나, 애새끼 아닌가.

“빨리 소녀처럼, 이 행성을 벗어나 도망치라구요. 그것만이 살 길이에요."

“안돼. 그럴수는 없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자존심은 무슨. 서부극이라도 찍으세요?"

“그렇다고 해두자."

와일리는 히히 웃었다. 실없는 듯한, 하지만 그 나름 진지한 웃음이었다.

“아, 몰라요. 어짜피 제 일 아니니까. 그래서 내일 여기서 깽판치는 거에요?"

“아니."

와일리가 웃으며 말했다. 

“뭐 제 알바는 아니지만. 주식, 상한가 치길 바래요."

“고맙다 꼬맹아."

쓀새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와일리는 길을 나서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피를 신고 걸어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그걸 신고 걸어가야 하는건 와일리 또한 다를바 없었다는걸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에서 덥혀진 뜨거운 공기가 차가운 바깥 바람에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흩어졌다. 그 새하얀 입김을 지나쳐, 와일리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와일리는 무사히 일어났다. '모레 정오. 그때까지 이 행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네가 어디있든 널 찾아가 죽여주마. 그 전엔 가만히 놔주마.' 자신의 말을 지킨다는 점에서, 마운틴 크립 갱은 무서울정도로 신사다웠다. 와일리에게 있어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창밖에선, 눈이 전날보다 무섭고 매섭게 몰아쳤다. 두꺼운 방풍창문이 무서울 정도로 요동치며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또한 이 행성에선 별 차이없는 평범한 하루일 뿐이었고, 마운틴 크립이 와일리를 향해 다가오는건 변치않는 사실일 것이었다. 그래서, 와일리는 옷을 챙겨 입었다. 두꺼운 겉옷에, 어께를 짓누르는 두꺼운 대광자 방탄복을 입자 몸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책임치는 것이었기에, 와일리는 불평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번쯤은 막아내겠지.

총의 정비는 언제나 완벽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도 쏠 수 있도록, 방아쇠울을 제거하고 작동 손잡이를 크게 개조한 APK와 P-58은 물론이고, 리볼버를 위한 탄약도 스피드 로더에 재운 다음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리볼버를 발목의 홀스터에 찔러넣고, 설피를 신은 뒤, 현관문을 열고 와일리는 집 밖으로 나섰다. 눈이 무서울정도로 몰아닥쳐 집 안에 파고들었다.

힘겹게 두꺼운 나무 현관을 닫고는, 주머니에서 단말을 꺼내들었다. 회사 표준 오전 열한시 사십이분. 놈들 시간으로는 열시 이십오분이었다. 은행까지 걸어가면 약 삼십분이 걸렸으니, 녀석들에게 제공할 화려한 환영인사를 준비하기에 무리없는 시간이었다. 다만, 아직도 요한에게서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 와일리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럴 애가 아닌데. 그는 뒤뚱거리며 은행으로 향하며, 요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요한입니다…"

그 순간 와일리의 마음에 차갑게, 그 두꺼운 외투와 겉옷을 꿰뚫고 파고든 차가운 냉기마냥, 의식하지 않으려던 불안감이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엄습했다. 죽음과 직결되는 불안감. 그의 목숨을 지켜줬었던 와일리의 직감이, 지금은 뭔가 이상하게 일이 굴러가고 있다고, 아주 낮은 무의식 속에서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상황을 조절하려고 하고, 와일리의 이성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직감은 그저 막연한 비논리라 치부한 와일리의 이성은, 요한이 그저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고, 모든 일은 와일리가 계획한 것처럼 잘 풀릴 것이라고 와일리에게 충고했다. 와일리의 이성은 와일리에게, 그가 오늘을 위해 어제 기울였던 노력을 떠올리라 이야기했다. 그 노력은 와일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이성은 그렇게 말했다. 와일리는 이성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에 다가가 두꺼운 문고리를 두들겼을때, 거대한 빔라이플의 총구가 뜨겁게 타오르며 맞이했을때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보안요원이 총구를 치우지 않은체 말했다. 와일리는 그가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곧 그가 자신을 돕기 위해 남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그게 나때문이라고. 이제 들어가도 되겠나? 빌어먹을 정도로 밖에 춥구만."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뒤돌아 나가주시죠."

하지만 보안요원은 와일리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훈련을 잘 받은 것은 확실해 보였고, 그의 임무에 대해 충실한 것 또한 마음에 들었지만, 와일리에겐 이런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깨딸은 사실이었지만, 와일리에겐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다.

“이봐. 나라고. 와일리. 회사에서 파견된 보안요원."

와일리는 냉기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덮고있던 코트자락을 손으로 내려서까지, 그의 얼굴을 보안요원에게 확실히 보였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아침에 면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알아보지 못할 얼굴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었다. 보안요원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서, 그 얼굴을 눈동자로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알겠지? 그러니까 이제 은행장 좀 불러올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와일리가 문을 잡자, 보안요원은 라이플을 똑바로 쥐며, 와일리의 심장을 겨누고 말했다.

“말했습니다.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더 가까이오면, 쏘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은행장! 이게 무슨일이야! 안에 있는거 알아! 대답해!"

와일리는 분노를 담고서 은행 안쪽으로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는 이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보안요원이 총구를 겨누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은행장이 그를 거부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 거리로부터 고립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운틴 크립 갱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는 이 때, 어두컴컴한 구름 아래 쏟아지는 묵직한 함박눈 아래 몸을 떨며 은행 앞에 서있는 자신의 처지를, 그 비정한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는건 없었다. 보안요원은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문이 열렸다.

“은행장."

“와일리."

그곳에는 은행장이 서있었다. 와일리의 생각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오른손에 구형 리볼버를 들고, 허리춤에서 와일리를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와일리의 생각은 맞지 않았다.

“약속하지 않았나?"

“약속이라니? 뭘?"

“이 건물을 빌려준다는 약속."

“그런 약속을 한적은 없는데 말이지."

“개같은 년이."

“얼마든지 욕해봐. 난 오늘 여기로 와보라고 했지, 건물을 빌려준다는 말은 안했어. 대신 네가 말한대로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네가 마운틴 크립에게 제대로 죽은 뒤에 말이지."

“기억하겠어. 이 일을 위에 보고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고 보라고."

“뭐, 네가 뭘할건데? 넌 일개 보안요원에 불과해. 그것도 D급 우선순위인, 사실상 우선되지 않는 깡촌에 파견된 말단 직원이라고. 네 말을 누가 들어주겠어? 어짜피 네가 죽으면 다른 보안요원이 오고, 난 그 사람에게 잘보이면 되는 것 뿐이야. 겸사겸사, 마운틴 크립과도 잘 되는거고. 너도 알겠지만, 그들은 꽤나 신사적이란 말야. 신뢰라는 점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그들은 그들의 말을 꼭 지킨단말야."

마치 짐승처럼, 와일리는 그르렁거렸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화를 풀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선, 그녀가 이긴 것이 분명했다.

“자, 이제 만족했다면 꺼지시지, 황무지의 보안관님. 잭슨, 이 남자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면 바로 쏘게."

“알겠습니다, 마담."

“…"

와일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입을 열었다.

“잠깐. 하나만 물어보지."

“멈춰. 뭐?"

“혹시 여기 한 사내가 오지 않았나? 내 이름을 대면서?"

은행장은 고개를 저었다.

요한은 오지 않았다.

요한도, 와일리를 버렸다.

문은 매섭게 닫혔다. 눈은 계속 내렸다.



APK. 문제 없음. P-58. 문제 없음. 리볼버. 문제 없음. 나이프. 문제 없음.

눈에 파묻힌 폭발물을 허겁지겁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와일리는 정처없이 걸었다.

그들의 시간으로 정오까진, 십분가량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와일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대기해야할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배우도 없고, 무대도 없다. 소품만 존재하는 서부극따위 들어본적도 없었다. 우습게도, 각본은 있었다. 십분 후, 마운틴 크립이 올것이다. 와일리가 어디서 대기하든, 와일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건 확실했다. 이 행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에게서 벗어날수는 없었다. 그게 스페이스드가 됬건, 아니면 빌어먹을 마운틴 크립이 직접 오건, 그에게 오는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각본은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이 행성을 벗어나는 셔틀을 떠올렸다. 쓸데없이 크고 요동치며 이상한 냄새가 나는 셔틀이었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지금 이 행성,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그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쓸모없었다. 그는 이 행성에 혼자 버려져있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믿었던 자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린, 빌어먹을 현실이었다. 그는 그 비정한 현실에 맞서, 서부극의 카우보이처럼 홀로 맞서야했다. 하지만 이건 서부극이 아니었다. 와일리는 카우보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옹졸한 보안요원에 불과했다. 은행장의 말처럼, 죽으면 대체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는 정처없이 거리를 걸었다. 어째서인지, 눈보라가 잦아들고 있었다. 눈발은 약해져, 이젠 그저 싸리눈이 아주 조금씩, 허공을 춤추며 너풀너풀 내릴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거리를 방황하는 와일리를 이끈것은 무의식이었다. 그의 이성이 옭아맨 직감이었다. 그 직감은, 와일리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굳게 닫힌 술집의 문을 와일리는 발로 차서 열어재꼈다. 신고있던 설피 때문에 균형을 잃은 와일리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우스꽝스럽게 눈에 파묻혀있던 와일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술집안에 아무도 없는듯 했다. 와일리는 애처롭게 눈을 파해쳐, 겨우 일어나 술집 안으로 몸을 던지다시피 들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대자로 쓰러졌다.

“시발."
 
그렇게 오분여, 자리에 누운체 가만히 숨을 내쉬다, 이윽고 와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좆같은 현실을 원망하며 눈을 털고 설피를 벗어던지고서야, 그는 시선을 바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바텐더가 있었다. 물론, 그의 얼굴은 못볼것을 본 것 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와일리의 표정도 곧, 그런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건 바텐더 때문이 아니었다. 바의 반대편에서 술잔을 든 체 가만히 얼어붙은 한 남자 때문이었다.

“요한."

와일리는 말했다.

“이 시발새끼."

“와일리."

요한은 힘들게, 와일리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은 분명 와일리를 기대하지 않은 듯 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메세지를 받고도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와일리는 부서진 설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와일리. 말했을텐데, 못 도와준다고."

와일리의 날선 말에 얼어붙은 요한 대신, 바텐더가 말했다.

“도와줄 필요 없어. 지하에 주류보관소 있잖아. 거기로 숨어. 너. 너도 마찬가지야. 지하에 처박혀서 내가 죽든 개새끼들이 죽든 그 뒤에 기어나와. 알겠어?"

“와일리."

바텐더는 마치 와일리의 말을 못들은 것 마냥, 바 밑에 있던 물건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말했잖아. 못 도와준다고. 나가."

투박한 구형 빔 캐논의 총구는, 특유의 녹색 빛을 머금은체 와일리를 향했다. 익숙한 총이었다. 와일리가 추천한 총이었기 때문이다. 무겁긴 하지만, 그 화력은 어떤 개새끼가 술집에 쳐들어와도 한방에 몸을 두짝으로 나눠버릴 것이라고 장담했던 총이었다.

“제발."

“안돼."

“대체 왜. 보상은 회사에서 할거라고."

“이유는 너도 알잖아."

“제발!"

그렇게 말하며, 와일리는 품 속의 빔 피스톨을 꺼내들어 바텐더를 겨누었다. 때문에, 바텐더는 움찔했다. 그는 전에 사람을 쏴본적이 없는 사내였다. 분명 험상궂고 갖은 말썽에 휘말린 적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을 쏴본적은 없는 사내였다. 때문에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반면, 와일리는 달랐다. 그는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 회사의 여느 전쟁처럼 그가 참여한 전쟁도 금새 끝났지만, 그것이 그가 겪은 전장이 헛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이 비릿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쏘기 전에 생각을 하는 일반인과 다르게, 쏜 뒤에 생각을 하는 군인이었다. 비루하게 전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군인이었다.

“이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그리고 그가 왔다.

“세상에. 빅 마운틴, 그 거물이 직접 올줄은 몰랐군."

빅이라고 하기에, 그의 키는 작았다. 비교적이긴 했지만, 바텐더나 와일리보다 작은 것은 확실했다. 아마, 이 근방에 사는 평균 남성의 신장과 비교했을때 작은 것 또한 분명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별명이 빅 마운틴이었다. 반어적인, 범죄자 특유의 비릿한 풍자였다. 빅 마운틴은 그런 비꼼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행동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의 행동에 있어서는, 결코 작은 남자가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 처럼, 그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마치 거대한 산처럼.

“미스터 와일리. 범죄 업계 또한 다른 업계처럼 신용이 중요한 사업이라구요. 아니,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는 다른 그 어떤 직업보다 무거운 직업이구요."

“알겠구만 그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미스터 와일리.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자신의 단골 술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니, 그거 완전 멋지다니까요. 인정합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 그리고 소녀를 구한 결정? 그것도 정말 영웅적인 행동이었죠. 제 부하들이 저지른 일, 그건 분명 잘못됬습니다. 제가 의도한 일이 아니라는걸 여기서 확실히 하고싶네요. 그 치들에 대한 처벌은 확실하게 처리했습니다. 그걸 막아선 와일리씨도 정말 대단해요.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그것과 저를 거스른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미스터 와일리. 당신은 기분이 나쁘더라도 일을 돌아서 처리했어야 해요. 말단 관리직답게, 서류와 절차에 따라 항의를 표하고 그에 따른 처리를 했어야해요. 당신이 카우보이가 아니라는걸, 당신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빅 마운틴은 그렇게 말하며 술집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문가에 서있던 와일리는, 어느샌가 꺼내든 APK의 총구를 빅 마운틴에게 향하고, 다른 손에 든 P-58을 바에게 겨눈체, 마치 빅 마운틴을 피하는 것 처럼 그대로 뒷걸음질치며 술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텐더의 총구는 아직 와일리를 향해있었지만, 그의 적의는 분명 빅 마운틴에게 옮겨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와일리와 함께 있는 것을, 빅 마운틴에게 들키고 말았으니. 그걸 눈치챈듯, 빅 마운틴은 와일리를 바라본채로 바텐더에게 말했다.

“바텐더, 총은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술집 주인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추위에 떠는 주정뱅이가 가장 익숙한 곳으로 향한것을.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죠. 총을 내려놓고, 지하로 들어가세요. 지하가 있죠? 주점이니 당연히 있을테죠. 거기 들어가시면 됩니다. 손님분, 요한이었죠, 분명? 당신도 같이 들어가 계세요."

그 말이 바텐더를 움직이게 만드는 방아쇠인 것 처럼, 바텐더는 말을 들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무거워보이는 총을 바 밑에 내동댕이치고 창고로 가는 문을 연 뒤, 몸을 반쯤 집어넣고는 요한을 향해 말했다.

“이봐 친구, 들어오라고."

“와일리, 저는…"

“들어가, 요한."

와일리가 말했다. 이제 그가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누굴 탓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에게 남은건, 이 상황 뿐이었다. 빅 마운틴 앞에 대면한 자신 말이다. 그 사실을 알아챈듯, 요한은 머뭇거리다, 곧 바를 넘어가 바텐더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 육중한 트랩 도어를 닫았다. 겨눌 상대가 없어진 와일리의 P-58은, 이내 빅 마운틴을 향했다. 두개의 총구가 빅 마운틴을 향해 빛나고 있었건만, 빅 마운틴은 아직도 총을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좀 하죠, 미스터 와일리."

“할 이야기는 없어."

그리고 품속에 P-58을 넣고는, 폭발물의 스위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폭발물은, 지금 빅 마운틴의 바로 뒤, 술집의 문 바로 앞의 눈 속에, 와일리가 문 앞에서 균형을 잃고 쓰러진 바로 그 순간부터 놓여 있었다. 

“말했다시피, 난 카우보이가 아니야. 그래서 비열한 함정을 팠지. 지옥에서 보자, 빅 마운틴."

그리고 와일리는 스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 함정에 대해 이야기하려구요."

빅 마운틴은, 이죽이며 웃었다.

“어젯밤에 조카 한놈이 전화를 걸더라구요. 은행 밑에 뭐가 있다고. 아까 보안요원이 뭘 숨겨놓고 있다고말이죠. 부하를 시켜보니 글쎄, 폭발물이지 뭡니까. 사람이 지나가는데 위험하니까 뇌관을 빼놓으라고 이야기해뒀습니다. 보아하니 미스터 와일리가 숨겨놓은게 확실한가 보군요."

그 말은 와일리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와일리는 분명 두 다리로 서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쓰러졌다. 와일리는 분명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두손을 들고 항복했다. 와일리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다. 그는 울고싶었다. 원망하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총구를 들어,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대신 와일리는 두 다리로 서서 빅 마운틴을 겨누고 있었다.

빅 마운틴은 조용히,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뒤로 눈에 익숙한 깡패들이 들어왔다. 스페이스드 놈들이었다. 평소에는 강도나 마약을 운반하는 떨거지들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 빅 마운틴의 직속 명령을 받는 처형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빔 라이플을 든 그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해 있었다. 마치 프로페셔널처럼. 와일리가 한때 그랬었던 프로페셔널처럼.

“자, 그래서. 전 준비가 끝났습니다. 미스터 와일리, 마지막으로 할 말은?"

와일리는, 떨리는 총구를 잡고서 숨을 들이켰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기에, 그 숨을 들이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살아나기 위한 이성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은 포기했다. 이 술집에 더이상 이성적인 해결책은 없었다.

그렇게, 이성이 떠나고나서야, 와일리는 초연해졌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결코 후회하지 않는 직감이 와일리를 지배했다. 

그래서 와일리는 말했다. 마치 액션 히어로처럼. 마치 카우보이처럼.

“다시 한번 말하지. 지옥에서 보자, 빅 마운틴."











부서진 탁자. 나무 파편. 이리저리 흩어지고 녹아내린 술병 조각과 불타버린 위스키의 검은 흔적들. 단백질이 불탄 특유의 냄새. 핏자국. 눈. 휘몰아치던, 하지만 이제는 멈춘 눈. 그리고 열린 문으로부터 쏟아지는,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햇볕. 그리고 시체 . 시체들.

그리고 그곳에 누워있는 와일리.

홀로 남은, 이 행성에 홀로 남은 와일리.

그는 그렇게 쓰러져,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