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관행적 행정절차

Nake 2015. 11. 5. 05:20


오늘 하루도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을 시작한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들춰보고, 분류하고, 평가하고, 결제하고. 들춰보고, 분류하고, 평가하고, 결제하고. 인공지능에게 맡겨도 충분히 될 일임에도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 아침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점심 시간을 제외하면 꼬박 9시간을 이 지루한 일에 투자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려고 27년을 꼬박 공부한게 아니라고. 이런 일을 하려고 지구 제일의 대학에 들어가기위해 목숨을-말 그대로!-걸었던게 아니라고. 맨 처음 이 회사에 들어와 이 보직을 받았을땐, 더 나은 자리를 위한 임시직이라 생각했건만, 들춰보고, 분류하고, 평가하고, 결제하길 벌써 4년째. 아무리 범지구적으로 잘나는 회사라지만 이쯤되면 일에 대한 회의가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회사에 대한 충성심? 개소리지.

1052일째 반복하는 하루, 이 지루한 일과에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은 다시 찾아왔다. 그나마 숨을 다시 쉴수 있는 시간. 이 회사의 몇 안되는 장점인 사내 식당은 그래도 만족할만한 식사를 제공했다. 식단도 매일 바뀌고, 원하는 식단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점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업무를 버틸 수 있는 몇 안되는 요소였다. 더욱이, 회사생활을 버틸 수 있는 또다른 요소인, 울리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바트, 오늘은 어때요?"

울리케가 홀로 테이블에 앉아 스테이크 버거를 먹고 있는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혼자 밥을 먹는건 이 부서에선 당연한 일이다. 울리케가 다가와주는 내가 이 부서에서 특이한 케이스란 말이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윗선에서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필요 이상의 신비주의 덕택에 업무시간이고 쉬는시간이고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드니까. 모든 문서 교환은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지고, 사원간에 직접적으로 회의조차 하지 않는다.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선 같은 회사의 동료는 물론 상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됐다. 뭐,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접수해 위에서 내려온 매뉴얼대로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떄문에 다른 사람과의 토의가 전혀 필요없다는 점이 이 관행을 존속할 수 있게 만드는 거겠지만. 여하튼 이 부서에서 4년을 지내고도 안면을 트고 지낸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는건 이 곳에서는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오늘도 언제나와 똑같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과였습니다. 언제나처럼 치즈 오므라이스인가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울리케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별거 아닌 사소한 사건으로 점심시간에 안면을 트게 됐고, 그 인연이 계속 반복되는 일상을 살만하게 만들어주는 활력소로 자리잡은 것이다. 앞서말한 신비주의 덕에, 나는 그녀를 만난지 2년이 넘은 지금조차도 그녀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녀와 함께 있을때야말로 하루 중 그 어느때보다 시간이 빨리가니까.

"네. 오늘은 콜비 잭 치즈를 넣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요리라 냉큼 집어왔죠."

"치즈 오므라이스라면 무슨 치즈든 사족을 못쓰시면서…"

"헤헤. 들켰나요?"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 그렇기에 안전한 대화를 두서없이 나누며 언제나와 같은 점심을 집어들었다. 식당은 언제나처럼 한가해보였다. 듣기로는 이 부서의 인원이 상당하다던데, 사내 식당은 열댓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테이블을 잡고 앉아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일이라고는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버린 버거 말고는 찾아볼수 없는 평화로운 적막이었다. 

"그래서, 오늘 출근할 떄의 일인데요.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소동? 나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출입구를 이용해 출근하는지조차 이 회사에선 언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요상하게 이런 해프닝의 경우는 예외인듯 하다만…

"소동요? 이 회사치곤 특이한 일이네요."

"아마 윗선에 불만을 가진 고객들이 몰려와 시비를 건 모양이던데, 제가 출근할 땐 이미 전부 정리되어 있더라구요."

"무슨 일인지 알게 됐더라도 '기밀'이 되어버렸겠지만요."

"하하. 이 회사의 관행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겠죠."

그렇게 말하는 울리케의 치즈 오므라이스는 이제 거의 비워져 한 숟가락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숟가락으로 접시 위를 긁으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녀도 나 못지 않게 이런 대화에 목마른 거겠지. 나는 이미 점심을 모두 먹었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 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대 대체 누구에게 따지기 위해서 찾아온 거였을까요?"

울리케가 물었다.

"저희 구획은 통째로 모든 인사계통이 기밀로 취급되서 외부인이 이 안의 누군가를 찾아오는 건 불가능할텐데 말예요."

"그러게요. 저희 회사는 책임자를 명확히 이야기하지 못하면 컴플레인을 접수조차 할 수 없는 회사니…"

"그런 면에선 저희 부서가 편하긴 해요. 기밀 투성이의 관행 덕분에 불만을 가진 고객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불편한 부분도 너무 많은걸요! 윗선에 뭔가를 건의해도 '지금까지의 관행이니 우리선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네'라고 하질 않나. 제가 매일 무슨일을 하는지 알게 되신다면, 제가 얼마 절박한지 알게 되실텐데. 후. 빨리 다른 부서로 가고 싶어요."

"뭐 관행이란게 그렇죠. 아, 인사쪽에 자리가 났다고 하던데요?"

"그쪽으로 한번 넣어봐야 되나…"

"후후, 그렇게 되면 꼭 붙길 빌게요. 이 연옥을 탈출하라구요."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당신에게 꼭 데이트 신청을 할게요, 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빈 접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때, 문 밖에서 우당탕하고 무언가가 넘어지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도, 그리고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닌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누군가가 난동을 피우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대체 누가? 뭘 위해? 그 소음은 점점더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까워져왔고, 이내 벌컥하고 한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바톨로뮤 헤이스팅스!"

내 이름.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한 사람의 얼굴은 만난적도, 본적도 없는 여성이었다. 독특한 억양의 목소리도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울리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불쌍하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지금 이 상황 뿐만 아니라, 앞으로 겪게될 수많은 불편한 일들을 가엽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제 옆에 있으면 똑같이 곤란해 질텐데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받아쳤다. 말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싱긋 웃더니만, 그제서야 내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심상치 않은 발소리에 위기감을 느껴, 문 밖으로 떠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몹시도 뒤늦은 반응이었다. 이미 식당 안에는, 울리케와 나, 그리고 처음 보는 여성밖에 없었다.

"네가 바톨로뮤지?"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찾아오신 발걸음을 헛되이하게 만드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저희 회사의 사원은 고객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 것이 회사의 관행입니다. 1층의 카운터로 내려서가서서 정식 절차를 밟으신뒤…"

"정식 절차? 그 잘난 '정식 절차'를 신청하고 1년여를 기다렸어! 그랬더니 별 시덥잖은 이유를 대고서 내 접수를 취하해버리더군! 그게 말이 돼?"

"하지만 그게 절차입니다. 그 절차를 따르지 않고서는, 저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닥쳐! 닥치라고! 그딴 헛소리를 반복해서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게 아냐!"

그 여성은 울부짖었다. 글로 표현한다면, 절규라는 단어가 알맞는 모습이겠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한체, 두다리로 서서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이 아닌 몸짓에서, 기세에서 그녀는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침묵했다. 그게 내 일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고, 괴로운 일이지만, 내 일은 일이었다. 그것도 4년동안 잘 해오던 일.

"일단 진정하세요. 이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내 이름? 내 이름이 궁금해, 바톨로뮤 헤이스팅스?"

그녀는 웃었다. 허탈한 듯, 짧게 내뱉듯이. 이런 태도를 세간에선 어이가 없다고 이야기했었나.

"…데이비드. 데이비드 시나트라. 기억해?"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아닌 것 같군요."

"그래. 내 이름이 아냐. 내 아들의 이름이지. 지금 중요한건 그것 뿐이고. 데이비드 시나트라, 기억하냐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미세스 시나트라."

"기억해?"

기억할리가 없었다. 그게 대체 누군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발, 자리를 옮겼으면 좋겠네요. 적어도 이 아가씨는 내보내고 이야기합시다."

그제서야 울리케가 내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듯, 시나트라는 울리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저는 부외자일 뿐이에요. 자리를 비켜드릴테니 두분이서 이야기 천천히 나누세요."

"맞는 말입니다. 이 직원은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라요. 일단 이 직원을 내보내고, 저희도 다른 곳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우리를 노려보던 시나트라는, 자신의 옆을 슬금슬금 지나가는 울리케를 잠시 지켜보았다. 정말로 잠시동안만. 그리고는 울리케의 팔뚝을 부여잡고 감싸안은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져다댔다. 권총이었다.

"잠…잠깐만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부외자에게 무슨 짓입니까!"

"네 눈빛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질 않거든. 그녀를 좋아하지, 안그럐?"

뭐라 말하려, 부정하려 했지만, 무언가가 내 말을 막았다. 당황하고, 공포에 빠진, 울리케의 눈동자가 내 말을 막았다. 

"그 눈빛을 전에 본 적 있어.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눈빛. 내 남편이 그 눈빛을 했었지. …내 데이비드도 그 눈빛을 했었고. "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우수에 잠긴 눈동자로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그 데이비드를 네가 죽였어."

이런, 말해버렸다.

"미세스 시나트라, 자제분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시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저와 단 둘이…"

"왜? 내 아들이 뭘 잘못했길래? 대답해. 난 그게 알고싶어. 대답하라고, 바톨로뮤!"

침을 삼켰다. 더이상 말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엇다. 문제는, 울리케가 시나트라의 말을 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시나트라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여부를 알려줄 수 있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회사의 관행을 거스르게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침을 삼켰다. 나는 이 직업을 잃고 싶지 않았다. 또한 더더욱, 울리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미세스 시나트라? 그만하세요. 전 바톨로뮤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부서에 일하는 사람들중 다른 누군가를 살해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는 직책은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산더미같은 서류를 맞대고 씨름하는 서류쟁이들 뿐이에요. 당신의 아들이 어떤 일을 겪었든, 저희에게 책임은 없다구요."

울리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그녀는 용감했다. 나보다도 더. 그녀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서, 자신에게 닥친 위기에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기만으로는 시나트라를 누그러트릴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울리케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차가워졌다. 그녀는 단단해졌다. 그녀는 더이상 슬픔에 잠긴, 절규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검이었다. 방패였다. 분노로 벼려진, 모든 것을 산산히 부술 망치였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책임은 있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권총의 해머를 당겼다. 메마른 금속의 소리가, 수많은 부품과 매끄럽게 마찰하며 나는 그 소리가 조용히, 식당 그 무엇보다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수많은 글, 그림, 영화에서, 그것은 경고의 의미를 지닌 소리다. 곧 풍길, 매케한 화약 냄새를, 적막을 찢는 소음을, 바닥에 쏟아진 흥건한 피를 예고하는 소리다. 이를 막아서라는, 마지막 기회를 의미하는 소리다. 내 근육은 긴장했다. 그 소리에 뒤따르는 기계적 결과에 의한 비극을 예상해서가 아니었다. 울리케가 보여주었던, 그 일말의 용기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진 것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몸을 날릴 수는 있었다. 내 몸을 던져, 이 상황을 변화시킬 변수가 될 수는 있었다. 이 미묘한 대치상황을, 불운하게 맞이한 살얼음판을 깨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소리는 기회를 암시하는 복선을 의미하지 않았다. 시나트라는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철퍼덕. 차디찬 식당의 바닥에 울리케의 몸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는, 포대 자루를 바닥에 내팽개쳤을때와 비슷한 것이었다. 울리케의 시체에서 나온 피가 그녀가 누워있던 바닥과 그녀의 옷깃을 적시며 천천히 고여가기 시작하고서야, 나는 내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은 있어. 바톨로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시나트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건조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책임이 있다니! 네 아들은 그 자신이 동의한 서류의 약관에 따라, 그가 희망한 대로 죽음을 맞이했어! 똑같은 서류에 서명해 매일같이 똑같은 죽음을 맞는 수천명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그 계약서를 결제했을 뿐이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일은 내가 부임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내가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일이라고! 제기랄, 나는 그저 관행에 따라 기계처럼 사인을 해 그 서류를 위로 올려보낼 뿐이야! 책임이 있다면, 바로 그가 한 사인에, 잉크에, 펜에 있겠지,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거칠게 말을 내뱉고나서야, 그것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거칠게 튀어나온 문장은 내가 이야기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언제나 심사숙고하며,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진 말을 하는데에 익숙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놀랄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울리케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졌던 용기를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관행따위 신경쓰지 않겠다. 뺨위에 흐르는 이질감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나에게 책임을 묻겠다면, 대체 누구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생각이지? 명목상의 작업을 반복하던 나? 그런 관행을 만든 회사? 이제는 이 회사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 누구보다 이 회사를 요구하고 있는, 바로 이 거지같은 이 세상? 아니면, 그 세상이 당신 아들을 집어삼킬때까지 좌시하고 살아있던 당신?"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내달렸다. 온 몸이 그 주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근육을 이루는 가느다란 섬유 한줄기 한줄기가 내 용기와 분노, 적의를 양분삼아 한평생 처음으로 그 어느때보다 맹렬하고 폭력적으로 제 할일을 다했다. 허리를 비틀어, 머리 뒷쪽으로 한없이 끌어당긴 오른 주먹은, 용수철처럼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 주먹은, 나는, 울리케를 죽인 시나트라로부터, 그 망치와도 같은 여자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망치는 권총을 들어 차분하게 나를 쏘았다. 앞을 내딛어야할, 그녀를 향한 마지막 한걸음을 받쳐야할 오른 무릎을 쏘았다.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3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정확하게 쏘아진 납탄은 가공할 속도를 가지고서 내 무릎과 맞부딪쳤다. 얇은 옷을 뚫고 지나가 무릎뼈와 정강뼈 윗부분을 수백조각으로 산산히 쪼개고 부수어버렸다. 그 위에 붙어있던 살점은, 조그만 납덩이가 가지고 있던 상상 이상의 에너지를 고스란이 전달받아, 유지할수 있는 형상 이상으로 순간적으로 늘어났다, 원상대로 유지되려는 물질의 성질에 의해 수축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근육다발은 엉망으로 찢어졌다. 고통이 나를 끝내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나는 그 다리를 이용해 땅을 딛고 서있을수 없었다. 내 오른 다리는 더이상 다리로써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른발을 딛고 시나트라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나의 계획은, 힘없이 바닥에 넘어짐과 동시에 실패했다. 그리고, 고통이 찾아왔다.

비명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그 비명은, 단순한 고통뿐만 아니라, 한순간 일어난 이 비극과, 무고하게 흐른 울리케의 피, 그리고 다하지 못한 복수에 대한 원통함이 담긴 비명이었다. 하지만 시나트라는 그 비명이 귀에 익숙한 소음인 것 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한겨울의 쇳덩이같은 그 표정을 하고서.

"난 책임을 묻기 위해 온게 아니야."

그리고 시나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다만 난 알고 싶었을 뿐이야.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서류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그 사람의 얼굴을. 그런 일을 하면서, 멀쩡하게, 행복하게,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나처럼. 데이비드처럼."

내 눈을 꿰뚫어 그 안의 무언가를 들여다보듯,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헉…허억알고싶은 것을…알아냈나…? 무고한 사람의…피를…흘리면서만족…했나? "

숨을 몰아쉬며 나는 말했다. 격통으로부터 비롯된 신음 소리와 그 격통을 참기 위한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나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문장이었건만, 시나트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해. 지금 네가 하고있는 얼굴을 하길, 얼마나 바랬는지 몰라."

그리고 총소리가, 이 식당에서 세번째로 울려퍼졌다. 첫번째와 다름없는, 시끄러운 소음과 매케한 화약내음을 동반한체.


"늦어서 미안하네. 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내가 노력했어야 하는건데. 윗선도 자네가 겪은 일에 대해서 무척 충격을 받았고, 이 일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하고 있다네. 이 사고에 뒤따른 모든 불상사에 있어서 회사가 책임지기로 한건 물론일세. 자네와 같은 인재가 이런 일을 겪게되어 회사로써도, 개인적으로써도 무척 유감이라네. 빨리 회복해 건강한 모습을 회사에서 볼수 있다면 좋겠네."

보안 책임자라는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있는, 푸근한 인상의 앤드류 가르시아가 내 곁에서 그렇게 말했다. 벌써 며칠째 그는 내 병실로 찾아와 따뜻하게 말을 건내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 식당에서 그가 시나트라의 뒤통수를 쏘기 전에 그를 봤었던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래서인지 이 일에 있어서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뭐 도울건 없나?"

"…괜찮습니다."

머릿속에 '울리케'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갔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 음."

멋쩍은 정적이 흘렀다. 그는 나보다 더 멋쩍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어 그 정적을 깨었다.

"위에서 말야, 제안을 하더군."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가방 안에서 얇은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그 안에서 꺼내든 전자종이로, 그는 영상을 재생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그 영상은 그날의 식당을 담고 있었다.

"CCTV를 분석했다네. 솔직히 말하지. 이걸 보고 많은 윗분들이 놀랐어. 자네가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고서도 울리케에게 진실을 알려주게 되는 불상사를, 다시말해 관행을 어기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자네의 모습을 보고 말야. 그토록 회사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보기 드물거든."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울리케를 위해서였지만.

"그래서말야, 자네의 현 위치를 재고하는데에 많은 윗분들이 동의했다네. 물론 자네가 완치된 이후의 이야기지만… 자네의 희망을 우선시하여, 원래 자네가 있어야 할 가치가 있는 위치로 옮겨주겠네."

그 말을 하고서, 앤드류는 '하지만'이라는 의미를 지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려면, 안타깝지만 자네의 기억에 손을 대야하네. 정확하게 말하면 지난 4년간의 기억을. 자네도 어렴풋이 눈치챘겠지만, 비밀에 집착하는 자네 부서의 관행은 자네의 직책 하나를 감추기 위한 연막이라네. 오늘과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네만… 여하튼, 만약 자네가 이 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를 희망하게 된다면, 그 기억을 지우거나, 적어도 조작해야 하겠지. 다른 부서에는 이런 관행이 없으니 말야."

앤드류는 나를 바라보았다. 몇초가 지나고서야 그 시선이 내 대답을 요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대답했다.

"다만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제가 하던 일. 그건 굳이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한개 구획을 대상으로 비효율적인 관행을 시행시켜서까지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구요. 그럼에도, 회사는 그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죠. 어째서인거죠?"

"그 질문은 내가 대답을 할 위치가 아닌…"

"그만해요, 앤드류. 어짜피 제 기억은 지워질겁니다. 말해줘도 상관 없잖아요. 위에서도 신경쓰지 않을거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면서."

가르시아는 내 말을 듣고 눈을 감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때마다, 통통한 그의 턱 위에 수북히 자라난 수염이 춤을 췄다.

"…그래. 맞는 말이야. 그렇게 대단한 답은 아니지만 말일세. 이것도 다 법 때문이야.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일인데, 그걸 인공지능이 처리해서는 안되는 일이니 말일세."

"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인공지능보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말이죠."

"불만인가?"

"그건 아닙니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다행일세."

"…그리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했고 말이죠."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나 말고는 아무도 입원하지 않은 4인용 병실의 적막은 그리도 조용했다. 소리가 들렸다. 가르시아의, 멀어지는 발걸음이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는 말했다.

"기억에 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지금은 자네가 완치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일세. 편히 쉬고 있게나. 내일도 오겠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창 밖을 보았다. 그곳에선 봄이 펼쳐지고 있었다. 새싹이 피어나는, 푸르른 봄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에게 그 봄은 찾아오지 않는 듯 했다. 이 시기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거나, 감성적인 기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후회뿐이었다.

그녀를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무료하게 일상을 보냈다면 좋았을 것을. 다른 많은 사람처럼,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하루를 살아갈 것을.

그녀가 죽자, 내 안의 무언가도 죽었다. 

매일을 반복하는 기계같은 삶에서, 유일하게 날 사람으로 만든 내 안의 무언가가, 마음 깊숙한 밑바닥으로 침전하여, 다시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다를게 없었다. 눈에 비치는 광경은, 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치즈 오므라이스가 먹고싶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빨리 내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