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강철의 움막
Nake
2016. 9. 1. 16:45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수 있습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지낼 수 있습니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 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
혀로 비방하러 쏘다니지 않고, 제 친구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제 이웃에게 모욕을 주지 않는 이라네.'
시편 15편 1절~3절
------
「운석이 지면에 내리꽂아 일어낸, 세계를 덮었던 먼지구름이 가져온 겨울이 먼지 제자신과 함께 멎은지도 벌써 수십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 겨울이 남기고 간 추위의 잔재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기에 많은 이들은 더위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적도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몸으로 깨닫게 되곤 한다. 옛 이스탄불에서 북쪽으로 수십킬로미터, 로마 카톨릭 소속의 수도사들이 모여 살아가는, 그리고 내가 지금 향한 수도원은 바로 그런 환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땀에 젖은 이유가 더위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옛 이야기에 흔히들 등장하고는 하는 양봉과 포도주에 절은 수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수사보다 그 수사를 위해 싸운 군인에 가까웠다. 그렇다. '성 베사스와 아가티노의 팰러틴 기사 수도회 소속 21번 수도원'의 수사들은 기사를 꿈꾸는 신도들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팰러틴 기사단'이라 줄여 부르는 이 수도회는 다른 수도회와 달리 준 군사조직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위기 이전, 중세-르네상스 시기에 한때 존재했었던 동명의 팔란티노 기사단과 비슷한 맥락에서 발생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둘 사이의 세월에 많은 것이 변화했기에,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신 더 많았지만. 그 차이점은 단순히 현대적인 군대 편제와 체계뿐만 아니라, 마갑을 두른 군마 대신 거대한 강철 갑옷을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기어즈 유닛(이하 GU), 2.5미터 남짓의 전쟁기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제 드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람의 생사를 쉬이 쥐고 흔들 수 있는 그 갑옷을 입고 남에게 봉사를 다짐하는 단체는 팰러틴 기사단의 수사들을 제하면 보기 힘드리라 단언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수사가 GU를 탄다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허언일테지만 말이다.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반년전, 예루살렘의 성 아가티노 쉘터 구출작전에서 만났던 5번 수도원 소속 수사들이 맞은 비극은 그런 현실적인 곤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1번 수도원의 사정은 다른 수도원과는 매우 달랐다. 그들은-」
"뭘 쓰고 계세요?"
기적적으로 굴러가는 사륜 구동 자동차의 옆좌석에 앉은 청년이 내게 물어왔다. 첫 페이지 위에서 놀리던 펜의 움직임을 멈추고 책을 덮은뒤 그를 바라보았다. 인종을 알아보기 힘든, 터키 지방 특유의 유한 인상을 지닌 청년이었다. 스물즈음 될까.
"보고서. 엄밀히 따지자면 일기에 가깝지만. 별로 재미있는 글은 아냐."
"보고서요? 아저씨도 용병쪽 사람인가요?"
"SMA? 아냐. 난 바드라고."
옷깃의 새모양 핀을 손으로 집어 보여주었다.
"우와아. 바드라구요? 와하하, 진짜 바드는 처음봐요!"
"이스탄불엔 바드가 많이 다니지 않나?"
"아, 이스탄불 출신이 아니라서요. 전 남동쪽 한적한 시골의 카톨릭 쉘터 출신입니다. 오마르 요한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길버트 슈나이더라고 한다네."
손을 잡았다. 굳게 잡은 오른손의 악력과 굳은살에서, 미묘한 친숙함을 느꼈다.
"자네도 글을 쓰나보군?"
오마르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풀었다.
"손의 굳은살 때문에 알아챘다네. 중지와 엄지 바깥쪽에 있는 굳은살이 다른쪽보다 두껍더군. 뭐 그에 못지않게 험한 일도 많이 한 모양이네만."
"우와! 대단하네요! 바드는 다 그런가요?"
"아냐. 내가 특별한거지."
그리고 대화가 멎었다. 조용해진건 아니었다. 청년은 끊임없이 말했기 때문이다. 말이 많은 소년이었다. 엄청난 모험을 혼자서만 이루고는 그 무용담을 처음으로 전하게 된 사람처럼 그는 쉬지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이야기했다. 자신의 고향, 친구들, 불운과 행운이 뒤섞인 소소한 사건들까지. 덕분에 21번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말라버린 흑해 평원의 가장자리가 시야 끝에 일렁일때, 원래 독실한 크리스천조차 아니었던 오마르가 팰러틴 수도원의 수사로 자원하게 된 시시콜콜한 사연까지 알게 되었을 정도였으니까.
싫어하진 않았다. 사실, 내 일이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는게 다였으니 말이다. 기억하고 또 기록한다. 사라져 가는 이 세상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들어라. 이야기를 기억하라. 이야기를 전파하라. 바드의 삼계명.
웃고 노래하던 옛 바드들이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가 중요하랴.
오래되고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뭘 하러 오신건가요?"
오마르가 물어왔다.
"기록. 내가 본 수도원과 수도사의 모습을 이 책에 기록하는거지. 혹여나 미래의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일을 잊어서는 안되잖나."
책을 보여주었다. 이번 일을 위해 새로 꺼내온 책이었기에, 집에 꽂혀있는 다른 수많은 양장본과는 다르게 책 끝의 마감이 벗겨지지도, 종이가 닳지도 않아 깔끔해 보였다.
"하지만 수도원이잖아요? 거기에 무슨 기록할만한 일이 있겠어요?"
"사람들이 만나고 이야기하며 이뤄나가는 조그맣고 평범한 일상엔 귀중한 가치가 있다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일들은 그러한 일상에서 일어난 우연에서 비롯되곤 하니까. 사건과 사건으로만 기억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상을 기록하는거야."
"음."
오마르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처음 보는 보습이로군.
"이해하기 힘들면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네. 기록은 내가 하는거니까."
"아뇨. 이해 못할만한 것도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저도 글을 쓴다구요."
"아. 잊고 있었군."
자신이 추리해놓고도 잊어버렸다니. 한심하구만. 속으로 작게 자조했다.
"무슨 글을 쓰나?"
"저요?"
오마르는 무언가를 감추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서 언뜻 소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뭐 이것 저것요. 일기라던가, 소설이라던가."
"오."
거기다 소설가라니. 놀랄만한 순수함이었다. 이 세상에서 순수한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죽었다고 전해진 희망과 꿈도 무덤에 묻히지 않은체 아직 살아 숨쉴지도 몰랐다. 한번 멸망에 가까워졌었던 이 세계에 두번째 기회가 생기는 걸지도 몰랐다.
"다 와갑니다."
그럴만한 이유는 없었는데도 운전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마르와는 달리 세상의 음울함을 잔뜩 들이켜서일까? 아니면 순수함에 진절머리나서일까?
"이 판자촌만 넘으면 수도원입니다. 넘을수 있다면 말이죠."
'있다면'?
"넘지 못할 수도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창 밖을 보았다. 저물어가는 태양덕에 붉게 물든 시야에 비치는거라곤, 예전에 존재했던 작은 마을의 잔해 위에 허름하게 지어진 작은 슬럼가 뿐이었다. 무섭긴 했지만, 위험해보이진 않았다.
"알고 온거 아니었소?"
대꾸하는 운전사의 목소리엔 그런것도 몰랐냐는 의외의 놀라움과 이에대한 실소가 담겨있었다.
"뭘 말입니까?"
"분명히 안전한 곳이라고 이야기하셨지 않습니까!"
[저번보단 안전하다는 말이었지. 적어도 수백명의 현지인이 총과 GU를 타고 포위하고 있진 않잖아?]
"하지만 간헐적으로 수도원, 그것도 중무장한 팰러틴 수도원을 습격하고 있는 상황이죠. 정상은 분명 아닌데요."
[하딘의 아웃사이더 놈들이 예루살렘을 쑥대밭으로 만든지 일년도 안지났는데 안전할거라고 믿는게 이상한거 아닌가? 게다가 군부대 습격이야 약탈자놈들이 언제 어디서나 으레 하는 일인데 뭘 그렇게 놀라고 있어? 무서운거야? 자네답지 않구만.]
"무서워서 제가 전화했겠습니까? 왜 언제나 그런 사실을 감추고 절 파견보내는건데요? 다른 바드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자네가 우리의, 그 뭐냐, 종군 바드? 비슷한거니까 그런거지. 언제나 잘 버텼잖나?]
"잘 버틴다구요? 자고 일어나면 몇년전에 총에 맞았던 팔뚝이 아직도 쑤신다구요!"
[여튼 이틀을 기다려서 걸게된 위성전화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가? 다음 전화는, 그래, 한달 뒤에나 할 수 있을텐데.]
"빌어먹을 위성전화는 왜 그렇게 기다려야 되는겁니까?"
[세상에 위성이 세대밖에 없으니까 다들 번호표 뽑아서 기다리고 있지. 그걸 배운사람들은 문명이라고 부른다네.]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문명이라는 거, 수십년도 전에 멸망했다던데요?"
[자네도 소식이 느리군. 그걸 재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니까. 그래서. 정말로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한건가?]
"아뇨. 젠장. …언제까지 있으면 됩니까?"
[뭐야. 벌써 가고싶은거야? 정말 자네답질 않군. 맡은 일은 확실히 끝내는게 자네 아니었나?]
"시한도 안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여기 데려다준 운전사도 북쪽으로 피난가니 다신 안온다고 했단 말입니다.'
[가고싶으면 바로 돌아가도 돼. 다행히 베니스하고 그렇게 떨어지진 않았구만. 2000킬로미터 남짓만 걸어가면 돼.]
"재미 없습니다."
[뭐. 다행히 다음 전화를 수도원에서 하게되진 않아. 그쪽도 지금 철수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쪽에서 철수할때 같이 타고 돌아오면 돼.]
"마지막차 말입니까."
[그래. 에디른에 있는 SMA-카톨릭 합동 방어 본부에 우리쪽 연락책이 있으니까 그 쪽 이용해서 베니스로 복귀하면 되네. 뭐 자네야 익숙하겠지만.]
"..."
[왜, 또,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또?]
"아시잖습니까."
[뭘?]
"...지쳤다구요."
[...음.]
"..."
[이봐, 슈나이더. 솔직히 나도 자네를 보내고 싶진 않았어. 많이 힘들겠지. 가뜩이나 예루살렘 일도 있었고. 하지만 자네도 나도 잘 알잖나. 자네는 집에 틀어박힌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타입이 아냐. 전혀 아니라고. 맡은 일에 집중하면서야 비로소 제대로 안식을 찾는 사내지. 거기 상황이 그리 악화될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베니스에 틀어박혀 있는것보단 백배 낫다고 생각해서 보낸거야.]
"..."
[영 부담스러우면, 쉰다는 느낌으로 갔다 오라고.]
"..."
[슈나이더? 거기 있는거 맞지?]
"...네. 후우. 보고서는 복귀후 2개월 뒤까지 드리면 됩니까?"
[언제든지. 자네 편한대로 보내주게.]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보게. 아, 슈나이더?]
"예?"
[자네만 믿고 있겠다네.]
그리고 길고 높은 전자음이 위성전화가 끊어졌음을 알려왔다. 그 직후, 긴 한숨이 임시 칸막이에 울려퍼졌다.
"쉬라는 사람이 부담도 주고 가는군."
그렇게 내가 머리를 싸매고 있을때 누군가 문을 작게 두드렸다.
"통화 끝나셨습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어 대답했다. 짜증을 날려버린양 가슴에 묻고, 최대한 쾌활한 목소리로.
"예. 끝났습니다. 곧 나가도록 하죠."
조잡하게 만들어진 나무 문은 끼익하는 소음을 내면서도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경첩이 어설프게 만들어져셔였는지, 습기를 먹은 나무가 커지고 뒤틀려 구멍에 들어맞지 않게 되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문은 문 앞에서 서있던 나자리오 수사와 서로 힘을 합하고서야 겨우 열렸다.
"...들으셨습니까?"
나는 겨우 문 밖으로 빠져나와, 아무일 없었다는 것처럼 능글맞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듣기야 했습니다만."
놀랍게도 나자리오 수사는 나보다도 더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자리오 수사는 방긋 웃고 있었다.
"걱정 마시죠. 수도사들의 입이 무거운건 옛날부터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나와 당신만의 비밀. 뭐, 크게 문제될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가십거리가 될만한 내용도 아니었거니와, 좁고 어두운 방에서의 발언을 묻어두는건 카톨릭에서 드문 일도 아니었을테니까.
"그렇긴 하죠. 다른 수사분들은 어디 계시죠?"
"통화하시는 사이에 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의외의 초대였다.
"저는 외부인입니다만?"
"지금부터 철수할때까지는 외부인이 아니시니까요. 저희와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해주실테니 최소한 저희가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도 알아주셔야한다고, 도미니코 수도사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도사제님이 돌아오셨습니까?"
"예. 30분쯤 전에 에디른에서 돌아오신 뒤에 바로 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따라오시죠."
그렇게 말하는 수사의 뒤를 따라 나는 수도원의 복도를 걸었다. 미관이나 경건함보다는 견고한 요새에 가까워보이는 진회색의 콘크리트와 그 위를 겨우 덮고 있는 갈라진 사막색 페인트는 옛 군 기지들이 지닌 그것과 동일해 보였다.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옛 군기지를 수도원으로 삼았다고 기존의 건축 양식을 바로 바꿀수는 없었을테니까.
"이쪽입니다."
복도의 정중앙, 아무런 푯말도 달려있지 않은 철문의 문고리를 당기며 나자리오 수사가 말했다. 녹슨 문간이 소음을 냈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문을 조심스럽지만 크게 열어 발을 내딛었다. 환한 조명이 비추는 원탁이 놓인 그 방의 풍경은 자주 보아오던 종류의 것이었다. 높은 장교와 부사관이 모여 머리를 싸매는 작전 통제실 비스무리한 것은 군조직 비스무리한 조직엔 어디에나 있었으니까. 이따금 아웃사이더도 하나쯤 가지고 있을거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그런 원탁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사내들의 모습 또한 그런 기억의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그들이 옛 군부대가 흔히 채용했던 MARPAT 무늬의 군복을 하나같이 입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몇 안되는 사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친 인상과 검게 탄 피부조차 수도원의 수도사보다 전장의 군인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길버트 슈나이더씨? 반갑습니다. 직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에디른에 갔었던지라 스케쥴이 맞지 않았습니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원탁의 정중앙, 지도가 그려진 칠판을 등지고 앉아있던 사내가 나를 바라보며 일어나며 말했다.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주름은 연륜 때문일까,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일까 잠시 생각해보다 그 답이 전자일 것이라 조용히 결론내렸다. 목가에 착용한 새하얀 로만칼라를 통해 그가 오랜 세월을 성직에 몸담아왔다 알려진 도미니코 수도사제라는 것을 알아챘기 떄문이다. 그 점을 몰랐다 할지라도,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지목할수도 없었다. 주름과 희끗희끗 물들어가는 그의 짧은 머리칼조차 그의 다부진 몸과 강하고 확고한 인상을 압도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힘겨운 고난이든, 의연한 그의 앞에선 어린애의 투정과 다르지 않으리라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빈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연륜깊은 산뜻한 목소리로 도미니코 수도사제가 말했다. 듣기만 해도 믿음직스러워지는 목소리였다.
"같이 온 1분대장 나자리오 수사와 2분대장 테오팔로 수사, 그리고 기술반장인 바사 수녀는 이미 만난걸로 압니다."
자리에 앉자, 도미니코가 옆에 앉은 이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도착한 뒤 바로 마주쳐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던 이들이기에 별다른 설명 없이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여 안부를 물었다.
"제 오른쪽은 3분대장인 오스왈드 수사고, 그 옆에 있는건 4분대장인 몬타노 수사입니다."
"반갑습니다."
몬타노라 불린 수도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천진난만한 분위기는 오마르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다만 그 기저에 깔린 진지함이, 그와는 전혀 다른 사내임을 나직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와 달리 오스왈드 수사는 다른 수사들처럼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딱히 적대적이지도, 하지만 긍정적이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만 슈나이더씨는 우리가 후퇴를 마칠 3주동안 1분대와 함께 생활하며 바드로써 우리들의 일상을 기록하게 될거다. 너희들이 친절하게 대할수록 기록에 좋게 남게 되리라는거 기억하라고."
"그런건 슈나이더씨에게 비밀로 해야되는거 아닙니까?"
웃음을 머금고 몬타노 수사가 말했다. 무례하다고 느껴질수 있을 유쾌함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방 안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런 곳인건지, 아니면 몬타노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든 분위기를 전부 좋아하는 것 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너만 똑바로 하면 된단 말이야, 몬타노 수사. 작전 관련해서 기밀사항은 없으니까 슈나이더씨가 질문하면 왠만하면 대답해드리고. 자. 그럼 하던 이야기로 넘어가자고. 오스왈드 수사, 우리의 철수작전에 대해 설명하게."
오스왈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칠판으로 다가갔다.
「'비 쉘터인의 억압 해소와 자유, 그리고 평등'을 외치는 조직, 아웃사이더가 수도원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운전사에게 들었을땐 그 이유를 유추하기 힘들었다. 물론, 반년전 예루살렘의 카톨릭 쉘터를 둘러싼 분쟁 당시에 로마 카톨릭과 아웃사이더는 분명 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위기를 쉘터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넘긴 쉘터 주민들과, 거친 폐허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른바 '외부인'간의 갈등이라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었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21번 수도원은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팰러틴 21번 수도원의 존재 의의를 알게 되었을떄, 나는 하딘이 어째서 이 곳을 노리는가에 대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본디 대위기 전 NATO군의 군사기지였던 21번 수도원에는 NATO의 제식 GU였던 M42 레버넌트의 생산시설과 이에 이용할 상당량의 자원이 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 21번 수도원의 수도사제로 부임하고 있는 도미니코 사제가 이끌었던 도미노 분견대가 연락이 두절된 쉘터들을 수색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군 기지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야만인과 크게 다를것 없었던 팰러틴 기사단의 무장수준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10년간 팰러틴 기사단은 21번 수도원에서 생산되는 레버넌트를 이용해 그 영향력을 대폭 확장시켰고,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다른 GU 생산 시설들도 몇 확보하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21번 수도원만큼의 고속-고정밀 작업을 견뎌낼만한 3D 프린터와 시설을 보유한 곳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팰러틴 기사단은 지금까지도 21번 수도원에 의존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오랜 기간 안전지대로 분류되었던 이스탄불 인근 지역이 예루살렘 분쟁 이후 북진하는 아웃사이더 세력에게 점거 당한 뒤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21번 수도원의 역할을 알게된 아웃사이더는 곧 수도원을 점거하기 위해 공격하기 시작했고, 팰러틴 기사단은 21번 수도원에서 최대한 많은 레버넌트를 생산한 뒤 에디른으로 후퇴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혼돈의 끝자락에 21번 수도원에 도착하게 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물론, 이 글은 보고서의 역할을 띄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베니스에 돌아가고 나서 글의 상당수를 쳐내고 고쳐 더 짧고 간결한 글로 퇴고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일어난 사실을 떠오르는대로 적기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럼에도 딱딱하게 뭉친 글은 쓰는 사람에게조차 두통을 유발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머리를 감싸쥐고 문 밖을 나섰다. 드물게도 구름이 개어 찬란한 태양이 햇볕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더웠다.
"덥구만."
그래서 나는 혼잣말을 자연스래 내뱉었다.
"슈나이더씨, 나오셨습니까?"
차량에 짐을 실으며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하던 나자리오 수사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같은 분대원인 카이우스 수사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이런, 제가 뭔가 방해했습니까?"
"아닙니다. 어젯밤엔 잘 쉬셨습니까?"
"네. 모포라도 있는게 어딥니까."
"하하.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짐은 이미 전부 빼버려서 말이죠."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말했듯이, 모포라도 있는게 어딘가. 몇년전엔 폐허의 콘크리트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잤을때와 비교하면 아주 훌륭한 숙박 시설이었다.
"뭘하고 계셨습니까?"
"의료지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저희 수도원은 이 근방 민가를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의료지원을 하고 있었거든요."
"위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남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수도원이 제 편하자고 약자를 무시하면 자신의 가치를 잃는다'고 수도사제님이 강조하셨거든요. 원래는 단계적 철수 작전을 시작했을때 의료 물자도 맨 처음 철수하기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만, 수도사제님의 주장덕분에 이렇게 의료지원만큼은 계속하게 되었죠. 뭐, 그것도 오늘까지입니다만."
"물자를 오늘 빼는겁니까?"
"아뇨."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지원분량으로 남은 의료물자를 전부 쓸 예정이라서요. 같이 가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의사를 표했다. 글을 쓰기 위한답시고 골방에 박혀 부대의 실생활을 보지 않는건 어불성설이었다. 박혀있는다고 해서 더 좋은 글이 나올리도 없었고 말이다.
방 안으로 돌아가 방탄조끼와 책을 들고 나온 사이, 나자리오 수사의 1분대는 나갈 채비를 완전히 마친 모양인지 이미 차 안에 타 시동을 걸고 있었다. 대위기 전에도 사용했을 4륜 구동 차량에 가까이 다가가자, 차량의 엔진이 몇번 거칠게 목을 긁고는 검은 매연을 꽁무니에서 시원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관리를 잘 받은 모양이군요."
문을 열고 차량에 올라타며 말했다. 시트에 베어버린듯한 땀냄새와 뜨거운 열기에 달아오른 곰팡내가 코를 찔렀지만 불평할만한 입장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여러 군인 사이를 전전한 나에겐, 이제와서는 친숙할 정도의 냄새였으니까.
"바사 수녀가 험비를 광적으로 좋아하거든요. 언제는 차량에 너무 몰두하느라 미사에 늦을뻔한 적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자리오 수사가 즐거운 듯 말했다.
"자기 담당도 아니면서 순찰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적도 있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있었던 카이우스 수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누굴 말하는거죠?"
"바사 수녀 말입니다. 뭐 그땐 아웃사이더가 공격하기 전이라 그렇게까지 위험하진 않아서 동행시켰는데, 문제는 어느순간 보니 사라져버렸단 겁니다."
"하, 그땐 진짜 식겁했었지."
옆자리에 앉은 파비오 수사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저도 카이우스 형제와 함께 순찰을 나갔었는데, 둘이 식은 땀을 흘리며 삼십분여를 그렇게 찾았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온데간데 없어서, 차라리 탈영하자는 이야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추억을 회상하며 작게, 하지만 재잘대며 웃었다. 심각했던 과거를, 혹은 그 상황에 처했던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일까.
"그래서, 바사 수녀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다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것 같아 나는 이야기를 궤도에 마저 되돌렸다.
"아, 그게 또 가관이죠. 그래서, 저희 둘은 아랫마을에 사람이 갈만한 거의 모든 곳을 뒤지고 다녔단 말입니다. 단 한군데를 제외하고 말이죠. 대위기 전에 창고로 쓰였던 폐허가 있는데, 지금은 물론 예전에도 상당히 위험했던 장소였습니다. 주민들은 '강철 움막'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당시에도 주위를 주름잡던 약탈자들이 거점으로 삼던 곳이죠."
파비오가 대답했다. 이를 자연스럽게, 카이우스가 받아 이어답했다.
"그래도 별수 없으니, 온갖 준비를 하고서 움막으로 다가갔습니다. 잔뜩 긴장한체 움막에 100미터 가량 다가갔을때, 바사 수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경악이었는지, 비명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급한 마음에 급하게 달려가기 시작했죠. 저희도 악을 지르며 문을 발로 차고 난리를 치면서 들어가긴 했는데, 눈앞에 펼쳐진건 저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관경이었습니다."
"하. 그게. 아하하. 다시 생각해도 웃긴데. 아하하."
"지금 나가는거야?"
쾅. 누군가 뒷문을 두들기고 열어재끼며 말했다. 낮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바사 수녀가 있었다. 아침부터 무언가 정비했는지 검댕이 양껏 묻은 얼굴과 작업복에서 진한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뭐야. 못볼걸 본 사람들처럼."
"아, 아냐."
바사의 질문에 멋쩍은 웃음을 거두며 파비오가 말꼬리를 흐렸다. 대신, 나자리오 수사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얘들이 너랑 같이 순찰 나갔을때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아, 움막인가 하는 곳에 갔었을때?"
"파비오 말로는 너 혼자 사라진거라던데."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
바사 수녀가 이빨을 드러내며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변명이었지만, 저 정도로 당당하면 꼭 그렇게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분명히 잠시 렌치를 찾아보러 간다고 이야기했었다고."
"잠깐만요. 결국 그 일이 렌치 때문에 벌어진 거였습니까?"
의외의 사실에, 나는 대화를 끊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렌치라니?
"뭐 그렇게 됬죠. 다치지도 않았으니 별 문제없지 않았습니까?"
"바사 수녀. 자기 위치를 자각해줬으면 좋겠어. 우리 수도원에서 너만큼 3D 프린터를 잘 다루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야."
"예, 예. 나자리오 너 꼭 도미니코 신부님처럼 말하는건 알지?"
"그래? 정말 다행인데. 도미니코 수도사제님처럼 되고싶은게 내 목표라서 말야."
"참나, 나가서 차 부수지나 말고. 완벽하게 정비해놨으니까."
"나가서 주민들 진찰하는건데 뭘 부순다고."
그 말이 우스운듯 가볍게 웃으며, 바사 수녀는 자신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처음 만날때도 그랬지만 상당히 호쾌한 인물인 듯 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언제 출발하죠?"
내가 물었다. 순간 나자리오 수사가 벙찐 얼굴을 하더니, 손목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요한 수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굴은 익히셨죠? 오실때 같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오마르를 말하는 겁니까?"
"예."
그렇게 말하며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시뮬레이터 훈련을 받아서 천천히 나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사실 오지 않아도 되는데, 1분대로써의 첫 임무를 함께하고 싶다더군요."
"흠."
"아마 곧 나오겠- 저기 오는군요."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막사쪽에서 누군가가 바사 수녀를 지나쳐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오마르였다.
"헉- 헉-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복도를 돌아다니며 그가 군복을 입은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투박한 개인 군장을 착용한 모습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마치 그래야만 하는것처럼 당연하게 어울린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닙니다, 요한 수사. 슈나이더씨는 아시겠죠? 오늘부터 저희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3일만이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지만, 나 이상으로 이 곳이 낯선 것인지, 요한은 허둥지둥 안을 들여다보더니 겨우 손을 뻗어 악수를 받았다.
"아, 네. 잘- 잘 지냈습니다."
"준비 됬으면 앞자리에 앉으라고."
나자리오 수사였다. 어딘가, 목소리에서 퉁명스러운 느낌이 들었기에 그의 얼굴을 보았으나 딱히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있진 않았다. 다만 그 분위기만큼은 조금 이질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 이야기하기 전까진 침묵하는게 예의인 것이다. 게다가 무엇때문인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신병 괴롭히기, 뭐 그런 종류의 것일테지. 인간이 모인 사회적 공동체에서 언제나 목격할 수 있는 신인에 대한 경계같은 것 말이다. 신앙이 기저에 깔렸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을 이기기는 힘든 것이리라.
"자. 브리핑을 시작하지. 뭐 크게 다를건 없어. 언제나처럼 회관에 가서 사람들을 진료하는게 주 목적이야. 진형은 선두에 우리가, SMA 소속 의료팀을 2분대와의 사이에 두고 A 루트를 타고 빠르게 돌파한다. 이후 테오팔로의 2분대는 의료팀을 직접적으로 경호하고, 우리는 회관 주위를 경계한다. 파비오와 카이우스는 항상 갔던 포인트에 자리잡고, 나는 슈나이더씨와 함께 입구에서 들어오는 인물을 검문한다. 요한 수사는 차량 경계를 맡아주세요. 예정 복귀시간은 1600이지만, 의료팀의 의견에 따라 늦어질수도 있어. 복귀할땐 B 루트를 이용한다. 여기까지, 궁금한 사항 있나?"
"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흠칫,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입을 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는 듯 날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고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듯 싶어, 빠르게 궁금한 점을 꺼내 물었다.
"의료팀이 있습니까?"
"예. 2분대와 함께 생활중인데, 마주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답하는 나자리오의 목소리엔 의아함마저 담겨있었다.
"네. 뭐 어젯밤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마주칠 기회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팀'이나 되는 인원을 보지 못한건 의외라서 말이죠. 어제 작전회의때 의료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구요."
"뭐 작전회의야 기본방침이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거니 말이죠. 슈나이더씨가 특수 케이스죠. 어째서 수도사제님이 슈나이더씨에게 의료팀을 소개하지 않았는지는 저도 의아하긴 합니다만, 뭐 어짜피 오늘 진료가 끝나면 그쪽 인원은 바로 철수할 예정이니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죠."
"흠."
"뭐, 별로 중요한 이유는 없을겁니다. 뭐 그런걸 감추겠습니까. SMA가 바티칸을 돕는게 이상한건 아니죠. 오히려 그 용병들이 돕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보는게 힘들텐데요. 여튼 6개월 정도 함께 있었던 사람들인데 묵묵하지만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 의료지원도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사로써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참여했다고 하구요. 걱정하실건 하나도 없습니다. 뭐, 그거 말고 궁금하신 점 있습니까?"
수사 입에서 나온 문장끝에 달린 사족은, 이 곳에서 무언가를 질문할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끝에 나온 것이었을테다. 그의 생각이 정답임을 나조차 동감하고 있었으니까. 이왕 그렇게 된김에 나는 한가지 궁금증을 마저 꺼내 물었다.
"왜 GU를 타지 않는겁니까?"
"아, 그거 말이죠."
나자리오 수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그 편이 안전하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그건 전쟁기계지 않습니까.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 가는건데, 단순히 저희가 불안하다고 해서 주민들에게 위협을 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럴 필요도 없구요. 그럼 그게 끝입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납득할만한 이유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움직임을 확인하고서 나자리오 수사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감았다.
순간, 나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5초 뒤, 나는 그런 의문을 떠올린 내 자신을 부끄러워 했다.
그건 그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평화의 임금이자 전능하신 주님,
저희에게 고난을 버틸 용기와 힘을 주시어,
안전을 찾는 이들이 영광과 안녕을 찾을수 있게 하소서.
무고한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판단력을 주시고,
적지에 발디딜 동안 의무를 지킬 힘을 주시오며,
악과 위험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여 주소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저희가 사랑하는 이들을 보살피시옵고,
불행을 이끄는 이들로부터 평화를 지킬 수 있도록 하시어,
그리하여 저희가 짓는 죄를 사하여주소서.
아멘."
"안색이 안좋으십니다."
나자리오 수사가 말했다. 방탄 헬멧이 드리운 그림자도 내 매스꺼운 표정을 전부 가릴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차 멀미가 조금 있습니다. 멀미를 안하는 사람도 멀미하게 만들 속도기도 했구요."
"아하하, 그건 사과드립니다. 카이우스 수사가 차를 거칠게 몰긴 하죠. 덕분에 바사 수녀가 항상 걱정하곤 합니다."
"그럴만 하더군요. 후우, 혹시 앉아서 쉴수 있을까요?"
그 말에 나자리오 수사는 주위를 둘러보다 텅 빈 상자를 찾아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상자를 쓰시면 될 것 같네요. 마침 그늘 밑에 있으니 저기서 좀 쉬시고 오셔도 될것 같습니다. 임무는 저희가 서는거지 슈나이더씨가 서는게 아니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일단 매스꺼운 속을 부여잡고 상자로 다가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 상자는 걸터앉기 적당한 높이에, 생각보다 튼튼해보였다. 무엇보다, 속이 비어있어 들기에 어렵지 않았다. 상자를 번쩍 들자 위의 내용물이 쏟아져나올뻔 했지만, 이를 악물어 어찌어찌 참아내고 나자리오의 옆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좀 앉아있겠습니다."
"의지가 강하시군요."
나자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못해먹는다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역겨움이 뱃속에서 다시한번 몰려와 이를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숨을 크게, 천천히, 그리고 리듬감있게 쉬고 또 내쉬자, 그제서야 시야와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하며 눈에 주위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에 들어온 풍경은, 꽤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낸 아름다움도, 체계화된 거리에서 느껴지는 인공의 미도 아니었다. 대위기 이후 수많은 대도시가 뽐내는 공허의 장관조차도 아니었다. 뭔가, 다른곳에서는 느낄수 없는 위화감이 이 평범한 마을에선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고 나서야 그 해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 위에 자동차가 없었다.
어떤 곳이든, 대위기 이전에 범람했던 수많은 고철덩이가 이 마을의 도로 위만큼은 점령하지 않고 있었다. 비록 포장되지도 않고 폭도 비좁은, 그럼에도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의 흔적이 이곳에 처음부터 차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주민들이 치운 것이다.
왜일까? 그건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대위기 이후 몇십년동안 관리도 되지 않고 천천히 썩어들어간 고철덩어리를 누가 쓸수 있을리 만무했다. 별로 넓지 않은 도로폭을 생각하면 얼마나 그 크기가 작든 통행에 불편이 되었으리라는걸 유추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건 뭐라고 해야할까, 꽤나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분명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일조차, 한번 멸망했던 이 세계는 어려워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위해, 사람들은 모여야했다. 불편을 이야기해야했고, 누군가 나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잔해들을 어디다 치워야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것이고, 며칠에 걸쳐, 누가 그 일을 해내야할지도 협의해야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사람들은 모여야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해야 했다.
신뢰. 그게 내가 이 마을에서 느낀 아름다움이었다.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자리오 수사가 가벼운 몸수색을 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혹시모를 위험을 위해서였지 주민중 누군가가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불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회관으로 들어오는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 중 몇몇은 수사를 알아보고는 환한 표정으로 나자리오를 맞으며 손을 뻗었고, 수사는 총에 손을 놓고 그 손을 맞잡아 살갑게 흔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신, 혹은 이웃이나 친척의 건강을 그동안 살펴주어 감사하다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보다 훨신 더 좋은 상황에 처한 수사를 향해 걱정하며 안전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이 작은 마을이 가진 미에서 비롯되었다.
"당신들이 왜 GU를 타고오지 않았는지 알것도 같군요."
무심코 말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수사가 웃으며,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금 꺼냈다.
"여기엔 얼마나 계셨습니까?"
"21번 수도원에요? 음, 4년쯤 됬을겁니다. 아마도말이죠. 1년이 12개월 맞죠?"
"네."
"그러면 맞을겁니다. 정확하게 3년하고 6개월 있었네요."
"원래 이쪽 출신이십니까?"
수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헀다.
"아뇨. 베를린의 베네딕트 쉘터 출신입니다."
"거긴 카톨릭 쉘터가 아닐텐데요?"
그가 작게 웃었다.
"카톨릭 쉘터가 아니라고해서 신앙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보통 그런 경우 종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뭐, 제 경우엔 부모님이 신자셨습니다. 독실하진 않았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버지께서는 신앙을 위해 사람이 미어터지는 카톨릭 쉘터로 향할 바에야 차라리 비싼 돈을 주고 안락한 사설 쉘터에 자리를 잡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셨거든요.
하지만 고난의 때 일수록 잊혀진 신앙이 다시 되살아나고는 합니다. 부모님이 딱 그런 케이스였죠. 제가 태어났을땐, 이미 부모님은 쉘터의 카톨릭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창조주를 믿게 되었구요."
"음, 하지만 베네딕트 쉘터는..."
"네. 끝이 좋지 않았죠."
나자리오는 쓸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정문으로 들어온 한 사내의 몸을 쓰다듬어가며,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검문받던 사내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고, 이내 문 안으로 들어가 회관의 진료소로 향했다.
"뭐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잘 아시는것 같으니 결말만 이야기하자면, 제가 쉘터로부터 퇴출당한 뒤로 저는 바티칸으로 향했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그 분들만큼 열성적인 신자는 없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남으로부터 배척받는 신자도 드물었으니까요. 두 분이 숨을 거둔 뒤로, 저는 그게 정말 옳았는가에 대해, 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소문을 따라서 의도치 않은 모험을 거치기도, 고난을 겪기도 하고 완전히 무지한 타인의 호의에 기대기도 하며 도달한 바티칸은 생각한 것 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 사진으로만 봐오던 성 베드로 성당의 처참한 잔해와 살 곳을 찾지 못한 자들이 세운 천막으로 가득한 배드로 광장은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더군요.
하지만, 동시에 전 그곳의 사제들도 보았습니다. 다치고 병든 이들 사이로 다가가 얼마 되지 않는 음식과 의약품을 나누고는, 함께 미래를 향해 기도하고 있었죠. 그 모습을 본 직후 저는 생각했습니다. 신자가 되리라고 말이죠. 이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리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 되지 않던 줄의 마지막 사람을 보낸 뒤였다. 거리는 비어 있었다.
"그게 벌써 10년도 전의 이야기네요."
"멋지군요."
대화가 멎었다. 그와 함께, 차멀미도 완전히 멎어 세상이 한층 포근하고 안전한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용기를 얻었는지, 자연스럽게 두발로 다시금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앉아있을때는 보이지 않던 낮은 담 너머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회관의 지대가 살짝 높아서였는지, 아담한 건물들이 이루는 마을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시선을 돌려가며 여러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갈수록 기울어져가는 태양의 빛을 반사해 붉게 빛나는 건물의 표면이 바로 반대편의 어두운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실루엣과 어우러져 강렬한 풍경을 자아냈다. 물론 그 대다수는 지붕이나 벽이 무너져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지만, 그럼에도 대위기 이전의 얼마 되지 않는 영광을 유추하는데에 어려움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가자, 무언가 이질이고 또 거대한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아가버린건지, 아니면 꺼져버린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휑하니 엉성한 철골 벽만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지붕덕에 더욱 더 황량하게 보이는 건물이었다.
"저기가 강철 움막입니다."
내 시선을 읽은건지, 수사가 말했다.
"예전에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 잔해만 남아있죠. 거리의 잔해를 주민들이 힘을 모아 전부 그쪽에다 옮겨 놓았는데, 언제부턴가 근처의 약탈자나 스케빈져가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모인건 아니에요. 단지 저희를 좋아하지 않을 뿐이죠."
신자의 아량일까, 아니면 또다른 형태의 신뢰일까.
"그러고보니까, 바사 수녀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네?"
갑자기 떠오른 질문을 하자,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나자리오 수사가 의아한듯 되물었다.
"출발하기 전에 한 이야기 있잖습니까. 파비오와 카이우스 수사의..."
"아. 그거 말입니까. 직접 물어보시는 편이 더 좋을텐데요?"
"궁금해서 말이죠. 모르시는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나자리오 수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비명을 듣고 급하게 달려갔다는 부분까지요."
"아, 그렇죠. 그렇게 파비오와 카이우스 수사는 비명소리를 듣고 움막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녹슨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그 둘이 본건, 언성을 높이며 흥정하던 스케빈져와 바사 수녀의 모습이었죠. 어디서 난건지, 보급품으로 지급했던 물건들을 제시하며 이 이상은 안된다고 윽박지르는 바사 수녀 때문에 스케빈져도 혀를 내둘렀다고 하덥니다. 총도 들지 않은 그녀를 상대로, 이 험난한 세상에서 갖은 고난을 거쳤을 그들이 두손 두발 든거죠."
"하하하, 그건 정말 대단하군요."
상상하지 못한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상상이 실제로 밝혀진건 꽤나 유쾌한 일이었다. 그 일이 눈 앞에 그려질 정도였으니까. 흉터로 가득한, 거칠고 야윈 피부를 가진 거구의 사내들이, 수녀를 상대로 쩔쩔매는 모습은 언제나 유쾌한 법이다.
"슈나이더씨,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그때, 나자리오가 물어왔다. 한층 더 진지한, 그리고 어젯밤에 들었던, 능글맞은 분위기의 목소리로.
"요한 수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상치 않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당황할만한 질문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나는 차분하게, 그의 바뀐 톤에 맞춰 진지함을 담아 대답했다.
"어제 함께 면담하신거 아니었습니까?"
나자리오 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은 긍정을 담고있진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하진 않았더군요. 그가 이야기하지 않으려하기에, 캐묻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가 이야기하지 않으려했다면, 저도 이야기하지 않는게 옳겠죠. 그의 사생활이니까요. 수도사제님께 이야기하진 않덥니까?"
수사는 고개를 저었다.
"사제님께 이야기한게 아니라, 신께 고해한거죠."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이야기할만한 내용이 아니라는건 아실것 같습니다만."
"그렇지만."
그가 한숨을 쉬었다. 크게, 그리고 그답지 않게.
"저도 이게 옳지 않다는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수사이자 동시에 분대장입니다. 분대장으로써,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만해요. 적이 저희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안 지금은 더더욱 말이죠. 예기치 못한 그 어떤 것도 허용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수사님."
걱정에 찬, 그 이상으로 고뇌하는 목소리가 한껏 담긴 그의 이야기를 나는 중간에 끊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요한 수사의 그 어디가 걱정이시란 말입니까? 제가 본 오마르 요한이란 사람은 활기차고 친절한 청년이었다구요."
그 말을 듣자, 나자리오 수사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과는 다른 종류의, 결심의 한숨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군인이 되려는 자들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이죠. 대대로 하려는 사람들.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들. 싸우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게 없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
"확실히 성경을 인용하진 않으셨군요."
수사가 작게 웃었다.
"고향이 카톨릭 쉘터는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여러가지 책이 있었죠."
그리고는 먼곳을 바라보았다. 도로쪽이었지만, 수사가 도로를 보고 있지 않다는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의 끔찍한, 그만 아는 고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요한 수사가 네번째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입대한 사람이라고 말이죠."
"그럴리가요."
그럴리가. 확신할수는 없었다. 만난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기에, 보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있을수 있다는 사실을 잊을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마르가? 그 순수한 청년이?
수줍게 웃으며 소설을 쓴다 이야기한 청년이?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만, 어제 시뮬레이션을 보고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셨길래 그렇게 다급해하시는 겁니까?"
수사는 침을 삼켰다. 그의 목젖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긴장감넘치는 소리가, 근육이 경련하며 입에 고인 침을 위 속으로 넘기는 그 소리가 크게 울려퍼져왔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어설펐습니다. 어쩔수 없는 일이죠. GU를 조종한다는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고, 시뮬레이터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매우 익숙치 않을테니까요. 시스템이 오퍼레이터의 신체 움직임을 감지하고 이를 재현하기 때문에 오퍼레이터에게 실제 GU의 하중이 직접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한 센서 때문에 평소에 신체를 움직일때보다 더 많은 저항을 겪게 됩니다. 물로 꽉찬 욕조에 잠수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단순히 걷는 것 만으로도 많은 체력이 소모됩니다.
보통 일반적인 신병이라면 20분 가량의 시뮬레이팅 과정을 한차례 돌리고 나서 탈진하게 됩니다. 당연한 결과에요. 저도 그랬고, 다른 수사들도 전부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는 학을 떼고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죠. 그때까지 GU를 탄다는 것을 동경하던 청년들도, 시뮬레이트를 거치고 나서는 상당수가 포기하고는 하니까요.
요한 수사라고 다른건 아니었습니다. 시뮬레이터에서 나온 그는 바로 탈진해 쓰러졌죠."
"그게 끝입니까?"
당연하게도, 나자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수분을 보충한 요한 수사는 말했습니다. '다시 하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요한 수사는 시뮬레이트를 반복하다, 취침시간을 한참 넘기고서야 잠에 빠졌습니다. 35차례의 시뮬레이트를 마치고, 그간 있었던 최고점을 갱신하고서야 말이죠. 시뮬레이트를 반복할수록 요한 수사는 더욱 더 빨라졌고, 더 강해졌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광기였습니다. 집념이었구요. 그는 더 강해지지 않고서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가 없는 듯 했습니다. 그만하라고 이야기를 해도, '한번 더, 마지막으로 더'라고 이야기하며 계속 도전했습니다.
저는 그가 훈련 신경써야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저에게 한 이야기에선 그런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어요. 그에겐 강박이 있고, 저는 그걸 알아야합니다. 만약 그 강박이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라면, 저는 그가 GU를 타도록 놔둘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야합니다. 저에게 요한 수사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해요."
그리고는 수사는 입을 닫았다. 우리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태양이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자리오 수사가 말하는 강박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요한 수사는 내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 좁디 좁은, 수도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만, 어째서 그 이야기를 나에게만 하고 나자리오에겐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말이 한차례 머물고 간 이 세계에선 더더욱.
그랬기에, 나는 침묵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나저나 제가 요한 수사의 과거에 대해 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자리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직접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말입니까?"
골똘히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슈나이더씨도 이야기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알지 않고서는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죠."
"핫."
허를 찔렸다. 나자리오 수사는 대단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치고 들어오다니.
만약 그가 수사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둘 중 하나는 확실합니다. 요한 수사는 정말 엄청난 범재던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고싶어 안달난 사람이라는 것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수사의 말에서, 어느새 압박감이 사라졌다. 더이상은 묻지 않는다는 의미리라. 대신, 그는 요한 수사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나는, 왠지 모를 후회를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요한 수사를 바라보았을때, 오감을 깨우는 총성이 들려왔다.
"파비오! 보고해!"
"카시우스와 전 무사합니다!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 수사?"
"괜찮습니다!"
"2분대는 이상 없습니까?"
[이상 무! 의료팀도 이상 없습니다! 환자들이 깜짝 놀라긴 했지만 총을 맞은 사람은 없습니다!]
"슈나이더씨?"
"괜찮, 괜찮습니다."
땅에 납작 엎드려 먼지를 들이키며 말했다. 양팔로, 낮은 담을 향해 천천히 기어갔다. 젠장. 팔이 쑤셨다.
"하, 이게 처음은 분명 아니신것 같군요."
"아가티노땐 눈 앞에 GU가 지나갔는걸요."
몸을 웅크려 완벽하게 담벼락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나자리오가 웃었다. 그리고 표정을 바꾸어, 정차한 험비의 뒤쪽에 몸을 숨긴 요한을 향해 외쳤다.
"요한! 이쪽으로 와!"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살짝 바퀴 밖에 드러내 밖을 겨누던 상반신을 거두어들이고는, 이내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전방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에 도달할지 명확하게 머리에 그리고서 빠르게 질주했다.
"보이십니까."
나자리오가 말했다.
"저게 걱정되는겁니다."
마지막 2미터 가량을, 요한은 몸을 내던지듯 미끄러져 지나쳤다. 그와 마찰한 땅에서 흙먼지가 일어올랐고, 그와 부딪친 담벼락은 살짝이지만 확실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런 잔 상처가 자신을 죽일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누구도 이 청년이 신병이라 믿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믿을수가 없었다. 요한이, 소설가 오마르가 살인을 위해 수사를 자원했다는 가능성을 믿을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명령을."
짧게, 요한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무미건조한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마르 요한은 네번째 유형의 인간일수도 있다고.
"전 제가 모두를 지킬 수 있을줄 알았어요."
오마르 요한이 말했다. 몇시간 동안의 대화 -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그와 이를 맞장구친 나의 상호작용 - 끝에 나온 말이었다. 집중하고 있었냐 하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럴수가 없었다. 괜찮았었던 멀미가 어느샌가 심해져있던 것이다. 그것만 아니라면 무어라 이야기했을테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오마르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있었다. 어떤 대단한 능력이라고 하기보단 직업병에 가까운 습관이었다. 들은 이야기는 왠만해서는 잊지 않았다.
"저희 쉘터는 약탈자의 눈에 그리 띄는 곳은 아니었죠. 왠만한 시골의 쉘터가 다 그렇지만, 다른 커다란 쉘터들과 비교하면 작은 천막이나 움막에 가까웠었으니까요. 간신히 돌아가는 정수 시설에 의지해 쉘터민들은 외부인과 교류하곤 했어요. 음식이나 옷가지를 물과 교환하곤 했죠.
그런데 어느날, 제 아버지가 무언가 새로운 걸 멀리 떨어진 곳에 나갔다가 가져왔습니다. 그건 쉘터 근처 토양에서 기를 수 있는 작물의 종자였죠. 작물을 키운다는게 그렇게 가치있는 행위인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작물을 기름으로써 저희는 처음으로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죠. 그떈 정말 행복했었어요."
차가 약하게 덜컹거렸다. 맨 처음 목적지가 지도에 나오지 않은 마을이라는 말에 더 덜컹거리진 않을까 불안해했지만, 다행히도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한 듯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행도 찾아오더군요. 평소에는 저희를 눈여겨보지도 않던 약탈자들이 하나 둘씩 꼬이기 시작하고는, '보호'해 줄테니 자리세를 내라는 협박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이가 없었죠.
그래서 전 총을 들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말이죠. 정말 우스워요. 몇 안되는, 세상을 보지도 못한 풋내기들이 수많은 약탈자들을 상대한다니. 하지만 그땐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소년의 치기어린 자신감일지도 모르죠."
오마르는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제 여동생 페라이는 그런 면에서 대견했어요. 하루는 제가 병에 걸렸는데, 제가 쉬는 동안 대타를 서겠다고 하더군요. 15살의 어린 소녀가 말예요. 물론 저는 그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럴수는 없었어요. 젊은이들, 아니 쉘터에서 페라이만큼 총을 잘 쏘는 사람도, 말을 잘하는 사람도 없었거든요. 제가 몇이 있든 그녀 혼자가 더 쓸모있을거라며 설득하는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어요.
일은 그때 벌어졌습니다. 시끄러운 총성에 잠이 꺠어 쉘터의 해치를 열고 나갔을때, 눈 앞에 수많은 약탈자가 쓰러져있더군요. 페라이는 온데간데 없었구요."
"잠깐,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도 되나?"
나는 잠시 이야기를 끊고 오마르에게 물을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사적인 이야기였기 떄문이다.
"나는 바드라네. 이야기를 퍼트리는게 내 일이야. 그런 이야기를 내게 했다간,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무심코 전해버릴수도 있다네. 그런 내게 이야기를 해주는게 좋은 생각이라고 보나?"
그 행동을, 나는 당시에 배려라고 생각했다. 오마르가 자신의 순진함에 말미암아 민감한 이야기마저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예."
하지만 달랐다. 그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제 이야기를, 페라이를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상관 없어요."
그건 순진함이 아니었다. 순수한 기억과 후회였다. 그리고 오마르 나름의, 동생에 대한 경의였다.
"저와 다른 사람들은 총을 쥐고 페라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주위의 모든 곳을 뒤졌죠. 수많은 약탈자들을 쏘아죽이고 협박하며 제 여동생을 찾아 나섰죠.
하지만 페라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제가 쉘터를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페라이를 잃었단걸요. 제가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좀 더 긴장하고서 제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페라이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거에요."
"자네는 아팠지 않나. 자네 책임이 아닐세."
"아닙니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제 컨디션을 조절했더라면, 제 한계를 알고 이를 조정했더라면 페라이가 앞으로 나설 일도 없었을거고 제가 제 책임을 방임할 일도 없었을 거에요. 다 제 책임이에요.
그날 이후로 저는 다짐했습니다. 더 강해지리리라구요. 다른 이들을 진짜로 지킬수 있는 사람이 되자구요. 그게 제가 펠러틴 수도원에 자원한 이유에요."
"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오마르에 대한 예였고, 또 잠시나마 그를 오해했던 자신에 대한 속죄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렸다. 이 분위기를 바꿀수 있는 화제를 꺼내야 헀다.
빌어먹게도, 멀미가 나를 방해했다. 뇌가 제대로 일하지 못했다. 속이 거꾸로 뒤집힌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오마르가 입을 열어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뭘 하러 오신건가요?"
나는 오마르의 이야기를 나자리오에게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온전히 오마르의 것이고, 오마르의 몫이었다.
그 이야기가 자신의 광기를 위한 변명이었는지, 아니면 이루지 못한 자신의 실패의 기억이었는지 나는 알수없었고, 판단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철수일이 다가왔다.
"왜 전 GU를 타지 못하는거죠?"
마침내, 요한이 나자리오 수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긴 했다. 아직 배워야할게 많다고 이야기하며 요한에게 변명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으니까. 그 변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는 시뮬레이트를 완벽하게 해내었고, 그러기를 몇번이고 반복했다.
"말했잖아요. 모든 수사는 수도원에 배속된 뒤로부터 최소 2주일이 지나야 GU에 탑승할 수 있다구요."
하지만 그랬기에 나자리오는 더더욱 요한을 GU로부터 멀리 떨어트리려했다. 요한이 자신을 증명하려하면 할수록, 나자리오는 그를 불신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치 요한과 나자리오는 자석과도 같았다. 가까워지려 하면 할수록 멀리 밀어내는, 같은 극의 자석.
마지막 의료 지원이, 한 주민이 의도치 않게 일으킨 총성으로 살벌하게 끝난 이후 둘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별수 없었다. 바로 그 긴장의 상황에서, 둘은 서로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별 수 없는 결과였다. 요한은 나자리오 수사의 불신의 눈빛을 목격했고 나자리오는 임무에 목마른 광인을 목격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한사람 한사람의 필요가 절실한 지금, 왜 절 내버려 두시는건지 이해할수가 없단 말입니다."
요한이 말했다.
"도움은 충분합니다. 제가 요한 수사에게서 총을 빼앗은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에디른에 당도하면 그때 제대로 된 GU를 배속하게 될테니 걱정하지 말라구요."
"하지만-"
"그만하세요, 요한 수사. 이건 분대장으로써의 명령입니다."
그리고야 마침내 나자리오는 써서는 안될 권한을 사용하고 말았다. 수도사가 아닌 군인의 권한을. 군인을 바라지만 그럼에도 수도사였던 그들로써는 한없이 기피하던 행위였기에, 나는 이 불필요한 긴장감이 불쾌해지기만 했다.
요한이라고 그 명령이 기분좋을리 없었다. 요한은 나자리오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휘젓고는 내무실 바깥으로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갔다.
모든 물품이 차량에 실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만이 남아있는 1분대의 내무실에 그렇게 적막이 찾아왔다.
지금에라도 이야기를 해야하나?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가 될수도 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이야기하지 않은 책임과,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을 깨트린 책임을 모두 지고서 의미없는 다툼의 희생양이 될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뭐라 이야기를 하고싶은 충동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이 적막이 너무나 날카로워 숨쉬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그건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자리오. 네 걱정은 이해하겠는데, 말이라도 요한을 안심시켜 줄수는 있잖아."
파비오가 나자리오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나자리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한다고."
"젠장. 나자리오. 언제나 이럴수는 없잖아. 솔직히 나는 요한이 믿음직스러워. 여기서 2주밖에 안있었지만 아마 우리중 GU를 잘 다룰거라고. 녀석에겐 천부적인 센스도 있고 끝없는 노력도 있어."
"바로 그 점 때문에 걱정하는거야. 보통은 그렇게까지 자신을 볼아붙여가며 자기자신을 증명하려하지 않는다고."
"'보통은' 그런거겠지! 요한 수사는 단지 보통이 아닌 것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나자리오! 요한은 동료 수사야! 잠재적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파비오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자리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의 굳게 닫힌 입가는 파비오 수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무언의 긍정을 보고 파비오는 경악했다. 그리고 역겨운 표정으로 나자리오 수사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군."
"미안."
파비오는, 별수없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수도사제님은 어떻게 하라는데?"
"...내가 정하라더군."
"젠장. 그러고도 아직도 도미니코 수도사제님이 존경스러워?"
나자리오 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모든게 진절머리나는구만. 젠장."
다시금, 파비오의 허탈한 한숨이 방 안에서 울려퍼졌다.
젠장. 이 공기가 싫었다.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랬기에,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묻기로 결심했다.
"언제 출발한다고 했죠?"
멍청한 질문은 언제나 쓸만한 방법이었다. 내 말에 나자리오는 마침내 다른것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는 듯 표정을 바꾸더니 여유로운 톤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수도원의 CAD 파일을 전부 업로드 한 뒤에 3D 프린터 시설을 폭파한 후 출발할 겁니다. 정확한 시간은 저도 모릅니다만, 아마 한시간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싶네요."
"레버넌트의 설계도는 이미 확보한거 아니었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남유럽 지역에서 발견한 레버넌트 구동파트 설계도를 확보했을 뿐이죠. 이쪽의 설계도는 업로드한 적이 없습니다. 외장파트의 경우 모듈화 되었기 때문에 같은 레버넌트라면 어떤 기기라도 호환 가능하지만, 구동파트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애초에 GU가 지역 점령용으로 구상된 병기이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에 크게 작전 능력이 떨어지곤 하거든요. 대위기 이전의 NATO군은 지역마다 다른 구동파트를 생산해 이용함으로써 각 지역에 맞는 특색의 병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에, 저희 수도원에 있는 구동파트의 설계도는 저희가 이미 확보해놓은 설계도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언제 돌아올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돌아오게 된다면 중동 사양의 레버넌트를 확보해 놓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좋을겁니다."
"그게 꽤나 걸리는 모양이네요."
"용량이 용량이다보니까요. 아우터넷을 이용해서 속도가 나지 않는것도 같구요."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왜 그걸 지금 하고 있는겁니까? 업로드라면 철수하기 전에 이미 끝내 놓을수 있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처음으로 나자리오 수사의 말문이 막혔다. 그조차도 모르는 일인 듯 했다.
"음.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복사 제한이 있는지도 모르죠. 한번 복사하면 원본이 지워진다던가요."
"혹시-"
추측을 꺼내려던 내 말을 끊고,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자리오!"
그렇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건 카시우스 수사였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그는 내무실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요한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카시우스는 내 알바 아니라는 나자리오의 얼굴을 보고 진절머리난다는 표정을 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몰라요."
"언제까지 싸울건데. 미치겠군. 요한은 내가 찾아볼테니까 여기 인원들은 전부 작전실로 가도록 해. 비상이야."
어찌된 일이냐 묻기도 전에 카시우스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내무실 안에 남겨진 우리들이라고 별수 있는것도 아니었다. 멈추지 않는 사이렌 소리가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했기에, 한시빨리 발을 놀려 내가 맨 처음 수도사제를 만났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옯겼다.
같은 철문을 열자, 그때와 같았지만, 사람이 더 많아진 작전실의 풍경이 날 맞이했다. 다른 분대는 이미 전부 도착한 모양이었다. 근심에 가득차있었던 도미니코 수도사제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왔나?"
"예. 카시우스 수사는 요한 수사와 함꼐 온다고 합니다."
"그럼 됬네. 카시우스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자. 지금 상황을 설명하겠네. 아웃사이더가 우리 바로 앞마당에서 우리를 칠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네."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출처는 어디죠? 신뢰할만 합니까?"
"그럼. 순찰을 나갔던 아치볼드가 마을에서 티무르하고 이야기한거야."
"처음보는 이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수도원 근처로 집결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지. 그 즉시 복귀에서 수도사제님께 보고한거야. 한시가 급해. 지금 당장 놈들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거야."
아치볼드 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확인했다.
"녀석들도 우리가 계속 물자를 빼는걸 보고 심상치 않다 여겼을테지.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아직 설계도의 업로드가 끝나지 않았어. 그럼에도 한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근 한달동안 3D 프린터를 최대로 가동한 덕분에 우리가 보유한 프린터 카트리지를 가지고 생산할 수 있는 레버넌트의 구동파트를 모두 생산했다는 점이야. 지금 바깥에 정차된 트레일러 차량 두대에 구동파츠 4대, 자네들의 GU 2대씩 해서 총 12대의 레버넌트가 적재되어 있고."
"지금 인원을 나누자는 말씀이십니까?"
나자리오의 물음에 도미니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1, 2분대는 아웃사이더가 공격을 하기 전에 차량을 타고 에디른으로 먼저 출발한다. 이미 생산된 GU를 아웃사이더에게 넘겨주지 않는게 우리들의 최우선 목표니까. 3, 4분대는 나와 함께 수도원에 남아 업로드가 끝날때까지 대기한 뒤 폭탄을 작동시키고 험비를 타고 탈출한다."
"3, 4분대의 레버넌트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물었다.
"폭파해야죠. 별 수 있습니까. 놈들에게 넘겨주는 바엔 그게 나을겁니다. 바사 수녀는 2분대와 합류해서 에디른으로 먼저 가도록. 어짜피 부수는거 말고 우리가 할건 없으니까."
구석에서 입술을 깨물던 바사 수녀가 분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관리하던 기계를 좋아하던 그녀이기에 그것들을 두고 떠나는게 아쉬웠으리라.
"질문 있나?"
도미니코가 고개를 돌려 시선으로 쭉 분대장들을 둘러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아, 그리고 나자리오."
말미, 수도사제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정신 좀 차리게. 요한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나자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마침 복도 끝에서, 카이우스 수사와 요한 수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1분대. 우리는 트레일러 차량에 탑승해서 레버넌트 구동파츠를 에디른까지 수송한다. 전방 레버넌트에 파비오 수사가, 후방 레버넌트에 카시우스 수사가 탑승해 주위를 경계하고, 조수석에 요한 수사가 탑승한다. 운전은 내가 할거야. 질문?"
"저는 왜-"
"너 말고. 다른 질문?"
나자리오가 요한의 말을 맹몰차게 끊어냈다. 솔직히, 그건 너무했다.
일순간 요한 수사가 빠르게 튀어나가 나자리오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그에 비해서 늦을 수 밖에 없었다. 단지 0.몇초의 차이였을테지만, 요한의 주먹은 이미 나자리오의 얼굴에 쳐박힌 뒤였다. 나나 다른 수사가 할수 있는 거라곤 뒤로 비틀거리며 고꾸라진 나자리오를 향해 후속타를 넣기 전에 그의 팔을 붙잡아 버둥거리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라는겁니까! 돕게 해주십시오! 왜 제가 돕지 못하게 하는겁니까! 저도 팰러틴 기사단의 수사란 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퉷, 하고 나자리오가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있었다. 다시 균형을 잡고 똑바로 일어서고는, 말했다.
"질문 있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분대는 침묵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빨리 트레일러에 타자고. 한시가 급해."
흔히 보기 힘든 대형 트레일러 차량 위에 GU가, 그것도 두대나 올라타 있는 모습은 분명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아마도 오랜 수사 생활을 함께했을 1분대의 레버넌트는 그 짜리몽땅한 다리를 트레일러 위에 용접된 방탄판 뒤에 감춘체, 단단한 레버넌트 특유의 외부장갑과 등 뒤에 착용된 추가 화력장비의 총구만을 밖을 향하고 있었다. 연료 효율로써는 최악의 조합이었지만 연료를 쓰는거라고는 차량뿐이기에 가능한 무장이었다.
"40mm 고속유탄발사기 2정에 7.62mm 개틀링 1정, 그리고 60mm 대장갑포 한정까지 장비한 무시무시한 놈이라구요. 차 안에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비오 수사가 트레일러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내 얼굴에 근심이 비친 모양이다. 물론 걱정이야 있었다. 아웃사이더가 쏘지 않을까하는 걱정. 하지만 파비오의 말에 나는 머리 위의 레버넌트가 폭발하지 않을까하는 걱정마저 떠안게 되었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능숙하게 레버를 조작해 레버넌트의 해치를 열어재끼자, 외부 장갑과 함께 레버넌트의 전면부가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리듯 열렸다. 그 모습에서 나는 GU의 전신이 외골격 강화장비라는 이야기를 어느정도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결국 외부장갑이 없는 레버넌트를 생각하면 팔다리만을 보호하는 외골격장비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비좁아보이기까지 한 레버넌트의 팔다리에 파비오는 자신의 팔다리를 집어넣고 등을 GU의 뒷면에 밀착시켰다. 이를 인식하기라도 한것인지, 파비오가 자리잡은 직후 레버넌트는 그 아가리를 닫았다. 머리없는 기사.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레버넌트는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었다.
"카시우스도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럼 가자고."
모두가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나자리오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덜컹거리는 엔진음을 듣자마자 나자리오는 엑셀을 밟고 정문을 통해 수도원을 빠져나갔다.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주님도 이해하실겁니다."
그가 말했다.
"제 생각에, 수도사제님은 이 걸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30분동안 계속된 미묘한 침묵을 더이상 참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2주일만에 모든게 변했다. 요한 수사는 2주일 전만큼 순수한 수다쟁이 청년이 아니었고, 나자리오 수사는 2주일 전만큼 능글맞은 연륜을 자랑하는 사제가 아니었다.
변화는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였지만, 그것만큼은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십니까?"
나자리오 수사가, 시선을 도로에 고정한체 물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것 말입니다. GU라던가, 기사 수도회라던가, 이런 모든걸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거죠?"
잠시 임술을 깨물고 생각하며 내 생각의 근거를 떠올렸다.
"일단 수도사제님은 GU를 안타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하죠.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40세 이상이 GU를 운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SMA쪽 용병들처럼 뇌에 임플란트를 이식해 직접 조종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
"단순히 힘들어서는 아닐텐데요. 처음부터 GU를 안타셨다고 하던데요?"
"그건 대체 어디서 들으신겁니까?"
"사제님이 직접 이야기해주셨습니다."
"하."
나자리오가 짧게 웃었다.
"그것 말고도, 사제님은 자신과 수도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공개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말을 전하기위해 이야기를 듣는 바드한테말이죠."
"그거야 이상한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의료팀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죠. 그들의 작전만 우선시할뿐이었구요."
"그걸로는 빈약하지 않습니까?"
"수상한건 또 있습니다. 애초에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 말이죠."
나자리오 수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웃사이더가 간헐적으로 수도원을 공격하고, 이에 철수할 예정을 세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바티칸으로써는 이 사실이 알려지는게 좋을리 하나 없었고, SMA도 딱히 공유할만한 정보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시기에 딱 맞춰서 이곳에 파견당했습니다. 그건 딱 한가지 이유로밖에 설명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불렀기 때문에 찾아왔다는거죠."
"수도사제님이 이곳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당신을 불렀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수도사제님이 수도원을 발견하게 된것도 연락이 두절된 쉘터를 수색하던 도중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의료지원만큼은 끝까지 해내셨구요. 수사보다 주민의 안전을 생각하고 말이죠. 수도사제님은 군인보다 신부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안타깝게도 군인으로써의 실력이 뛰어났을 따름이라 생각됩니다만."
나자리오 수사는 답하지 않았다. 뒷자리에 앉은 내게 보이는건 그의 뒤통수 뿐이었기에, 그의 표정이 보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그 또한 긍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만, 전방을."
요한이 입을 열었다.
"도로변에 차량 두대, 보이십니까?"
시야 끝, 평지가 지속되는 도로변에 요한이 말한대로 차량 두대가 조용히 정차되어 있었다. 멀리 떨어져 무엇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승용차 종류인것 같았다.
"파비오, 확인 되나?"
[예.]
무전을 통해 파비오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IED일 가능성이 있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40mm로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2분대, 여기는 1분대. 전방에 급조 폭발물로 의심되는 차량 두대를 발견했다. 파비오 수사가 처리할테니 인지하도록."
[여기는 2분대. 알겠다.]
그리고는 잠시 조용히, 차량은 해질녘의 도로를 질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안 일어났던 것처럼. 이 여행을 오랬동안 지속했던 것처럼.
마치 하나의 가족인 것 처럼.
그리고 땅이 울렸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퉁, 퉁, 하고 빈 쇠통을 두드린듯한 맑은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퍼졌다. 유탄발사기의 소리였을테지만, 그 유탄은 정작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착탄의 순간만큼은 놓칠수가, 잊을수가 없었다.
초탄은, 그저 먼지와 검은 연기만을 일으켰다.
두번째 탄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붉은 불기둥이 앞선 유탄이 일어낸 연기속에서 솟아올라 어두워져가던 세상을 다시금 밝혔다.
그 충격파가 다가오기 전에, 나는 그 폭발과 함꼐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자동차의 잔해가 저 멀리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편에 주의하도록."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차량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려 차체에 부딪쳤다. 꽤나 큰 파편이 눈 앞에 떨어졌지만, 나자리오 수사는 마치 그것이 일상인것 마냥 무심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다들 이상 없나?"
마침내 유탄이 피어올린 연기 기둥을 지나치고서야, 나자리오는 분대원들의 안부를 물었다. 무전기에서 모두가 안전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연하게 운전하시는군요."
"당황하면 위험하니까요."
내 질문에 나자리오가 가볍게 답했다.
"트레일러 차량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당황하면 차체가 흔들리고, 그렇게 되면 트레일러 위의 파비오 수사와 카시우스 수사의 목숨이 위험해지죠. 때문에 전 항상 차분해야합니다."
"언제나처럼말이죠."
내가 말했다.
"하. 네. 언제나처럼요."
"젠장."
나자리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게 뭐죠?"
그럴만 했다. 내 입에도 감탄사가 튀어나왔으니.
멀리, 지평선 끝, 눈 앞에 펼쳐진건 폭 100미터 가량의 구조물이었다. 붉은 저녁노을의 햇빛이 광경을 더 극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도로가 지나는 중앙이 뚫려있어 멀리서 보면 하나의 마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마치 거미줄처럼 많은 것이 얽히고 섥혀 있었다. 기괴하고 프렉탈적인 그 건축물의 존재에, 모두가 넋이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저번에 이 길을 지나갈땐 저런거 없지 않았나?"
나자리오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저런게 있었으면 잊을수가 없었겠지. 수도사제님도 별 이야기를 안한걸 보면, 최소한 2주 전에 저런 건물은 없었다고 봐야할것 같은데.]
"2주만에 저걸 만들어냈다고? 말도 안돼."
[지금 광학 센서로 확대해서 관찰중인데, 가능할지도 모르겠는걸. 쇠파이프를 베이스로 그 위에 나무판자를 엮어놓은 것 같아. 내구도 자체는 약한것 같다고.]
"멈춰서야할까?"
[그게 놈들이 원하는걸지도 몰라.]
"하지만 지나갈수도 없잖아? 놈들이 매복하고 있으면?"
[빨리 지나가야지.]
나자리오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알고 있어, 나자리오. 내 목숨이 달린 일이야. 그러니까 빨리 통과해달라는거고.]
[뭐야 파비오. 왜 내 의견은 안물어보는건데.]
[넌 후미니까, 멍청아.]
나자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지 않은체, 건축물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트레일러는 전진해나갔다.
"2분대는 어떻게 생각해?"
[나자리오에게 맡길게. 어짜피 돌아갈수도 없다고.]
"우회로는?"
[여기서 마땅히 꺾어 갈만한 곳이 없어. 트레일러 차량이라 이 이상의 거친 도로를 견딜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수도사제님과는-"
"연락이 안됩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요한이 말했다. 정론이었기에, 나자리오는 침묵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나로써는 알 수 없었다. 타당성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길 너머에 몇명이나 살아남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로써는 알 수 없었다.
"가자고. 모두 꽉잡아. 모두 자율적으로 사격해. 적이 있다면 쏘기 전에 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기꺼이.]
무전기 너머로 긍정의 대답이 쏟아졌다. 기뻐하는 것도 같은 목소리들이었다.
"알겠나, 요한?"
그리고 나자리오가 말했다.
의외라는듯, 요한이 나자리오를 바라보았다.
나자리오는 요한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앞을 응시할 뿐이었다.
요한은 그런 나자리오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향해 소총을 견착하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개틀링건이 내는 총성에 묻혀 사라졌다.
예상대로, 구조물 사이의 도로에 진입한 순간 소총탄이 빗발치듯 트레일러를 향해 쏟아졌다.
높은 차체 때문에 양 옆의 창문을 뚫고 나자리오와 요한, 그리고 나를 향해 총알이 날아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방탄판이 깔린 트럭 천장을 우수수 일그러뜨렸다.
요한은 몸을 최대한 숙이고 밖에서 보이는 총구섬광을 향해 소총을 쏟아냈다. 우수수 쏟아지는 탄피가 차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대전차화기가 있다면 아마 적들은 위쪽에서 사격할거야! 소화기를 쏘는 적은 최대한 무시하고 대전차병을 식별하도록!"
[말은 쉽지! 젠장!]
마치 폭발하는듯한 둔탁한 포격음이 가까이서 울려퍼졌다. 파비오가 말한 60mm 대장갑탄인듯 했다. 왼쪽의 구조물이 큰 충격을 받고 우수수 부서지더니, 이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왼쪽 구조물이 붕괴된다!"
아웃사이더가 총을 쏘는 소리와 그 충격은 느껴졌지만, 정작 그들의 위치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됬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되는겁니까?"
"나라고 알겠어?"
앞 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총소리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목청을 내지르며 의사소통했다. 의외로 친근한 구석이 있는 대화였다. 화해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에 감사할 틈은 없었다. 전과는 다른 충격이 전해졌다.
"뭐야!"
[제- 시발... 대전차포입니-]
파비오의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전해졌다.
[파비오가 맞았습니다!]
[괜찮- 관통상이- 쉬지 말고 쏘라고!]
마치 그 총상이 그를 자극한 것 마냥, 포화는 한층 더 거세졌다. 40mm 유탄인듯, 100미터 가량 전방에 있던 구조물이 연기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더니 수백개의 나무조각이 앞유리창을 덮쳐왔다. 다행히 그중 어느것도 유리를 뚫어내지도, 산산조각으로 부수지도 못하고 수십개의 하얀 금만을 남기고 흩어졌다.
"젠장! 조심하라고! 방탄유리기에 망정이지!"
[멀쩡하잖-요! 젠- 여기가 어떤 상황인-]
퉁, 다시금 익숙한 충격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뭔가 가벼워졌다.
[여기는 2분대! 카이우스 수사가 떨어졌다! 반복한다! 카이우스 수사가 떨어졌다!]
"말도 안-"
[여기는 카이우스! 난 괜찮아! 나자리오! 에디른에 꼭 도착하-]
다시금 익숙한 포격음이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카이우스의 목소리가 끊겼다.
나자리오가 핸들을 두들겼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계속 사격을 계속해!"
[그러고 있- 젠장-]
슬슬 귀에 익어가는 미니건 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미니건 탄이 떨어졌- 대장갑-]
펑, 펑, 펑, 머리 위에서 대장갑포 특유의 두들기는듯한 포격음이 연속해서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총알은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금 빗발쳤다.
그리고 다시. 퉁.
소름이 돋았다.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머리 뒤로부터 울려퍼졌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백미러를 향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2분대의 트레일러가, 마치 어린애가 집어던진 장난감처럼 옆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트레일러에서 떨어져 공중에 부유했던 레버넌트 두기는, 격하게 구르기 시작한 트레일러에 깔려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방의 나무판자로는 그 육중한 회전 운동을 막아낼수는 없는듯 했다.
[밟- 밟으라고!]
간헐적으로 지직거리는 무전 너머로 파비오가 소리질렀다.
"알고 있어! 젠장!"
더이상 아웃사이더의 위협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다급한 위협이 등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물리학은 우리편이었다. 나무가 꺾이는 소리 너머로 2분대의 차량이 천천히 그 속도를 늦춰갔다.
"이제 안전-"
그렇게 요한이 한숨 돌리려는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후광만으로도, 사라져가는 해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2분대의 트레일러가 폭발했다.
강한 충격파가, 앞을 향해 뻗어나갔다.
"의무병!"
내가 소리질렀다.
총탄이 준 충격에 프레임이 뒤틀려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앞좌석으로 기어넘어가 문을 걷어찰수밖에 없었다.
나자리오 수사는 에디른에 도착한 즉시 정신을 잃었다.
"안돼. 안돼."
요한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애써 그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두번. 세번.
내 노력이 무색하게, 요원이 그라인더를 가져와 문짝을 뜯어냈다. 쇠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지만, 피냄새만큼은 아니었다.
"젠장. 여기 의무병 빨리! 나무파편에 복부가 찔렸어! 피를 많이 흘리고 정신을 잃었어! 빨리 오라고!"
정신이 없었다. 누가 오고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다가와, 나자리오를 들것에 실어내렸다.
고개를 돌렸다. 요한은 여전히 얼굴을 감싸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책하고 있엇다. 이 모든 비극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더 강했어야. 안돼. 안돼."
"이봐. 정신차려."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오마르!"
그래서, 나는 그의 뺨을 때렸다.
오마르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오마르. 정신차려. 넌 살아남았어."
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틀어박혀있는걸, 아무도 바라지 않을꺼야."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수도사제님도. 파비오도. 카시우스도. 나자리오도. 아무도 네가 좌절하길 바라지 않았을거야."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릴수 있겠어?"
"예."
요한은 대답했다.
한숨을 쉬었다. 됬어. 이제 됬어.
그리고 차 문 밖으로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차체가 높았기에 넘어질뻔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는데 성공했다.
뒤를 돌아보고 트럭의 위쪽을 보자, 제자리에 주저앉은 레버넌트 한기가 미동도 하지않고 있었다.
정중앙에 뚫린 구멍이, 그리고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이 어째서 GU가 움직이고 있지 않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째서 파비오가 움직이고 있지 않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젠장."
뭐가 빌어먹을 휴식이라는거냐.
뒤를 돌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디로 걸어가는지는 몰랐다. 다만 눈 앞에 지나가는 한 군인을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을 뿐이다.
"수도원은, 수도원은 어떻게 됬지?"
이방인은 갑자기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당황해하다 이내 상황을 읽고는 대답했다.
"연락이 두절됬습니다. 그쪽도 습격받았어요. 출발조차 못했을겁니다."
앉았다.
더이상 서 있을수가 없었다.
다시 뒤를 바라보았다.
내 바로 뒤에, 요한 수사가 두다리로 굳게 서서 이방인이 전한 소식을 귀에 새기고 있었다.
"요한, 그건 미친짓이야. 지금쯤 어떻게 됬을지, 너도 잘 알잖아."
"기본적으로 수도원은 요새입니다. 저희보다 오래 버틸 확률이 높아요. 수도사제님을 생각하면 그게 당연하구요."
나는 병기고로 향하는 요한을 따라가며 말했다. 요한이 병기고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백발을 쏘아낸 소총의 총구가 검게 타올라 망가져 있었으니까. 요한은 그 소총을 기지의 병기고에 가 새로운 소총으로 바꿔왔다.
"그게 허황된 꿈인건 자네도 알잖나. 자네는 모두를 구할 수 없어. 모두를 지킬수는 없다고."
"하지만 노력할수는 있겠죠. 적어도 시도할수는 있단 말입니다."
탄약을 챙긴 그가 향한 곳은 항공기였다. SMA만이 가진 고속 수직 이착륙기가 수십대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그라도 이용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한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SMA의 의료팀이었다. 그들은 요한의 사정을 듣고는, 자신들이 도울것이라 흔쾌히 승낙했다.
"말도 안돼. 이건 자살행위라고. 차라리 도울거면 다른 이들을 모아서 가. 해가 뜬 뒤에. 지금 바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지 말고."
"지금이 아니면 안됩니다. 저보다 잘 아실거 아닙니까."
그리고 요한은 다시 트레일러로 향했다. 수백개의 제각기 다른 구경으 총탄이 부딪치고 찢어낸 트레일러의 문을 열었다. 거기엔 6대의 레버넌트가, 만신창이가 된 레버넌트가 차갑게 쓰러져 있었다.
"슈나이더씨. 이야기해주세요."
그리고 요한은 말했다.
"저는 착합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페라이를 찾아내지도 못하고도, 수십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제 자신을 속여왔습니다.
그 거짓말을 저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허무하게 잊혀진 페라이가, 그 모든게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한 과정에 필요한 희생양이었노라고.
팰러틴에 자원한건 그래서였습니다. 제 자신의 거짓말에 충실하기 위해서요. 누구보다 뛰어난 방패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죽일수밖에 없었다고요.
하지만 저는 불안합니다. 그 거짓말이 더이상 의미를 잃은것 같아 불안합니다. 제 자신이 더이상 착하게 보이지 않은것 같아 불안합니다. 제가 방패라고, 더이상 저를 속이지 못할것 같아 불안합니다.
그러니 말해주세요. 저는 아직 쓸만한 방패라고. 누군가를 지킬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에게 대답한다면, 그가 듣고싶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마르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라. 이야기를 기억하라. 이야기를 전파하라. 바드의 삼계명.
거짓을 말할수는 없었다.
요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트레일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때 나자리오 수사가 탔었을 레버넌트를 바라보았다.
"평화의 임금이자 전능하신 주님."
내 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웃사이더는, 결국 3D 프린터 공정 시설을 확보하는데에 실패했다고, 이후 SMA를 통해 전해들었다.
하지만 21번 수도원의 2분대가 남긴 트레일러에 남은 레버넌트의 잔해로부터 기술을 분석, 나름대로의 GU를 생산,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와는 별개로, SMA는 1개월 뒤 자사 GU 라인업에 중동용 기종, PA-56ME을 출시, 생산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유럽과 북미지역에 머물렀던 SMA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졌다.
성 베사스와 아가티노의 팰러틴 기사 수도회 소속 21번 수도원은 나자리오 신부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사망, 실종됨으로써 해체, 재편성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21번 수도원이 자리잡았던 마을은, 그런 세상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현지 주민은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