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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의 무개념 분지
사냥꾼의 밤 본문
별빛조차 숨을 죽이고 미동하지 않는 고요한 숲 속을, 별안간 화살이 가르었다. 올빼미의 깃을 단 화살은, 원 주인이 그리했던 것처럼 주위의 정적을 깨트리지 않고 조용히 목표를 향해 전진해간다. 찰나의 시간 동안, 화살촉은 전나무의 가지에 쌓인 눈꽃을 떨어트리려는 양 스쳐 지나가다, 별안간 멈추었다.
사냥꾼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화살을 쫓았다.
해가 사라진지 몇시간이 지나 코가 시린 차가운 공기가 나무 사이를 맴돌았지만, 자신이 쏘아낸 화살을 쫓는일은 사냥꾼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복히 쌓인 눈밭 위에 눈부신 만월의 빛이 쏟아져 그의 길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거뭇거뭇한 혈흔을 뒤따라 어지러운 숲 속을 십분여 걸었을까, 사냥꾼은 눈 위에 누워 힘들게 숨을 내쉬는 사슴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주위의 눈은 이미 피를 잔뜩 머금고 새하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냥꾼은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는 목에 찔러넣었다.
발버둥은 미미했다. 사슴은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게 정확하리라. 어떤 측면에서, 사냥꾼은 사슴에게 자비를 배푼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 측면은 인간의 측면이었지만. 합리화는 인간의 미덕이라고 했나. 심장의 마지막 몸부림을 칼 손잡이로 느끼다, 뽑아냈다. 숨이 끊어졌다. 남은 것이라곤, 침엽수 사이로 빛나는 밤하늘을 담은 체 차가히 멈춰버린 사슴의 눈동자 뿐.
사냥꾼은 사슴을 잡았다. 그리고는 등에 짊어매었다.
사냥은 취미가 아니었다. 사냥꾼은 누굴 만나 이야기하든 그 사실을 꼭 강조했다. 의미없는 살생은 하지 않는다, 이제는 말하지 않는 예전의 모토였지만 그 행위만큼은 습관으로 남아있었다. 필요하지 않으면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깊어져가는 이때, 둘은 내일을 살아갈 양분이 필요했다. 사슴은 목숨을 걸고 인간 주위까지 풀을 뜯으러 내려왔고, 사냥꾼은 목숨을 걸고 빈 속으로 밤의 산을 돌아다녔다. 도박. 승리한다 해도 큰 돈은 커녕 겨우 본전만 칠 내기. 질때까지 반복될 그 내기에서, 사냥꾼은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사냥꾼은 숲속을 걸었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였다.
암사슴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아니, 사냥꾼의 거대한 덩치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겪은 사냥꾼은 분명 늙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덩치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왕년의 그였다면 이정도 사슴을 짊어진다 해도 숨을 몰아쉬진 않았을 터였다. 다만, 그뿐이었다. 그는 어린 아이는 됨직할 사슴을 짊어지고 가파른 산길을 내려갔고, 거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사냥꾼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집을 보았다.
불이 켜져있었다. 사냥꾼은 늙어가고 있었지만 기억은 아직 선명했다. 사슴의 마지막 맥동을 기억하는 만큼이나, 오두막을 나서기 전 등불을 꺼두었음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장작이고 기름이고, 사냥꾼은 무엇하나 낭비할 형편이 아니었다. 불은 언제나 거듭해서 확인했다. 필요하지 않다면 언제나 꺼두었다. 따라서, 불이 켜져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불은 달빛이 비추는 밝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냥꾼은 사슴을 장작 창고 위에 올려두었다. 이 추위 속에서라면 반시간도 되지 않아 얼어붙어 손질하기 매우 까다로워 질테지만, 지금은 그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손님이 있었다. 그리고 사냥꾼이 알기로는, 이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 치고 좋은 손님은 없었다.
사냥꾼은 품 속에서 리볼버를 꺼내어 공이를 당겼다. 찰칵. 매일같이 깔끔하게 관리된 실린더가 기세좋은 소리를 내며 한칸 전진했다. 차갑게 빛나는 은빛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굳게 쥐고는, 사냥꾼은 오두막의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버질?"
벽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앉은 낯선 남자가 사냥꾼을 향해 말을 걸었다. 사냥꾼은 생각했다. 대답해야할까? 그 이름은, 한때 사냥꾼을 부르는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벌써 3년째, 그 이름을 쓴 기억도 없었다. 이 산 속에서, 그는 사냥꾼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사냥꾼은 대답하지 않더라도 괜찮을지 모른다,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금새 생각을 거두었다. 그리고 말했다.
"여긴 사유지요. 나가주었으면 좋겠네만."
낯선 남자는 사냥꾼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꼰 체로 온기를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여기 있었던 것일까. 집 안의 공기는 이미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장작을 지나치게 넣은듯 했다. 저 장작이라면 3일을 버틸수 있을텐데. 사냥꾼은 리볼버의 총구를 남성에게 겨누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가지 않으면 쏘겠소. 사유지에서 당장 꺼지시게."
사냥꾼은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금 경고했다. 검지와 엄지 손가락만을 얇은 가죽으로 마감한 장갑 덕에, 차가운 방아쇠에 걸리는 미묘한 압력마저 사냥꾼은 느낄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발포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조금씩 조금씩 쥐여들어 리볼버의 금속 부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버질 컨피던스, 맞지? 산 속에 틀여박혀서 수염을 기르고 은자 생활을 한다고 우리가 자네같은 덩치를 못찾을 줄 알았나?"
"모르는 이름이요. 자. 이제 나가주시게나."
마치 시치미를 떼듯, 남성은 사냥꾼의 경고를 무시하고 벽난로 옆의 쇠꼬챙이를 집어들었다. 장작을 헤집자, 검게 타들어가던 장작이 부서지고 무너지며 더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향나무의 훈연이 더욱 강해졌다. 방아쇠를 쥐어드는 힘도 더욱 강해졌다.
"쏴봤자 의미 없어. 내가 맨몸으로 왔을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이미 내 요원들에게 이 주위를 포위하라고 이야기 해놓았어. 총성이 울리면 그대로 자네는 벌집이 되는거야. 설사 거기서 살아난다 해도,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산 아래의 주방위군이 이 숲을 이잡듯 샅샅이 뒤질테고. 그냥 잠자코 투항하는 편이 자네의 목숨을 더 연명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야."
남자는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외판원이었다면,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덜컥 물건을 구매했을 그런 목소리였다. 그래서였을까, 사냥꾼은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총구는 그대로 남자에게 향한체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문을 조심스래 닫았다. 삐걱이는 소리. 이 오두막에서 사냥꾼이 유일하게 친숙하게 여기는 소리였다. 그 외의 모든 것, 남자의 향취와 태도, 숨소리 모두가, 매우 낯설었고 때문에 기분 나빴다. 사냥꾼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엔 경고가 아니었다.
"늙은이를 잡기 위해 더럽게 먼 길을 왔군."
"알아주는건가? 그거 참 고맙군. 그 리볼버를 버리고 투항해서 일을 덜어준다면 더 고맙겠는데."
"내가 그렇게 다채로운 인간관계를 가진건 아니지만, 그렇지, 자네도 이름이 있겠지?"
"솔로몬."
"그래, 솔로몬 요원, 내가 그렇게 다채로운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자네와 같은 사람은 몇번 본적이 있네. 거저 주워진 돈과 권력에 취해, 뭐든 할수 있고 누구든 건드릴수 있는 줄 아는 오만한 이들. 그런 치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자네도 익히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하지만 말야, 난 자네의 좌우명도 알고 있어. 그래, '무의미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저항하는거야 말로 무의미한 살생이지. 그 총이 불을 뿜으면 무슨 짓을 하건 말라 비틀어진 깡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이 찾아올테니. 그러니 잘 생각하라고."
사냥꾼은 한숨을 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늙었다. 아직 살쾡이처럼 재빠르고 곰처럼 영리하지만, 총격전을 경험한건 몇년 전의 이야기였다. 사냥꾼은 사냥을 할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총격전과는 달랐다. 사냥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했다.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 시간을 들인다면, 사냥의 성공률은 카드를 카운트하는 블랙잭의 테이블마냥 한없이 올라간다. 허나 총격전은 달랐다. 총알이 어디로 튈지, 적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수는 없었다. 악연과 악연이 겹치면, 다음에 보는건 자신의 묘비가 될 터였다. 그런 도박을 할만한 판돈이 자신에게 있는가. 사냥꾼은 고뇌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한가지만 묻지. 내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지?"
솔로몬이 코웃음쳤다. '겨우 그거?' 라고 비꼬는듯이. 세상에 물어볼 수 있는 수많은 질문을 두고, 그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이 한심하다는 양 굴었다. 하지만 사냥꾼은 진지했다. 그는 진전까지 사슴을 바라보았던 두 눈으로 솔로몬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런 사냥꾼의 두 눈을 응시하다, 마지못해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한 소녀가 이야기해주더군. 길까지 안내해줬어. 정말 친절한 소녀야."
사냥꾼이 한숨을 쉬었다. 앤. 앤. 웨스트 포인트 교역소의 말괄량이. 불필요한 일을 했구나. 사냥꾼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총을 돌려 총신을 쥐었다. 솔로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제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와. 한걸음, 한걸음."
사냥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소처럼 솔로몬의 말을 따랐다. 한걸음, 한걸음. 바닥의 목재가 삐걱이는 소리가, 타오르는 벽난로의 소음과 하모니를 이루었다. 타닥. 삐걱. 탁.
"그러고 보니, 자네 한가지 잘못 아는게 있더군."
"뭐지?"
호기심이 동한듯, 솔로몬이 물었다.
"내 좌우명 말이야. 이젠 더이상 그 말을 쓰지 않는다네."
삐걱. 삐걱. 타탁, 탁.
"안됬군. 좋은 좌우명같던데 말야."
삐걱. 삐걱.
타닥. 탁.
타탁.
사냥꾼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단검을 꺼냈다.
솔로몬이 반응하기도 전에, 15센치는 족히 되어보이는 단검의 칼날 절반 이상이 솔로몬의 가슴팍에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새하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솔로몬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더니, 떨리는 눈동자로 사냥꾼을 응시했다.
"무의미한 살생이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지."
솔로몬은 무언가 말하려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사냥꾼은 그것이 고통만을 가져다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냥꾼의 단검은, 정확하게 솔로몬의 폐를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냥꾼은 사냥감의 약점에 익숙해야한다. 그리고 지난 5년동안, 사냥꾼은 수많은 동물을 사냥하며 그 약점을 숙지했다. 사냥꾼의 앞에 앉은 솔로몬은, 또다른 동물에 불과했다. 사냥꾼은 단검을 뽑아 복부에 다시 찔러넣었다. 평소에는 꺼리는 행동이었다. 내장이 담긴 배를 무자비하게 찌르면, 가죽과 고기가 불필요한 칼질에 상하고 또 대장의 내용물이 흘러나와 고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몬의 고기나 가죽은 쓰일 일이 없었다.
"감히 내 집에서 내게 협박을 해?"
사냥꾼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솔로몬의 귓가에 속삭였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희미해져가는 솔로몬의 의식에 새겨질때마다, 단검을 쥔 그의 오른손은 솔로몬의 내장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그 칼을 통해, 사냥꾼은 몸부림을 느꼈다. 여느 사냥감의 숨통을 끊을 때마다 느껴지는 몸부림. 다만 이 순간에서야, 사냥꾼은 깨달았다. 그는 사냥 그 자체 만큼이나, 사냥감의 마지막 몸부림을 즐기는걸지 모르겠다고.
솔로몬에게 그런 깨달음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가 신경쓰는건 단 한가지 밖에 없었다. 한가지 밖에 신경쓸 수 없었다. 손에 쥔 작은 주머니를 벽난로에 던지는 일.
"애 쓰는군, 솔로몬 요원."
그렇게 말하며 사냥꾼이 단검을 요원의 복부에서 뽑으려 할때, 벽난로가 새하얀 섬광을 흩뿌리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어두운 방을 가득 채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얼어붙은 숲을 새하얗게 비추었다. 탐욕스러운 섬광은 텅 빈 하늘에서 홀로 빛나던 보름달의 달빛조차 집어먹고는 격렬하게 타오르며 계곡 곳곳에 그 흔적을 뿌려댔다.
빛으로만 이루어진 그 새하얀 표지를 보안관들이 놓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밭 위에 몸을 감추던 장정 열댓이 이를 신호로 몸을 일으키자, 뒤집고 있던 판초 위에서 눈이 떨어졌다.
"도와줘서 고맙네. 이제 여기서 기다리게."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장정이 그들을 뒤따라 일어선 소녀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선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연륜이 느껴졌다. 수많은 동료를 잃고 그들의 가족에게 비보를 전하는 연륜. 가족들로 하여금, 과거를 품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조언하는 연륜. 뭇사람이라면 그 목소리와 그의 권위에 따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장정은 한숨을 쉬었다. 연방보안관으로써 버질을 뒤쫓는 지난 십년간 앤만큼 도움이 됬었던 사람은 없었다. 솔로몬조차 이를 인정했을테다. 그럼에도 앤은 민간인이었다. 연방보안관의 법집행 과정에 민간인을 동석시키는 것 자체가 수칙 위반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고집은 완고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알고 지내던 이를 밀고했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남자로써는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럼 오십걸음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게. 절대 머리를 내밀지 말고. 안전하다고 이야기할때까진 다가오지 마. 알겠어?"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정들이 일어섰다.
작지만 매서운 바람이 숲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선, 먼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모닥불을 향해 달려가는 나방처럼 사람들이 빛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공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그 상공에서는, 모든 것이 보였다. 사냥꾼의 발자국과, 이를 뒤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눈부신 화염에 침잠한 숲의 심연까지. 그리고 그 섬광은, 이내 조금씩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집째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열기가 어디까지 달하는지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았다. 집을 중심으로 주위의 눈이 십여미터가량 녹아내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장정들은, 그 원을 주위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마치 시계의 눈금처럼.
나이많은 장정은 총구를 들어 매섭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집을 보았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때문인지 창문은 깨어진지 오래였고, 그 불길은 옆의 장작 창고까지 옮겨붙을 기세였다. 여기서 살아남을 사람은 없겠지. 그는 생각했다. 솔로몬이고, 버질이고.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좋은 일은 아니리라. 그는 직감했다. 장정은 총의 손잡이를 더 굳게 쥐었다. 그리고는 준비했다. 버질은 시궁쥐와 같았다. 구석으로 몰면 몰아갈수록 약삭빠르고 교활해졌다. 죽었으리라고 생각한 상황에서 도망친게 수십번이었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신중하게, 모든 사람이 자리를 잡을때까지 기다렸다.
별안간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의식적인 공포에 의한 비명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반사신경에 의한 비명이었기 때문이다. 얇게 녹아내린 눈 밑에서, 녹슨 곰 덫이 새뻘건 어금니를 남자의 종아리에 박아넣었으니, 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려퍼졌다.
집 안이 아닌, 숲 속으로부터.
당황한 장정들은 총알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차가운 총신이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납탄을 쏘아냈다. 서로 다른 층위의 섬광이 집을 주위로 점멸했다. 타오르며 무너지는 집의 소음과 하나되어, 숲의 정적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지 오래였다. 선두의 외침이 들릴 턱이 없었다. 사격 중지라는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
허나 사격은 이내 멎었다. 명령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총알이 바닥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보다는, 더 외부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물리적으로. 지리적으로. 마침내 진정되었다고 생각되었을때, 또다시 누군가가 총을 쏘았다.
장정을 향해 총을 쏘았다.
누군가 숲 속에서 총을 쏘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땐 이미 장정의 반이 눈 속에 쓰러져 있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몸을 돌리는 과정에서 둘이 더 쓰러졌다. 분노에 찬 목소리로 선두가 말했다.
"버질! 연방보안관이다! 연방 재산을 갈취하고 신분을 위조하며 수십명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했었던 체포 영장을 집행한다! 자항하면 사격하겠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사냥꾼은 보안관의 머리에 리볼버탄을 박아넣어 대답했다. 보안관으로써는 별 수 없었다. 새하얀 섬광이 눈을 멀게할 뻔 했음에도, 이곳은 사냥꾼의 땅이었다. 솔로몬의 주머니가 밝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사냥꾼은 본능적으로 집 안에 감춰둔 무기를 집어들고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올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그는 무력했다. 별 수 없었다. 그건 내기였다. 목숨을 건 내기. 그리고 그는 또 한번, 그 내기에서 승리했다.
"겁도 없이 이곳으로 기어들어오다니, 빌어먹을 늑대보다 미련한 짭새 새끼들! 그 내장을 따 곰 미끼로 써주마!"
사냥꾼의 호령이 숲을 울렸다. 두명밖에 남지 않은 요원중 한명이, 숨을 몰아쉬며 나무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가 부서졌다. 시체는 나무를 안듯 쓰러졌다. 그의 주변으로,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도나티? 폭스? 세상에, 세상에, 신이시여."
마지막 덫에 걸려있던 장정은, 오도가도 못한체 자리에 꿇어앉아 떨고 있었다. 사냥꾼은 실망했다. 사냥감치고, 이들은 형편없었다.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미끼조차 제대로 못할 놈들. 덫에 걸린 여우가 이들보다는 무서울 터였다. 목숨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애송이들. 그는 녹아내린 진창을 걸으며 생각했다.
"애송이같으니라고."
리볼버를 꺼내 그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 총알이 없음을 알렸다. 하지만 사냥꾼은 당황하지 않았다. 언제나 있는 일이라는 양 행동했다. 사냥감이 총을 꺼낼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했다. 남자는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뒤로 기어갔다. 하지만 멀리 갈수는 없었다. 사냥꾼은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고, 낡은 쌍렬 산탄총을 꺼내들었다. 남자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사냥꾼은 그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나서야, 총성이 멎었다.
이제는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건조해서야, 불길이 금방 번지겠군. 사냥꾼은 생각했다. 몇년동안 애써온 보금자리가 이렇게 시뻘겋게 불타오를 줄이야. 바닥부터 다시. 이런 짓을 하기엔 너무 늙었잖아. 사냥꾼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처음도 아니었다. 바닥부터 시작하는건 그의 특기였다. 그는 몇번이고 과거를 버리고 다시 시작했었다. 힘들기야 하겠지만, 사는게 그런게 아니겠는가.
사냥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총을 메었다.
별안간 벼락이 내리쳤다.
아니, 사냥꾼은 그런게 아닌가, 하고 순간 생각했다. 그럴리는 없었다. 이 마른 하늘에, 조용한 날에, 번개가 내리칠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냥꾼은 천둥을 들었고, 난데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냥꾼은 고꾸라졌다. 그리고 숲 안을 바라보았다. 불길 너머의 어두운 암막. 이렇게 밝은 세상에선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그리고 빛이 있으라. 사냥꾼은 비로소 그 속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속엔 앤이 서있었다. 자신을 향한 리볼버를 치켜들고서.
사냥꾼은 더이상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진창속에 몸을 뉘이고서 사냥꾼은 숨을 헐떡였다. 숨을 들이키려 할때마다 수십개의 칼날이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침을 멈출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수 없는 입가가 얼굴 반쪽을 뒤덮었다. 그것이 피라고는, 그로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애-"
'앤'이라는 작은 단어조차 그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피가 계속해서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나 달랐다. 솔로몬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사슴이? 그가 죽인 모든 사람이? 칼을 통해 느낄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냥꾼은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는 얼굴이네요. 아저씨. 기억 나세요? 당신을 처음 만날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앤이 말했다. 왜? 사냥꾼은 생각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지? 이 어린 소녀에게? 그가 버린 과거 그 어디에도, 이 소녀가 자신에게 찾아올 여지는 없었다고, 사냥꾼은 생각했다.
"어떻게, 어머니가 품고있던 아버지라는 인간의 사진과 그리도 똑같을 수 있던지."
누구? 사냥꾼은 생각했다. 그가 품었던 많은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이 지나 풍화된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방황하는 사냥꾼의 눈동자 위로, 앤이 사진을 들이밀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 그 옆의 여인은 기억나지 않았다.
"5년동안 당신을 쫓았어. 당신이 여기 있는걸 안 뒤로는 연방보안관에게 도움도 얻었지. 별 쓸모는 없었지만. 왜 당신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비웃는지 알겠어. 젠장. 당신을 사냥하는 동안 당신이 왜 사냥꾼으로 숨어지내는지도 알것 같더라고. 사냥감을 쫓는게 재밌었던 거겠지. 그 스릴을 완전히 뒤로 하고 도망칠순 없었던 거겠지."
앤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맞았다. 사냥꾼은 사냥꾼의 삶을 뒤로 할 수 없었다. 사냥감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썬 당연한 말로였다. 하지만 사냥꾼은 생각했다. 이건 불공평했다.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냥꾼이라니. 목숨을 걸었는지 알수도 없는 내기라니. 이건 사기다. 사냥꾼은 불평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네. 당신이나, 나나."
앤은 말했다. 그리고는 일어섰다. 피 웅덩이에 잠기는 사냥꾼의 몸뚱이를 바라보다, 앤은 눈을 털었다. 그녀에겐 사냥꾼과 같은 취미는 없었다. 사냥꾼의 마지막 목숨을 느끼는 취미는 없었다. 사냥감에게 마지막 자비를 배푸는 취미도 없었다. 앤의 사냥은 내기였던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사냥이란 목적에 불과했다. 달성하면 잊고 넘어갈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어느 사냥꾼처럼, 인생의 목적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홀로 헐떡이는 사냥감을 뒤로 하고,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건물을 뒤로 하고, 사냥꾼은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그리고는 그렇게,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 밤은 사냥꾼의 밤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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